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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냐의 SWEET STORY

이렇게 싱싱한 재료들이라면 호스텔의 끔찍한 부엌이라도 괜찮아

On June 19, 2014

샌프란시스코 출장 중 우연히 알게 된 파머스 마켓. 찬란한 색감의 싱싱한 재료가 넘쳐나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요리를 향한 원초적 욕구가 솟구쳤다.

1 아름다운 언덕의 도시 샌프란시스코를 달리는 투어버스.
2 형편없는 주방에서 소시지를 요리할 때는 무조건 데치기!
3 갖가지 버섯을 파는 가게. 명이나물과 비슷한 램프(ramp)도 눈에 띈다.
4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받고 자란 과일들.

남의 부엌은 낯설다. 내 키에 맞지 않는 개수대, 동선과 맞지 않는 양념 선반, 손에 익지 않은 칼 등. 낯선 부엌에서 요리하는 일은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채로 큰 시험을 치르는 듯 막막하다. 어느 해 출장길, 샌프란시스코의 낡은 호스텔 부엌에 섰을 때도 그랬다.

넉넉한 것이 없는 출장이었다. 여정도, 여비도, 마음의 여유도 그랬다. 예산에 맞춰 예약한 호스텔은 내가 분명 잘못 찾아왔다고 착각할 정도로 홈페이지의 화사한 사진과 너무 달랐다. 무척이나 낡고 어두웠으며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그래도 공용이긴 하나 부엌이 있으니 현지의 싱싱한 재료를 조달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겸사겸사 식비를 좀 줄일 수 있겠지 기대했으나 직접 마주한 호스텔 부엌은 그저 파스타 몇 봉지가 선심 쓰듯 놓여 있고 기름때 낀 냄비 몇 개만 갖춰 있는, 걸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이물질들이 신발에 쩍쩍 들러붙는 아주 지저분하고 허술한 곳이었다. 호스텔 부엌을 둘러본 뒤 나는 맛난 음식을 해 먹으며 출장비를 아껴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차 없이 접었다. 그런 부엌에서는 요리를 할 수 없었다. 끔찍한 부엌은 샌프란시스코의 여름 추위보다 더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그 모든 것을 위로하고도 남은 것은 샌프란시스코 도착 후 며칠 뒤에야 찾은 항구 근처 페리빌딩의 존재였다. 페리빌딩에는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듬뿍 먹고 자란 갖가지 싱싱한 식재료가 즐비한 파머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고, 다양한 구르메 숍과 델리, 레스토랑이 밀도 있게 들어차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최고의 빵집에서 내놓은 갖가지 빵, 책에서만 봤던 다양한 버섯, 처음 보는 치즈들이 넘쳐났고, 싱싱한 허브들은 마치 우리 재래시장의 대파처럼 한 손에 쥐기 힘들 정도의 다발로 묶여 향기를 뽐내고 있었다. 그 밖에 노란 주키니와 새빨간 체리와 파릇한 콩을 파는 찬란한 색감의 좌판 사이를 홀린 듯 돌아다니다 보니 요리선생으로서의 원초적 욕구가 솟구쳤다. ‘나도 장 봐서 요리하고 싶다! 호스텔의 부엌이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익숙한 듯하면서도 색다른 모양과 색감의 채소들로 가득했던 파머스 마켓.

페리빌딩을 누비며 호스텔 부엌 사정을 고려해 최대한 간단히 장을 봤지만 막상 부엌에 풀어놓으니 제법 많았다. 우선 메인으로 준비한 근처 농장의 무항생제 고기에 라임과 실란트로를 넣어 만든 소시지를 끓는 물에 풍덩 담가 속까지 뜨겁게 익히기로 했다. 그리고 애피타이저는, 어느 전통 있는 델리에서 사 온 살루미와 절인 올리브를 접시에 보기 좋게 담고 비니거 대신 미닛메이드 레모네이드와 샌프란시스코 블렌딩 올리브 오일로 급조한 드레싱에 살짝 버무린 루콜라를 곁들여 완성했다. 파스타 메뉴로 선택한 감자와 리코타치즈로 만든 뇨키는 끓는 물에 넣고 동동 떠오를 때까지 익혀 이즈니 버터를 넣고 사르르 녹아내릴 정도로 버무린 다음 버섯 가게에서 산 트러플 소금으로 우아한 향과 간을 더했다. 여기까지 준비하니 소시지가 마침 속까지 뜨겁게 익었다.

1 모둠 살루미와 올리브, 루콜라로 만든 애피타이저.
2 이즈니 버터와 트러플 소금으로 가볍게 터치한 뇨키와 소시지는 의외로 멋지게 어울렸다.
3 5달러짜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던 맛의 와인.

마트에서 산 5달러짜리 데이비드 스톤 피노누아 한 병을 오픈하고 드디어 식사 시작! 쿰쿰한 향과 제각각의 감칠맛을 가진 살루미와 짜지 않고 고소한 올리브, 그리고 미닛메이드로 만든 드레싱에 버무렸다고는 상상도 못할 맛의 루콜라샐러드는 설레는 맛이었다. 고소한 버터와 질 좋은 트러플 향이 입에서 매끄럽게 녹아내리는 뇨키는 트러플 향이 나는 따끈한 아이스크림이 있다면 이런 맛일까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감미로웠다. 그리고 오늘의 메인, 속까지 뜨끈하게 익어 부풀 대로 부푼 아주 통통한 소시지는 나이프로 자를 때 육즙이 툭 터지다 못해 접시에 가득 고일 정도였는데 소시지 속의 라임과 실란트로의 대단한 풍미가 캘리포니아 태양의 힘을 그대로 묘사하는 듯 강렬했다. 맛있었다. 더 바랄 것이 없는 식사였다. 서늘한 피노누아 몇 잔의 취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날의 저녁 식사가 내 샌프란시스코 출장의 모든 것이 되었으며 그 끔찍한 호스텔 부엌이 잊지 못할 부엌으로 기억되는 순간이었다.

라자냐는
미국 요리학교 CIA의 컨티뉴잉 에듀케이션 센터 (Continuing Education Center)에서 스타일링, 메뉴 플래닝 등을 수료하고 이태원 오키친 셰프 스스무 요나구니에게 서양 요리를 사사했으며 궁중음식연구원, 전통병과연구원에서 전통 음식을 배웠다. 푸드스타일리스트, 요리 관련 콘텐츠 기획 및 제작자로 활동하다 스튜디오를 마련해 요리를 가르쳤다. 현재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요리하며 요리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블로그 주소 http://blog.naver.com/lasagna7

샌프란시스코 출장 중 우연히 알게 된 파머스 마켓. 찬란한 색감의 싱싱한 재료가 넘쳐나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요리를 향한 원초적 욕구가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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