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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생각

매서운 입담으로 정치인들을 비판했던 유시민 작가가 JTBC <썰전>에서 하차를 결정했다. 그리고 역사가들에 대한 책으로 대중 앞에 섰다.

On August 1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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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선 눈으로 부패한 정권을 노려보던 청년 유시민의 사진은 요즘 젊은이들의 가슴에도 날카롭게 꽂힌다. 2013년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는 정치권의 최전방에서 여전한 눈빛으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50대가 된 그는 정계에서 물러나 냉철한 시각을 지닌 정치 평론가가 되었다가 박학다식한 아저씨가 되기도 하면서 대중에게 한층 가깝게 다가왔다. 오랫동안 출연해온 <썰전>에서 하차한 후, 스스로를 '글 쓰는 사람' '지식 소매상'이라 부르는 그답게 이번에는 역사가들의 역사를 다룬 신작 <역사의 역사>를 들고 대중 앞에 섰다. 그의 책엔 중국 고대 역사가 사마천부터 마르크스, 에드워드 H. 카, 재레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까지 동서양의 역사가 16명과 그들이 쓴 역사서 18권이 담겨 있다.


책에 대한 반응이 좋습니다. 예상하셨나요?
민망하고 약간 무섭습니다. 원래 출판사 사장님과 이 책을 기획했을 때 역사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꾸준하니까, 큰 욕심 부리지 말고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읽히는 책을 만들어보자고 했던 거였는데 지금 너무 많이 팔리고 있어요. 시시한 책 하나 내놓고, 너무 민망한 상황입니다. 약간 무서운 건, 요즘은 글 쓰는 사람이 하는 일이 많아졌어요. 마케팅이 예전과 달라졌죠. 전에는 책 발간 후 신문에 광고 한 번 내면 끝이었는데, 요즘은 '북 트레일러'라고 영화 예고편 같은 것도 만들고, 화보 촬영도 하고, 북토크 같은 것도 해야 되더라고요. 저자 강연도 인터넷 매체마다 따로따로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얘기를 들려줘야 하잖아요. 요즘은 다 동영상으로 SNS에 업로드하니까요. 죽겠는 거예요.


<역사의 역사>는 역사를 기술한 것도 아닌 역사를 썼던 역사가들에 대한 책입니다. 어떻게 이런 책을 쓰게 되셨나요?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란 훌륭한 책이 있죠. 저도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읽었던 책인데, 어려운 책이에요. 어려운 이유는 그 책이 영양가가 많은 책이라 그런 겁니다. 소화하기에 굉장한 에너지가 들어가기 때문에 소화력이 부족한 사람은 중간에 그만 읽거나, 책장을 넘기긴 했지만 그 영양가를 다 흡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보내버리는 거죠. 그래서 한국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역사책을 써보면 어떻겠냐고 출판사에서 제의해왔을 때 저도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역사 이론서를 쓰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 같았어요. 그건 학문적인 토대가 되어 있는 사람, 평생 역사학을 공부한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고, 그렇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역사책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해봤죠. 내 주장은 하지 않되 역사를 쓴 사람들이 각각의 문제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자들에게 역사에 대한 지적 욕구가 있었는지, <역사의 역사>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진지하게 역사 연구를 하고, 역사 서술을 하는 분들은 <역사의 역사>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실 것도 같아요. 근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책만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가끔 훌륭하면서 베스트셀러인 책이 있긴 하죠. 제 책이 별로 신통치 않은 책인데 많이 읽힐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단지 사람들이 원하는 내용의 책이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베스트셀러인 것이 책의 훌륭함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봐요.


역사책들은 어떻게 선정하셨나요?
우선 유명한 책들을 나열해서 한번 봤습니다. 그중에서 재미있는 것을 골랐죠. 제가 서사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터라 재미없으면 느낌이 안 오더라고요. 그다음엔 역사학의 발전 과정에서 영향력이 컸던 것을 따져서 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마르크스가 있는 것은 예상외였습니다.
마르크스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역사책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공산당선언'에 있는 그 짧은 몇 문장으로 인간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혁신했습니다. 그의 사상이 진리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 당시까지는 아무도 보지 않던 측면에서 역사를 봤다는 거죠. 마르크스 사상이 역사철학으로서, 또는 역사 이론으로서 완벽하지 않더라도 진리의 일면을 포착한, 그런 주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요. 책이 얇아서 괜찮겠다 싶기도 했죠.(웃음)


지식인들은 자기 복제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작가님은 계속 공부를 하십니다.
제가 전공이 없어서 그래요. 대학 전공은 경제학이지만 이걸로 먹고살진 않았기 때문에 깊이 있게 다루진 못해요. 저는 궁금한 게 있으면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도 이것에 대해 이 정도는 알면 좋겠다, 즐거워 하겠다 싶은 내용을 정리해 책을 냅니다. 제가 소매상이잖아요. '지식 소매상'. 지식 분야에서 최종 소비자인 독자와 직접 거래하는. 도매상인 학자나 연구가들이 제 작품을 보고 '잘 팔리는데 깊이가 부족하다'든가, '겉껍데기 지식을 팔아서 먹고사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꼭 영양이 풍부한 음식만이 좋은 음식인 건 아니잖아요. 맛있게 먹되 몸에 해롭지만 않으면 그것도 괜찮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 못한 자의 슬픔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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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종이책입니다. 종이에 역사를 서술한 역사가들에 대해 종이에 다시 서술하신 거죠. 디지털 시대에도 역사는 계속 문자로, 문서로 남겨질까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앞으로 과학 혁명은 더 진전될 것이고, 지구촌이 점점 작아지는 상황에서 과거와 같이 사실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지금과 같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 정보를 기록할 수 있는 양적인 한계도 문자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단계에 왔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서술한다'로는 표현이 부족해질 거예요. 역사를 '연출한다', 역사를 '제작한다'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봐요. 그렇다면 역사 기록을 하는 사람이 꼭 역사학 전공자이거나 기록을 담당하는 어떤 직종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컨대 방송 PD도 역사가가 될 수 있죠.


여전히 학교에서는 단순 암기식으로 역사를 가르칩니다. 역사적 사건을 외우기는 하되 전후 맥락은 빠져 있는 경우가 많죠.
제 아들이 고3인데 어떻게 하면 역사 공부를 잘할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저는 이렇게 답해줍니다. '옜다, 정답!' 이런 태도로 공부하라고요. 시험문제라고 나오는 문제들을 왜 풀어야 하는지,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는 문제인지, 이런 지식을 내가 왜 알아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 역사 교과서는 맥락 없는 정보를 너무 많이 가르쳐요. 그리고 그 맥락 없는 정보를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험문제를 너무 많이 내고요. 제가 1978년 1월에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을 봤는데 '이광수의 <무정>이 출간된 연도가 언제인가'란 문제가 나왔어요. 제가 서울대학교를 우습게 보게 된 계기예요. 신입생을 선발하는데 왜 이런 걸 묻는지 이해가 안 됐죠. 그런 문제가 여전히 너무 많아요. 이건 교육제도의 문제가 아니고 교육 내용과 평가 방식의 문제인데, 아무리 지적을 해도 바뀌지 않아요. 이른바 '공정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래서 저는 아들에게 항상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옜다, 정답! 니들이 이런 정답을 원하지? 내가 줄게. 그런데 이런 것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거 다 알아.' 이런 자세로 역사 공부를 하라고요. 그러고는 "어른들을 좀 봐줘라. 어른들이 이렇게 터무니없는 짓을 많이 한다"라고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역사 교육이 바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교과서 중에서 역사 교과서가 가장 못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교과서는 정부에서 만든 '교과서 집필 기준'이란 걸 따라요. 다수의 국민이 큰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고, 학계에서 다수가 인정하는 학설에 속해야 한다는 거죠. 자유로운 상상력이나 기발한 이론 같은 걸 허용하지 않아요. 그런데 과거는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는 거예요. 올바른 역사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죠. 그러니 역사 교과서에 많은 걸 기대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역사 교과서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국민의 기억 공동체거든요. 단지 한 사회가 기억의 공동체로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모은 것이 역사 교과인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은 그냥 가르치면 되고, 학생들은 그냥 배우면 돼요. 그러나 역사 선생님들이 "이 문제에는 이런 시각이 있고, 저런 시각도 있어. 그리고 교과서에 빠진 사실 중에 이런 사실이 있고, 이걸 중요하게 여긴 사람도 있어"라고 이야기해주면 좋겠죠. 선생님의 사견이라고 전제를 하고. 이런 지식은 참조만 하고 시험에 쓰면 안 되는 것을 아이들도 다 알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그 귀한 시간을 들여서 역사를 가르치는데 국가에서 정한 것만 딱 가르쳐주는 선생님은 성실한 선생님이지만 훌륭한 선생님은 아니죠.


인문학의 위기라고들 자주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역사책을 발간하셨고요.
지금 인문학의 위기는 국가의 재정 지원이 없어서 온 것은 아닙니다. 인문학을 하는 분들이 인간이란 연구 대상에 대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인문학은 우주와 자연에 대한 지식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인간이 특별한 존재라는 전제하에 지식을 쌓아 올렸어요. 그런데 최신 자연과학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고 이야기하죠. 인문학의 위기는 과학자들이 밝혀놓은 사실들을 인문학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학문에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측면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을 공부하려면 과학 공부도 같이 해야 해요. 최근엔 과학철학 분야가 굉장히 활성화되고 있고, 과학자들이 철학으로 접근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와 함께 방송했던 정재승 박사도 과학자지만 제가 놀랄 정도로 독서의 폭이 넓은 사람이에요. 저도 과학책을 읽는 데 큰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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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전>에서 날카로운 비판을 하시던 모습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역사책을 보면 그런 사례가 많기 때문에 저는 "65세가 넘으면 절대 공직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60세가 넘으면 가능하면 공직을 멀리하고 싶다"고 항상 말해왔어요. 제가 1959년생이잖아요? 그래서 <썰전>도 무서워지더라고요. 매주 국민 앞에서 이야기하는데, 점점 오류가 잦아지는 것 같았죠. 그런 판단을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글 쓰는 사람은 잘못 쓰면 자기가 망하는 거지 남한테 피해 주는 건 없어요. 출판사 사장님이 그런 책을 낸 거니 사장님 책임인 거지.(웃음) 이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때를 놓쳤을 땐 이미 분별력이 없어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자기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는지 모르는 거죠.


작가님 말씀을 들으니 최근 떠들썩한 아시아나항공 생각이 나네요.
미쳤죠. 아시아나의 대주주가 경영도 하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에는 자기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는 일이죠. 제정신이 아니죠. 역사적으로 보면 그런 비극이 엄청나게 많아요. 한 왕국이 망하고 제국이 기우는 거예요. 최고 권력자가 자신이 제정신이 아님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인지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자들이 이런 권력자를 이용해 자기 잇속을 챙기려고 계속 비위를 맞출 때, 한 제국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현상이 온갖 기업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그 기업들이 다 하나의 왕국이잖아요. 건강할 때 스스로 판단해야 해요. 아직 괜찮다고 스스로 생각될 때 결단을 내려야지 '난 더 이상 못 하겠어. 늙었나 봐' 이런 상태일 땐 이미 늦은 거예요. 그 기회를 놓치면 못 물러나요. 이게 사유재산제도에 입각한 민간 기업이 가진 경영권의 비극이에요. 왕국이 무너지는 것과 비슷해요. 제가 정치할 때 이 얘기를 했다가 싸가지 없다고, 노인 비하라고 욕을 엄청 먹었어요.


문득 생각난 듯 유시민 작가는 치매에 걸려 점점 기억과 정신이 희미해지는 주인공을 그린 할리우드 영화 <스틸 앨리스>에 대해 말을 꺼냈다.


<스틸 앨리스>라는 영화가 있어요. 치매에 걸린 여자에 대한 이야긴데, 주인공이 기억이 흐릿해지다가도 잠시 정신이 돌아올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자기 스스로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노트북에 입력해놔요. 힘이 없어 끝내 죽진 못하죠. 그 영화의 주제가 '자기 스스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지적 상태가 되었을 때, 나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예요. 역사 공부를 하면서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다음에는 어떤 책을 쓰실 계획인가요?
아직은 새로운 책에 대한 기획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행 작가를 해보려고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라오스를 여행하면서 쓴 책이 있잖아요? 최소한 그것보다는 잘 쓸 자신이 있습니다. 하루키 선생은 소설을 잘 쓰는 작가이지만 여행기는 좀 별로더라고요.


유시민 작가는 이제 중년을 넘어 노년의 길목에 있다.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청춘을 살아냈고, 어떤 정치인보다 열정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20대의 그것이 아니지만 그 정신만은 여전히 뜨겁게 꿈틀대고 있다.

(지난 7월 7일 진행된 유시민 작가의 <역사의 역사> 북토크 내용을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CREDIT INFO

에디터
김안젤라
사진
박충열
2018년 08월호

2018년 08월호

에디터
김안젤라
사진
박충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