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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전통 차와 차과자를 만나다.

On December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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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 차와 차과자를 연구하고 선보이는 소월당의 려강 이수아 대표가 재현한 차과자. 한국 전통 차과자와 이를 현대에 맞춰 응용한 다양한 차과자를 만들어낸다.

우리 전통 차와 차과자를 연구하고 선보이는 소월당의 려강 이수아 대표가 재현한 차과자. 한국 전통 차과자와 이를 현대에 맞춰 응용한 다양한 차과자를 만들어낸다.

소월당에 있는 가마솥은 차를 덖거나 팥을 삶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요즘에는 중국산 가마솥이 많아 일부러 골동품상을 찾아 구입해 사용한다.

소월당에 있는 가마솥은 차를 덖거나 팥을 삶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요즘에는 중국산 가마솥이 많아 일부러 골동품상을 찾아 구입해 사용한다.

소월당에 있는 가마솥은 차를 덖거나 팥을 삶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요즘에는 중국산 가마솥이 많아 일부러 골동품상을 찾아 구입해 사용한다.

차와 차과자에 대한 열정으로 뭉친 소월당 려강 이수아 대표.

차와 차과자에 대한 열정으로 뭉친 소월당 려강 이수아 대표.

차와 차과자에 대한 열정으로 뭉친 소월당 려강 이수아 대표.

경주 최부잣집에서는 ‘가문에 가객이 내방하면 차(茶)를 대접하는데 차를 마시고 몸에 탈이 나면 집안이 하천(下賤)되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차과자를 내어 차와 사보를 맞추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차를 마실 때 먹는 일본의 화과자가 있듯이 우리나라에도 차를 마실 때 함께 먹는 차과자란 것이 있다. 특히 차과자는 삼국통일 후 불교 문화가 융성하면서 함께 발달했던 차 문화와 그 맥을 같이한다. 한마디로 한국의 차과자는 일본의 화과자보다 더 앞선 것이다. 울산에서 소월당이라는 차과자 전문점을 하는 려강 이수아 대표가 우리 차와 차과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한국 전통 차와 차과자의 대중화를 꿈꾸다

서울에서 차로 쉬지 않고 5시간 남짓 걸려 도착할 수 있는 울산시 울주군에 위치한 소월당. 소월당은 블로그나 SNS 입소문을 타고 멀리서도 차과자를 먹기 위해 일부러 찾는 이들로 매일같이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전통 차과자 전문점이다. 려강 이수아 대표는 어릴 적부터 차를 즐기는 어머니 곁에서 자란 덕에 자연스레 차를 접하게 되었다. 이 대표는 부모님이 전원생활을 위해 마련한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차와 차과자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소월당을 열었다. 소월당에서 첫 대면한 차과자는 대충 보면 일본의 화과자와 비슷한 모양새를 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우리 차과자는 쉽게 접하기 힘들었고, 화과자에 많이 노출된 탓이다.

찬찬히 살펴보면 일본의 화과자가 형형색색 다양한 색감과 모양새를 가졌다면 한국의 전통 차과자는 수수하지만 은은한 색감과 심플한 모양새임을 알아차리고 그 기품을 느끼게 된다. 맛 또한 달게 만들어 차를 계속 마시게 되는 화과자와 달리 한국의 차과자는 약재를 넣어 약이 되게 만든다. 차는 우리 몸에 이롭지만 사하는 성질이 있어 빈속에 차를 많이 마시거나 몸이 찬 이들은 속이 냉해지는데, 이를 보하기 위해 차과자가 있다. 그래서 차과자를 차약(茶藥)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차와 차과자는 서로의 작용을 돕는 관계로 차에 관심을 가지면서 차과자를 공부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고 일본을 오가며 3년을 보내면서 경주 최씨 가문 종부들이 대물림을 하면서 간직해온 <세시기>에서 차과자에 대한 기록을 찾아냈다. 이후 최씨 가문에서 출가한 무산 스님을 찾아 기록 속에서 찾아낸 송화편자, 설화병, 학자초병 등의 차과자들을 재현했다. ‘한국의 차 문화는 일제감정기와 전쟁을 거치면서 맥이 끊긴 상태입니다. 대신 일본은 무사정권 시대에 차 문화가 빠르게 발전되었죠. 또한 조선의 차 문화를 받아들여 다도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고,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우리 자료들이 일본에 많이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제가 만든 차과자를 일본의 화과자라고 오해받을 때마다 속상하지요.

이런 오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우리의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해서 후손에게 알리는 것이 제가 할 일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이수아 대표. 전통 차과자를 찾고 연구하면서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대중에게 사랑받으면서 차 문화를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본인이 평생에 걸쳐 할 일이라고.
 

홍엽에 싸 내놓는 망개병. 그릇에 담아내도 좋고 찬합에 담아 선물하기도 좋다.

홍엽에 싸 내놓는 망개병. 그릇에 담아내도 좋고 찬합에 담아 선물하기도 좋다.

홍엽에 싸 내놓는 망개병. 그릇에 담아내도 좋고 찬합에 담아 선물하기도 좋다.

차를 올리거나 차과자를 낼 때는 전통적으로 차탁을 이용했다.

차를 올리거나 차과자를 낼 때는 전통적으로 차탁을 이용했다.

차를 올리거나 차과자를 낼 때는 전통적으로 차탁을 이용했다.

귀한 재료로 만든 차과자 전통을 이어가다

전통 차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면 보드라운 식감과 적당한 당도를 가진 부드러운 팥소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이런 식감과 맛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차과자의 참맛을 내기 위해 재래종을 찾아 키우고 그 재료를 손질하고 만들고 포장하기까지 모든 것이 이수아 대표의 손에서 이뤄진다. 보통의 차과자는 멥쌀과 찹쌀을 이용해 반죽해서 찌거나 찐 것을 성형해 만드는데, 멥쌀은 적비를 쓰고 찹쌀은 임금님에게 진상했던 대궐찰을 사용하는 등 토종 품종만을 사용한다. 쌀가루를 만들 때도 전통적인 수비 방식(곡물이나 감자 등 가루가 나올 수 있는 재료를 갈아 물을 붓고 휘저으면 잡물이 위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면 그것을 따라 버리고 물을 가만히 놔두면 깨끗한 앙금이 가라앉는다. 그 앙금을 말려 가루를 만든다.)을 고수한다. 팥 또한 시중에 판매되는 팥은 당도를 더해 달콤한 맛으로 먹는 경우가 많은데, 제대로 된 팥을 쓰면 풍미가 좋아 설탕을 많이 넣지 않아도 맛이 좋다. 이런 팥은 삶은 냄새만으로도 좋다. 한 일화로 한국의 차과자를 복원하기 위해 고서의 자료만으로는 부족해 일본의 차와 화과자를 배우러 갔을 때 선생님에게 한국에는 맛있는 팥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 맘이 상했던 적이 있었다.

좋은 팥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며 토종 팥을 찾던 중에 우리의 홍천팥 특상품이 일본에 수출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렵게 품질 좋은 토종 팥을 찾았고, 직접 재배도 한다. 이 전통 차과자의 앙금으로 사용하는데, 이 또한 가마솥에서 전통 방식으로 삶아내 진한 팥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어느 과정 하나 허투루 하지 않고 탄생한 차과자는 입속에 넣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려강 이수아가 전하는 전통 차과자

송화편자(松花䭏子)
신라 6두품 집안의 최승로가 즐겨 먹던 차과자. 형초세시기의 기록을 보면 송화편자를 처음 만든 이는 신라시대 충신인 최은함이다. 그는 최치원의 아들이자 최승로의 아버지로, 왕의 호위무사로 자위대장까지 맡았다. 평생을 무술 수업과 학문하는 것을 생활로 하여 적설산 가옥에서 다도로 수신했다. 려강 이수아 대표는 이것을 바탕으로 자양목 열매를 넣어 붉은 반죽을 해 차과자를 만들고 그 위에 송홧가루를 뿌려 신비로운 빛깔의 차과자를 만들었다.

학자초병(鶴子草餅)
학자초는 늦여름에 옅은 자색의 꽃이 피는 초본류의 식물로 이것으로 만든 것이 학자초병이다. 최승로의 아들인 최숙은 학자초를 채집하여 심고 이 학자초의 줄기와 잎을 달여서 그 액으로 학자초병을 만들었다.

청호병(靑蒿餠)
쑥(艾)을 옛날에는 청호(靑蒿: 푸를 청, 쑥 호)라고 불렀다. 청호병은 봄에 쑥을 가지고 만드는 차과자다. 경주 최씨 관가정 청파 대종손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차과자다.

순화병(舜花餠)
전통 차과자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국화인 순화를 차과자로 만들었다. 순화(舜花)는 무궁화 순, 순임금 순(舜)과 꽃 화(花)를 써서 무궁화를 나타내는 우리말이다. 옛 역사서의 기록에는 순임금이 ‘화관지후(火官之侯)’로 있을 때 곤륜산에 갔다가 흰색의 꽃이 더운 여름에 피어 있어서 채집하여 키우게 되었다 하여 사람들이 이 꽃을 순임금 꽃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전통을 연구하고 계승하면서 그것을 현대에 맞춰 발전시키는 것도 전통을 지켜나가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에 순화병뿐 아니라 목단, 연꽃, 매실, 구운 밤 등 사시사철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것들로 전통 차과자를 표현하고 있다.

망개병
풍미가 가득한 팥앙금을 찹쌀과 멥쌀로 만든 병피로 싸서 만든 것. 이것을 망개 잎에 싸는데, 보통은 푸른색 잎을 따서 소금물에 찌거나 약품 처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엽록소가 적은 홍엽을 사용한 것으로 디자인 등록을 했다. 홍엽을 사용하면 부패가 덜 되어 소금물에 찌지 않기 때문에 염분이 없고 색감도 좋다.

설화병(雪花餠)
설화병도 경주 최씨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차과자로 복령(한약재)이 들어간다. 설화병은 겨울에 눈이 오는 모습을 보고 차과자를 ‘눈꽃’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원래는 팥고물을 사용하는데, 쌀가루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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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차를 내는 순서. 차호에 든 말차를 다완에 담고 병표로 물을 떠 붓는다. 차선으로 말차가루와 물을 혼합해 완성된 차는 두 손을 모아 잡고 낸다.

말차를 내는 순서. 차호에 든 말차를 다완에 담고 병표로 물을 떠 붓는다. 차선으로 말차가루와 물을 혼합해 완성된 차는 두 손을 모아 잡고 낸다.

재래종 차나무를 심으며 차를 제작하다

차과자를 즐기기 이전에 차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차가 없으면 차과자의 존재 이유가 없다. 이수아 대표의 어머니는 공무원을 하던 시절 방문객들에게 커피 대신 차를 내곤 했다. 늘 그렇게 차를 준비하면서 차에 관심이 생겼는데, 어느 날 스님에게 차를 마시러 갔다가 중국의 발효차를 마시곤 그 맛에 놀라셨다고. 우리나라도 이렇게 맛있는 차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무모하게 차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차 문화가 흥했던 신라권이었던 울산의 남산이나 통도사 등지에서 재래종 차나무를 찾아 씨를 받아 차나무를 심게 되었던 것이 20년 전의 일이다. 늘 거실에는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탁자인 다탁이 있었고, 차를 일상처럼 마신 이수아 대표는 소월당에서 직접 만든 차를 내놓게 되었다. 터널식 차밭에 기계로 대량 생산하는 차가 아닌 그저 차가 좋아 맛있는 차를 만들기 위해 차나무를 띄엄띄엄 심어 영양분을 듬뿍 받게 키운 뒤 봄이 되어 여린 잎이 나면 따다가 가마솥에 덖어 녹차로 마셨다. 잎이 좀 더 커지면 발효차를 만드는데, 찻잎을 가마솥에 찌고 수분을 조절한 뒤 절구에 찧는다. 찻잎에서 즙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기계 대신 손수 절구에 찧는 과정을 거친다.
 

소월당에서 만날 수 있는 잎차인 월명차. 이수아 대표는 녹차와 발효차에 각각 ‘월명차’, ‘충담차’란 이름을 지었다. 신라에서 다도를 즐기던 유명한 스님으로 월명 스님과 충담 스님이 있는데, 먼저 태어난 월명 스님의 이름을 따 녹차를 ‘월명차’, 발효차에 충담 스님의 이름을 따서 ‘충담차’라 했다.

소월당에서 만날 수 있는 잎차인 월명차. 이수아 대표는 녹차와 발효차에 각각 ‘월명차’, ‘충담차’란 이름을 지었다. 신라에서 다도를 즐기던 유명한 스님으로 월명 스님과 충담 스님이 있는데, 먼저 태어난 월명 스님의 이름을 따 녹차를 ‘월명차’, 발효차에 충담 스님의 이름을 따서 ‘충담차’라 했다.

소월당에서 만날 수 있는 잎차인 월명차. 이수아 대표는 녹차와 발효차에 각각 ‘월명차’, ‘충담차’란 이름을 지었다. 신라에서 다도를 즐기던 유명한 스님으로 월명 스님과 충담 스님이 있는데, 먼저 태어난 월명 스님의 이름을 따 녹차를 ‘월명차’, 발효차에 충담 스님의 이름을 따서 ‘충담차’라 했다.

떡차는 물의 온도 조절 없이 철관자에 물을 끓인 뒤 넣으면 된다. 발효가 덜 된 떡차는 구워서 먹는다는 문헌상의 내용을 토대로 30년이 되지 않은 떡차를 불에 구워 철관자에 넣어 끓여 마신다.

떡차는 물의 온도 조절 없이 철관자에 물을 끓인 뒤 넣으면 된다. 발효가 덜 된 떡차는 구워서 먹는다는 문헌상의 내용을 토대로 30년이 되지 않은 떡차를 불에 구워 철관자에 넣어 끓여 마신다.

떡차는 물의 온도 조절 없이 철관자에 물을 끓인 뒤 넣으면 된다. 발효가 덜 된 떡차는 구워서 먹는다는 문헌상의 내용을 토대로 30년이 되지 않은 떡차를 불에 구워 철관자에 넣어 끓여 마신다.

절구에 찧은 찻잎은 틀에 넣어 동그랗게 성형하면 발효차인 떡차가 된다. 이는 돈처럼 엮었다 하여 돈차와 전차, 푸른 동그란 모양이라 하여 청태전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중국의 보이차가 후발효차라면 우리나라는 이 떡차가 후발효차다. 후발효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맛과 향이 깊어지는데, 할아버지가 만든 것을 손자가 먹는다고 할 정도로 오랜 시간 발효해서 마신다.

중국의 보이차는 30년이 지나야 먹을 수 있는데, 이수아 대표가 직접 만든 후발효차는 15년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제대로 맛이 들려면 30년이 되도록 기다려봐야 한다고. 이수아 대표는 많은 이들이 조금만 더 우리 차를 즐겼으면 한다고 당부한다. 차를 만드는 이뿐 아니라 차를 가르치는 이, 차 관련 도구를 만드는 이 등 여러 분야가 번성하여 차 문화가 발전하게 된다고. 오랜 세월 땀과 정성으로 만든 우리 전통 차와 함께 차과자가 우리 문화임을 알고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날을 그려본다.
 

오랜 세월 발효해야 하는 후발효차는 매년 떡차를 만들어 꼬리표를 달아 기록한다.

오랜 세월 발효해야 하는 후발효차는 매년 떡차를 만들어 꼬리표를 달아 기록한다.

오랜 세월 발효해야 하는 후발효차는 매년 떡차를 만들어 꼬리표를 달아 기록한다.

달천주조장에서 재현한 무쇠화로. 차솥과 다로가 함께 제작되었다.

달천주조장에서 재현한 무쇠화로. 차솥과 다로가 함께 제작되었다.

달천주조장에서 재현한 무쇠화로. 차솥과 다로가 함께 제작되었다.

다구를 통해 엿보는 우리나라 차 문화

차 문화의 발달은 다양한 다구에서 엿볼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것이라 생각하던 것이 우리나라 전통인 것도 있다. 이는 한·중·일 모두 비슷한 문화권에 있으며 활발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의 것이라 알고 있는 말차도 조선에서 전해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 모두 말차를 즐겼는데, 중국은 전차로 넘어가는 시기에 일본에서 말차가 번성하고 그것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요즘은 국내에서 일본의 말차를 즐기는 이들이 많은데, 우리 전통 말차를 더 발전시키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다.

무쇠화로 조선 성종 4년에 공전주조장에서 제작된 것으로 경주 최씨 대종손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것이었다. 40여 년 전에 도난당해 사진과 도면을 통해 울산 달천주조장에서 낡아서 부식된 것까지 똑같이 재현했다.

철관자 철의 주요 산지였던 울산은 무쇠화로를 비롯해 차와 관련된 다양한 무쇠 제품을 볼 수 있다. 무쇠 주전자인 철관자도 그 중 하나다.

다완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잔 또는 사발. 고문헌에는 다완을 지칭하는 구, 종, 잔, 완, 배 등 다양한 표현이 나온다. 이는 형상이나 크기에 따라 달리 불린다. 신라시대 귀족 문화의 상징이기도 한 안압지 터에서 다완이 발굴되기도 했는데 이는 7~8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입구 부분이 좁은 것은 추운 지방에서 사용하던 다완으로 차가 빨리 식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차호 말차나 잎차를 담는 아주 작은 항아리. 원래는 약을 담는 것이었다.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약의 약호로는 붉은색의 진사호를 사용했고, 머리(뇌)와 관련된 약을 담는 것은 검은색을 사용했다. 부위마다 색들 달리하다 다도에 적용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병표 물을 뜨는 도구인 대나무 병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의 것이라 알고 있지만 울산 지역 대나무숲의 대나무로 병표를 만들어 사용했다. 다탁(차탁)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찻상. 일본의 다도는 바닥에서 이뤄지지만 우리는 다탁을 사용했다.

Credit Info

기획
김은희 기자
사진
최해성
어시스트
손슬기
디자인
이혜수
도움말
려강 이수아(소월당 052-262-3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