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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진은 대체

On October 18, 2016

유해진이 다시, 수상한 눈빛을 번뜩인다. 어깨춤을 추고 재킷을 휘날린다. 고창 시골집의 넉살스럽던 설비부장은 온데간데없이, 속을 모르겠는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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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치 소재 트렌치코트·첼시 부츠는 모두 김서룡 옴므, 검은색 터틀넥 풀오버는 토즈, 검은색 와이드 팬츠는 보테가 베네타, 틴티드 컬러 렌즈 선글라스는 트리티 제품.

송치 소재 트렌치코트·첼시 부츠는 모두 김서룡 옴므, 검은색 터틀넥 풀오버는 토즈, 검은색 와이드 팬츠는 보테가 베네타, 틴티드 컬러 렌즈 선글라스는 트리티 제품.

아까, 카메라를 향해 맥주를 휙 뿌리던 순간은 대단했어요.
그러니까요. 좋았죠? 그때 신이 났어요. 하얀 거품 때문에 얼굴이 잘 안 나오긴 했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요? 장면이 중요하지.

촬영이 끝나고 포토그래퍼와 이런 얘길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별로 한 게 없다”고요.
아이고, 아니에요. 오늘 나도 참 재미있었어요. 촬영할 때 이것저것 강요하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아서. 사진 찍히는 순간이 그냥 슥 들어오더라고요. ‘SSG’인 줄 알았어요.

하하하. 이렇게 들어보네요! 유해진표 농담.
하하. 편하면 나와요, 편하면. 이런 농담이야말로 삶의 윤활유죠. 농담 없이 무슨 재미로 사나요? 아니, 그런데 정말로 오늘 뭔가를 강요하지 않고 만들어낸 결과물이 내 눈에는 좋았어요. 나는 사진을 잘 모르지만요.

 

검은색 셔츠는 김서룡 옴므 제품.

스태프들끼리는 그랬습니다. 유해진이 다 알고, 알아서 장면을 만드는 것 같다고요. 우리는 유해진이 출연하고 연출하는 장면을 그저 관찰하고요.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포토그래퍼가 흥을 탈 수 있게 해주더라고요. 아주 조용하게, 요란스럽지 않게. 나한테는 그런 게 아주 중요해요. 영화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배우가 어떻게 하기를 강요하는 현장이 있는가 하면, 가만히 두고서도 뭔가 할 수 있게 만드는 현장이 있어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거죠. 나는 그 차이를 크게 느끼는 편이에요. 이런 화보 촬영은 정말 오랜만인데, 편했어요. 마음이 편하니 막 움직이게 됐어요. 나는 일단 마음이 편해야 뭘 해요.

분위기와 기운에 영향을 많이 받으시나 봅니다.
좋은 기운과 분위기가 시너지를 만들잖아요. 그래야 모두가 마음을 맞춰서 마구 하고 싶어지잖아요. 나는 어디서든 그냥 일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 그 현장을 함께 만드는 사람이고 싶거든요. 영화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일하러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없어요. 오늘 나를 함께 작업하는 참여자로 만들어준 것 같아요. 포토샵 많이 해주세요. 하하.

정말요?
아니요. 사실은 그런 거 안 하고 그대로 나갔으면 좋겠어요. 쭉.

유해진을 마구 움직이게 하는 분위기는 어떤 건가요?
감정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분위기요. 아주 중요하죠. 아유. 그런데 가만 보면 촬영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다 얼마나 예민한 동물인지. 모두 감정을 소모하며 일하는 이들이니, 어떨 땐 말도 못하게 예민해요. 작게 던진 한마디에 마구 날이 서기도 하고 별것 아닌 한마디에 너무 좋아하기도 해요. 나도 그렇고요.

평소에는 그런 기질을 꽉 눌러두나요?
눌러야죠. 안 그러면 못 살아요. 내가 산에 즐겨 다니잖아요. 산이 나를 많이 중화하는 것 같아요. “자자. 컴 다운해” 하며 쓰다듬어주는 것 같아.

지금도 구기동에 살고 계신가요?
근 10년이 다 되었죠. 산자락에 집이 있어서 창문 너머로 건물이 보이지 않고, 자연이 펼쳐져요. 그게 좋아요.

여전히 매일 산에 오르시고요?
예전에는 일주일에 대여섯 번쯤 올랐어요. 거의 매일이었죠. 요즘은 무릎을 좀 쉬게 해줘야 할 것 같아 일주일에 두세 번만 가요.

산에는 어쩌다 그렇게 푹 빠지셨나요?

영화 <빙우>가 계기였어요. 산악 영화였는데, 그때만 해도 매번 다음 작품을 바로바로 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거든요. 작품 사이의 비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할까 고민하던 차에 <빙우>를 하게 된 거죠. 산에 올라보니, 여러 가지로 좋았어요. 몸에도 마음에도. 그래서 자꾸만 산에 갔어요. 거듭하다 보니 인이 박인 거죠. 언젠가부터 자연은 내 삶에 아주 큰 존재가 됐어요. 음. 오늘 날씨는 참, 빛깔이 꼭 겨울 같네. 겨울 눈 오기 전 같지 않아요? 싸한 게. 아주.

여름이 이렇게 가네요. 지난여름, 고창도 지독하게 더웠죠?
엄청났지요. 그러게, 벌써 지났다고 말하게 되었네요. 올여름은 정말 최악이었어요. 살면서 그런 여름을 보낸 건 처음이었어요. 너무 더워서 선풍기 틀고 가만히 누워 있어도 땀이 날 정도였어요. 견디다 못해 트럭으로 피신하곤 했잖아요. 그래도 만재도에 비하면 넉넉하고 푸근하게 지냈어요. 힘든 것으로는 만재도와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삼시세끼> 식구끼리 지금도 만재도 이야기 많이 해요. 그리워해요. 너무 이상한 경험이었으니까!

뭍에서 배로 여섯 시간 걸려 도착하는 섬이잖아요. 누가, 언제 그런 섬에 살아보겠어요.
예측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어요. 밥 해 먹으려고 마당으로 나가면, 솥뚜껑이 휙 날아가 버리고요. 그런 장면은 부러 연출하려고 해도 못할 거예요. 게다가 낚시는 또 얼마나 맘처럼 안 되던지. 아이. 뭐가 좀 잡혀야 밥을 해 먹을 텐데 죽어라 안 잡히니까요. 세끼 해 먹는 일에 그렇게 마음 졸이고 급박하고 절박했어요. 정말 절박했지.

만재도의 바람 소리는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나는 그 사운드가 생각나요. 솥뚜껑이 째랭쨍쨍! 날아가는 소리. 하하하. 아니, 진짜 바람이 어떤가 하면, 훅 불어요. 훅! 예고도 없이. 아이고, 그럴 때마다 너무 웃겼죠.

저는 <삼시세끼>를 라디오처럼 가만히 틀어두고 다른 일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져요. 폭소하길 기대하지 않고, 가만히 보게 되는 예능은 <삼시세끼>가 유일했어요.
그렇지요. 다른 종류의 예능이었으면 나는 못했을 거예요. 게임을 원하거나, 그러면 나는 잘 못해요. 가까운 사람들과 일상을 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오락 프로그램이라서 할 수 있었지요.
 

남색 줄무늬 재킷·팬츠는 모두 휴고 보스, 흰색 셔츠는 꼬르넬리아니 제품.

곧 다시 코미디 영화 <럭키>로 만나게 됩니다.
<럭키>는 오래간만에 코믹한 걸 제대로 해본, 반가운 작품이지요.

게다가 원톱 주연이시죠. 유해진표 코미디에 날개가 달렸습니다. <해적> 뒤로 한동안 보지 못한 유해진의 코미디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됐어요.
사실 되게 많이 공부해야 했던 영화예요. 풀어야 할 숙제도 많았고요. 제대로 된 코미디 영화이면서, 전체적인 흐름과 메시지 역시 전달하려면 내가 뭘 찾아내야 하는지, 많이 고민했어요. 감독님과 함께 엄청나게 머리 싸매고 만들었어요. 웃음 코드라는 게요. 반 박자 호흡을 놓쳐도 재미가 없어질 때가 많아요. 웃기려고 하는 게 들켜도 안 되고요. 그것만큼 민망하고 슬픈 게 없잖아요. 안 그래요? 싸해지니까. 관객과 타이밍 맞춰 교감하는 코미디를 만드는 게 쉽지 않거든요.

유해진에게 코미디는 늘 수월해 보였습니다만.
아니에요. 코미디는 정말 어려워요. 보는 사람들이야 ‘저렇게 까불기만 해도 되는 직업이니 얼마나 쉽고 좋으냐’ 할 수도 있는데, 사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면 성공한 코미디죠. 그렇잖아요. 배우가 한 고생이 관객에게 보이면 안 되잖아요. 그럼 코미디가 아니라, 불편한 게 되어버리잖아요. 자연스럽게 보이게끔, 그러면서도 웃음을 유발하게끔 만드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아요.

<왕의 남자>의 육갑부터 <해적>의 철봉까지. 지금껏 해온 코믹한 역할 중 가장 즐긴 인물이 있었는지요?
내 본연의 웃음 코드는 작품 속 코미디와 별개로 봐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삼시세끼>에서 농담하는 건 그냥 나의 일상이잖아요. 다소 유치한 농담이고요. 나도 유치한 줄 알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웃음에도 퀄리티가 있잖아요. 나는 쉬운 말장난으로 연결되는 코미디는 별로예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그런 유머를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진 않아요. 코미디의 유머는 유쾌함을 내세워 어떤 문제를 다루는 것이 되어야 해요. 내가 하고 싶은 코미디는 블랙 코미디를 필두로 한, ‘이유 있는’ 코미디예요. <럭키>에도 블랙 유머가 들어 있어요.
 

베이지색 스탠드칼라 셔츠·검은색 팬츠는 모두 김서룡 옴므 제품.
우리가 보아온 유해진의 코미디가 대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거의 그랬죠, 거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코미디일지라도 작품이어야 한다고 봐요. 극은 극으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 하죠.

드라마 <토지>에 출연하면서 정극에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영화 <이끼>로 그 갈증을 한 차례 해갈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영화판에 들어오고 나서, 한때 나는 언제나 코믹한 인물이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나의 그런 연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어떤 이야기 혹은 한 인간을 진지한 얼굴로 보여주는 일에 목이 말랐죠. 그럴 때 <이끼> 같은 작품을 만나게 되어, 참 좋았어요. 배우에게 한쪽 얼굴만 보여주고, 한 색깔만 입는 일이 이어지는 건 별로 좋지 않거든요.

소모될 테고요.
그렇죠. 배우에게는 당연히 이런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어야 하는데, 나는 계속 한쪽으로 치우쳐 있더라고요. 그래서 웃음기를 지운 작품들은 그야말로 단비 같았어요.

천호진과 함께한 영화 <죽이고 싶은>은 어떤 영화로 남아 있나요? 영화가 좋고 나쁜 걸 떠나서 개인적으로 그때의 유해진이 흥미로웠습니다. 어떤 벽을 허문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스스로는 “다른 배우가 했다면 더 세밀하게 그렸을 것 같다”고 평하셨죠.
나는 덜 디테일한 배우인 것 같아요. 스스로 그렇게 느낄 때가 있어요.

아쉬운 심정인가요?
아마도 그때 그렇게 말한 이유도 스스로 아쉬웠기 때문이겠죠? 만약 내가 맡은 역할을 송강호 선배님이 했다면 예민한 도구로 세공하듯, 세심하게 완성했을 것 같거든요.

몇 번이고 자신을 돌아보며 삽니까?
아니에요. 사실 그런 거 잘 못해요. 인디언은 그런다던데. 말을 몰며 달리다가도 잠시 멈춰 자기 영혼이 쫓아오고 있는가를 체크한다고 해요. 그대로 앞만 보고 가지 않는대요. 근데 뭐 영혼이 쫓아오는지를 어떻게 확인하겠어요? 그저 그런 시간을 가지는 것, 멈추고 돌아보는 것, 그들은 그것의 의미를 안다는 거죠.

지난여름 <삼시세끼>를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차승원과 유해진이 나누는 이야길 들으면서 나이 드는 것에 관해 자주 생각하게 됐습니다. 유독 그런 이야길 많이 하셨죠.
요즘 내가 정말 많이 하는 생각이거든요. 물론 아직 그렇게 늙은 나이는 아니지만요. 문득, 자주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가를 생각해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앞으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거지? (차)승원 씨도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데. 아마 지금의 우리가 그런 걸 많이 느낄 때인 것 같아요.

아직은 물음만 있나요?
이런 물음을 구하는 상태인 것이, 이걸 그냥 두지는 않겠다는 의미이지 않을까요? ‘늙는 게 뭐라고. 늙는 건 그냥 늙는 것일 뿐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나이를 먹는다는 건 가끔씩 서글프고 우울해지는 일이에요. 하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아요. 욕심은 점점 없어지고, 어떻게 흘러가면서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죠. 어떻게 흘러가면서 잘 살 것이냐. 나는 나이를 잘 먹고 싶어요. 정말로요.

 

유해진이 다시, 수상한 눈빛을 번뜩인다. 어깨춤을 추고 재킷을 휘날린다. 고창 시골집의 넉살스럽던 설비부장은 온데간데없이, 속을 모르겠는 얼굴로.

Credit Info

Editor
이경진
photography
김참
STYLIST
조은정
Hair
장규
Make-up
홍명연
COOPERATION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Assistant
김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