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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선고’ 조영남 단독 인터뷰

5년간의 법적 공방 끝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조영남은 초연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On August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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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겸 화가 조영남(76세)이 그림 대작(代作) 논란에 휘말렸다가 지난 6월 25일, 최종 무죄 선고를 받았다. 무려 5년간 이어진 법적 공방이었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난 이후에도 잡음이 계속됐지만 그럴수록 조영남은 차분하게 붓을 들었다. 그는 지난 5년간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우먼센스>는 잠시 대중의 시야를 벗어나 조용히 생활 중이던 조영남을 만났다. 무죄 선고 후 첫 인터뷰다. 직접 방문한 그의 청담동 자택은 평범한 가정집보단 화실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눈길이 닿는 곳곳에 미술품과 서적이 있었고, 겹겹이 세워둔 캔버스가 벽면을 따라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집 안 전경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평소에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조영남은 이곳에서 미술에 대한 허기와 갈망을 채웠다. 인터뷰 중간에도 습관처럼 붓을 놀렸다. 대화하다가도 그림에 집중하느라 몇 차례 긴 침묵이 이어지기도 했다. 매일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 짧은 시간을 빼고 나면 조영남의 하루는 오로지 그림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조영남에게 그림이란 어떤 의미일까? 쉬이 정의 내릴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임은 확실했다. 그가 반강제적으로 그림에만 몰두했던 지난 5년의 세월을 돌이켜, '호화로운 귀양살이'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

조영남은 지난 2016년 평소 알고 지냈던 무명 화가 송 씨가 조영남의 그림을 대신 그려줬다는 의혹에 휘말려 검찰에 기소됐다. 1심에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했고 2심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검찰이 2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심까지 이어졌다. 법적 공방은 5년간 끈질기게 계속됐고 대법원은 결국 조영남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판결과 별개로 논쟁은 여전히 수면 위에 머물러 있다. 조영남의 주장대로 조수를 고용해 그림을 지시하는 방식을 '관행'으로 봐야 하냐는 문제였다. 이를 두고 미술계의 입장도 첨예하게 엇갈렸다. 대중의 비난도 이어졌다. 데뷔 후 약 40년간 가수이자 화가로, 우리에게 친숙한 방송인으로 살았던 조영남 이름 앞에 결국 '사기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붙었다.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집 안 곳곳엔 화투를 소재로 한 그림이 즐비하다. 5년간 긴 법적 공방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그림에 대한 조영남의 사랑은 변함없다.

지난 5년간 어떻게 보내셨나요? 좋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좋은 쪽이 훨씬 컸지. 그림을 그리고 책도 두 권이나 내면서 부지런히 시간을 보냈거든.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도 좋았어. 이번 일을 겪으면서 아군과 적군이 확실히 갈리더라고. 가족 간의 결속력이 단단해지는 계기도 됐어. 반면에 법원서 자꾸 편지가 날아오는 건 좀 힘들었어. 1심에서 유죄판결이 났을 때는 평생을 사기꾼으로 살아야 하나 비감한 생각도 들더라고. 하지만 그게 내 운명을 더 화려하게 해준 거라고 생각해. 그 덕분에 귀양살이를 4년이나 더 했잖아. 그림에 더 몰입할 수 있었고 진지하게 임할 수 있게 됐지. 딸과의 결속력을 다진 게 가장 큰 수확이야.

그동안 가장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요? 당연히 딸이지. 얘가 언론에 나서는 걸 극도로 싫어해서 말 꺼내기가 조심스러워. 근데 난 또 그게 너무 예뻐 보여. 봐봐, 그림도 이렇게 잘 그린다니까(조영남은 딸 조은지 씨가 직접 그린 화투 그림을 취재진에게 보여줬다). 근데 여기(딸)를 조수로 쓰기가 영 까다로워. 아빠가 아양 한번 떨어야 들어줄까 말까야.(웃음)

부쩍 큰 따님이 많이 의지가 됐을 것 같아요. 이 사건이 아니었으면 그저 평범한 아버지와 딸 사이였을 거야. 하지만 여러 일을 겪으면서 내 딸이 참 든든하고 스마트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 나를 대신해 변호사들과 연락도 주고받고 많은 일을 해결해줬어. 딸이 나 무죄 만들어준 거나 다름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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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후 그린 그림. 다수의 사람이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는 것만 같은 심경을 그림으로 담았다.

무죄판결을 예상 못 했나요? 대법원에서 공청회를 열자고 연락이 왔을 때 '나한테 유리해질 수도 있겠구나' 조금 직감을 했지. 사실 공청회도 그렇게 큰 규모로 열릴 줄은 몰랐어. 대법관 4명, 고위급 검사 4명, 국선변호사 2명 사이에 앉아본 적 있어? 그 기분은 말로 표현 못 해요. 아주 경건했고, 동시에 내 생애 최고 '행위 예술'의 순간이기도 했어. 국가가 현대미술을 좋아했던 한 평범한 연예인을 그 순간에 화가로 등극시켜준 거야. 넌 이제 늙어서 목소리도 안 나올 테니 그림이나 그리며 살라고 등 떠밀어준 거지. 만감이 교차했어.

최후 변론 땐 울먹이셨어요. 너무 창피해. 그 자리에서 울먹이다니 남자답지 못했어. 나도 몰랐는데 5년간의 한이 있었나 봐요. 눈물이 흐르진 않았고 갑자기 울컥했지. 전혀 예상 못 했던 일이라 나로서는 평생 후회가 될 거야.(웃음)

사건에 대해 억울한 점이 있었나요? 당초에 내가 콜라주로 만든 작품이 하나 있어. 화투를 잘라 붙였는데 시간이 지나니 색이 바래더라고. 아크릴로 그리면 선명하게 오래갈 것 같기에 기술 좋은 조수에게 부탁해서 기존의 내 콜라주를 똑같이 새로 그린 거예요. 내가 직접 조수를 고용하고 지시를 한 건데, 왜 내 그림이 아니라는 거야? 이 문제로 지난 5년간 투쟁을 한 거야. 답답하고 암담한 기분이 들기도 했어.

그럼에도 얻은 게 있었나요? 그럼. 그동안 책을 두 권이나 썼는걸. 과거에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은 그걸 좀 더 쉽게 풀어낸 책이야. 곧 책 한 권이 더 나올 거야. 시인 이상을 더 띄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인 이상과 5명의 아해들>이라는 픽션을 썼어. 이상을 데리고 '그룹'을 만들었어. 남루한 기독 청년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이상, 입체파 피카소, 관음·천체·허공에 대한 희한한 시를 쓰는 니체, 음악을 완전히 팽창시킨 말러, 아인슈타인까지 내가 좋아하는 천재들이 함께 나와. 어때, 끝내주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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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책도 2권이나 썼어요. 그동안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 있게 됐고, 딸과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었어요. 꼭 나쁘기만 한 날들은 아니었습니다."

이상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세요. '이상의 양아들'로 불리고 싶을 정도야. 한국에서는 나오기 힘든 탁월한 천재야. 외국에서 태어났다면 '보들레르(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시인)' 그 이상이 됐을 거야. 이상이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은,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시제1호를 처음 발표할 때(1934년)였어. 당시에 그 난해한 시를 알아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이게 무슨 미친 소리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지. 한 번쯤은 <날개>처럼 쉬운 작품을 써줄 법도 한데, 그 글재주 좋은 사람이 끝까지 난해한 시만 쓰더라고. 고집스럽게 요상한 시만 쓰고 연재를 끝냈어. 세상에 이상 같은 사람이 한둘쯤은 있는 것도 좋지 않아?

타고난 천재성 이외에 이상의 매력은 뭘까요? <날개>처럼 쉽고 재미있는 글을 쓰는가 하면 <권태>처럼 토속적인 어휘도 구사하는 사람이야. 100여 편의 시를 쓰면서 단 한 번도 평범한 시를 쓰지 않잖아. 읽을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시를 쓰는데 내가 이걸 해설하려다가 뇌경색까지 왔다니까. 근데 참 연구할수록 교묘해. 파고들수록 깊이 빠져. 세상에 이런 글쟁이가 어디 있을까 싶어.

조영남은 어떤 사람 같나요? 음, 똑똑한 바보? 똑똑할 것 같지만 난 사실 아무것도 몰라. 지금 기자님이 나에게 무슨 질문을 할지 몰라.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 앞일을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터득해나가는 거야. 그러니까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더 친절하게 대할 거야. 국가가 5년 동안 날 이렇게 공부시키고 바꿔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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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비롯해 시대의 천재들에 대한 존경을 담은 픽션 <시인 이상과 5명의 아해들> 발간을 앞두고 있다. 표지는 조영남이 직접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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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그리는 게 버릇이 됐어." 조영남은 인터뷰 중간에도 쉬지 않고 작품에 몰두했다.

"이 사건이 아니었으면 그저 평범한 아버지와 딸 사이였을 거예요. 함께 여러 일을 겪으면서 딸이 참 든든하고 스마트하다는 걸 알게 됐죠."

더 이상의 미움 없이

지난 5년 동안 외로운 적은 없었나요? 외롭기도 했지. 정확히 외로운 만큼 안 외롭기도 했고. 외로움은 슬픔, 불행, 실패처럼 우리 인간이 항상 갖고 다녀야 하는 감정이야. 이걸 이겨내는 것도 결국 인간의 몫이지.

조수였던 송 씨에게 남은 감정은 없나요? 사건이 터지고 방송국 사장, 부사장까지 찾아와 권유했는데도 인터뷰를 다 거절했어. 이야기를 꺼내면 어쩔 수 없이 조수 욕을 해야만 하잖아. 남자로서 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안 했어.

송 씨와는 어떻게 작업하게 됐나요? 원래 알고 지내던 이 친구(송 씨)에게 2016년쯤 먼저 연락이 왔어. 원래 미국에서 살던 애인데 여비가 없어 못 돌아가고 있다고 하더라고. 경제적으로 어렵다는데 어떻게 모른 척하겠어? 처음 왔을 때 현금으로 300만원 정도를 주고 집에서 머물며 조수 아르바이트를 하게 했지. 그러다가 이런 일이 번진 거야.

송 씨에게 대접이 박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요즘 세상에 자기가 받을 돈 안 받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어?(송 씨는 조영남의 조수로 활동하며 작품 1점당 10만원을 받았다) 걔 입에서 돈이 적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박하다' '짜다' 이런 건 사정을 잘 모르는 대중이 하는 말이야. 업계 관행에 비해 적게 주지 않았어.

현대미술에 대한 회의감은 없었나요? 초장에는 그랬지. 이 사건에 휘말렸을 때 조수를 두고 작업하는 사람 중 누구 하나는 "이건 일반적인 일입니다"라고 얘기해줄 줄 알았어. 근데 다들 가만히 있더라. 세상이 그렇더라고. 내가 1심 당시에 그린 그림을 봐봐(조영남은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뒤 그린 그림을 취재진에게 공개했다. 조영남을 향해 권총이 겨눠진 그림이었다. 발가벗은 자화상 바로 곁에는 '쏠 테면 쏴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기존 그림들과 분위기가 다르잖아. 그땐 생각이 달라졌으니까 이런 작품을 그렸던 거야.

그런데 왜 그림을 놓지 못했나요? 내가 미술을 안 하겠다고 선언하면 다 끝날 일이었지. 근데 미술을 안 하고 살기가 힘들겠더라고. 내 나이 남자들은 보통 낚시나 바둑, 등산을 좋아한다지만 나는 미술이 제일 재미있어. 그래서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 단 한 번도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림으로 모든 걸 푸는 스타일이네요. 그림을 그릴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어. <시인 이상과 5명의 아해들> 속 인물들과 노는 것도 한동안 굉장히 즐거웠어. 그래서 사람들이 "그동안 고생 많았죠?"라고 안부 인사 건네는 게 반갑지 않더라고. 그동안 그림 그리고 공부하며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어.

▲다양한 인문학·미술 서적과 음악 앨범, 기타, 피아노까지… 조영남의 집은 그의 예술적 감수성으로 가득했다.

힘들 때 조영남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가 있다면요? 유인경을 비롯한 나의 오래된 여자친구들이지. 한 사람의 이탈도 없이 요즘도 다 잘 만나고 있어. 남자 나이 여든이 되면 곁에 있던 여자들이 다 떠난다던데, 그거 생각하면 벌써 스트레스야.(웃음)

나를 반대하는 미술계에 오기가 생기진 않았나요? 오기 같은 건 없어. 나는 그들과 계속 살아가야 하고, 그 안에 속해 있어야 해. 그래서 무죄판결이 나고서야 한결 편해졌지. 아직도 조수를 기용하는 것을 이해 못 하는 사람들도 있어. 피카소나 앤디 워홀이 유명한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다작을 했기 때문이야. 작품 수가 엄청나서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잖아. 우리나라도 이제 그래야만 해. 내 그림이 많이 팔리도록 그림 잘 그리는 조수 친구들을 써서 '공장'을 돌릴 생각이야. 법적으로 무죄판결도 받았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말이야.

나와 대립했던 이들에게 한마디 하자면요? 예전에 내가 그들에 대해 100년은 더 뒤떨어진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 미술 전공자도 아닌 내가 그런 말을 한 게 미안해서 지금은 사과하고 싶어. 그렇다고 내 생각이 변한 게 아니고 그들과 같이 현대미술을 해야 하니까. 음악은 규율, 박자, 음정 등이 수학 공식처럼 엄격하게 정해져 있어. 그에 반해 미술은 자유롭지. 현대미술의 공식을 깨준 마르셀 뒤샹의 변기를 봐(프랑스의 미술가 마르셀 뒤샹은 남성용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출품했고 이를 계기로 현대미술의 혁명가로 불렸다). 정교한 그림만을 미술이라고 부르는 시대는 지났다는 거야. 그런데 조수 기용 여부를 따진다? 오늘날 현대미술에서는 정말 유치한 얘기라고 봐.

조영남 인생에 그림이란 뭘까요? 가족이자 친구…. 가끔 내 피붙이 같기도 해. 애증과 모든 연민이 다 들어가 있어.

그래서, 그놈의 화투는 계속 그릴 건가요? 팔리면 그려야지. 예술이 뭐 별거인가.

화가 조영남은 어떤 사람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화가들이 빵모자 쓰고 폼 잡는 게 별로 근사해 보이지 않았어. 내가 나중에 그림을 그려도 그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 싶었어. 화가라는 말을 듣는 것도 좀 이상해. 서먹서먹해. 그냥 그림이 좋아서 그리는 거야.

여전히 색안경 끼고 조영남을 보는 대중이 많아요. 나도 내가 밉상인 거 알아. 본처와 헤어진 것도 대중이 나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일 거야. 피할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지.

논란 초반에 '사기꾼'이라는 수식어도 있었어요. 백남준 선생이 그랬잖아. '예술은 사기'라고. 나도 공감해. 내가 조수에게 10만원 주고 내 그림을 카피하라고 시켜서 100만원에 팔면 그게 사기로 보이지 않겠어? 나를 사기꾼으로 보는 사람들 눈에는 끝까지 그렇게 보일 거야. 어쩔 수 없는 거야.

방송에 대한 미련 없으세요? 별로 없어. 대법원 판결 이후로는 여기저기 섭외가 들어오는데, 아직은 생각 중이야.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자전거 타고, 가끔 골프 치러 가. 내 친구놈들 다 빌빌대는데 그래도 난 아직 건강해.

어느덧 인생 후반기입니다. 내 인생은 후반기에 폼이 나고 찬란해지는 것 같아. 며칠 전에 친구들과 파티를 했어. 일 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여는데 다른 때보다 올해가 재미있다더라고.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아. (무죄판결 후에) 다들 들떴어. 앞으로도 즐거울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즐겁게 살 거야. 조영남이잖아!

CREDIT INFO

에디터
박주연
사진
이대원
2020년 08월호

2020년 08월호

에디터
박주연
사진
이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