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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바이칼 여행을 위한 시베리아 이야기

유형지에서 남편들과 평생 고난을 함께 한 그녀들.

On April 0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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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 알혼섬의 소나무.

바이칼 호수 알혼섬의 소나무.

이르쿠츠크에 있는 두 개의 데카브리스트 기념관

바이칼 호수 가까이에 있는 동시베리아의 중심 도시 이르쿠츠크에는 데카브리스트 기념관이 두 곳 있다. 시베리아로 유형을 온 제정러시아의 귀족 혁명가들이 살던 집을 개조한 것으로 하나는 세르게이 발콘스키(1788~1865)의 집이고, 또 하나는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1790~1860)의 집이다. 유형 생활 끝무렵에 지어졌는데, 규모로 보면 발콘스키의 집이 조금 더 크다. 두 집 모두 지금은 기념관으로 잘 관리가 되고 있어 겉보기엔 근사하지만, 과거 주인 부부들이 겪은 고통의 세월과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온다.

발콘스키와 트루베츠코이 두 사람은 모두 러시아 귀족(공작)으로 실패로 끝난 1825년 12월 데카브리스트의 난(혁명)의 지도자급 인물이었다. 다행히 처형은 면했으나 당시 수도였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멀고 먼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서 30년간 강제 노역과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처형당한 사람은 다섯 명이었고, 유배형을 받은 사람은 116명이었다. 이들을 통칭해 ‘데카브리스트’라고 한다.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어로 12월을 뜻하는 ‘데카브리’에서 나온 말로 ‘12월의 혁명가’를 일컫는다. 흔히 ‘12월 당원’이라고도 쓰며 영어로는 디셈버리스트(Decemberist)라고 한다.
 

발콘스키의 집.

발콘스키의 집.

발콘스키의 집.

바이칼 호숫가의 기찻길과 환바이칼 관광열차.

바이칼 호숫가의 기찻길과 환바이칼 관광열차.

바이칼 호숫가의 기찻길과 환바이칼 관광열차.

사형 또는 유형에 처해진 121명의 데카브리스트 가운데 결혼한 이들은 23명이고, 사형당한 다섯 명 가운데 두 명이 기혼자였다. 나머지 부인 21명 가운데 11명이 남편을 뒤따라 돌아올 기약 없는 시베리아로 갔다. 시베리아로 간 여인 중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가 결혼한 사례도 있다. 이들도 남편을 따라간 11명의 부인에 포함된다. 11명 가운데 1856년 사면령이 내려질 때까지 30년간 살아남은 부인은 여덟 명이었다.

트루베츠코이 부인 예카테리나를 비롯한 세 명은 그사이 시베리아에 묻혔다. 여덟 명 중에도 남편과 함께 살아 돌아온 사람은 발콘스키 부인 마리야를 포함해 다섯 명뿐이고, 세 명은 미망인이 되어 돌아왔다. 먼저 발콘스키의 부인 마리야와 트루베츠코이 부인 예카테리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마리야 발콘스카야.

마리야 발콘스카야.

마리야 발콘스카야.

노년의 발콘스키.

노년의 발콘스키.

노년의 발콘스키.

마리야 앞에 닥친 험난한 운명

마리야(1805~1863)는 19세 때인 1825년 1월, 18살이나 위인 37세의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과 결혼했다. 같은 해 12월 14일에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터졌고, 마리야는 얼마 후인 1826년 1월 2일 첫아들 니콜라이를 낳았다. 그녀는 당시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출산한 지 닷새 후인 1월 7일 남편과 남편의 형제, 삼촌 등이 잡혀갔다. 이후 재판에서 남편은 종신유배형을 받았다. 당시 상황에서 보면 거의 끝장난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이르쿠츠크 거리.

이르쿠츠크 거리.

이르쿠츠크 거리.

마리야의 아버지 라옙스키 장군은 발콘스키로부터 이혼 동의를 받아 왔다. 라옙스키 장군은 나폴레옹을 격퇴한 1812년 조국전쟁의 영웅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라옙스키 장군 가족은 새로 황제가 된 니콜라이 1세의 가족과 가까운 사이였다.

마리야는 당국과 가족들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거부하고 남편이 있는 시베리아로 가겠다고 했다. 당시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시베리아로 가기 위해서는 당국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들이 유형을 떠난 후 시베리아로 남편을 따라가려는 아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이들의 시베리아행을 막기 위해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은 남편이 살아 있어도 재혼을 허락한다”는 특별법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시베리아로 가겠다고 고집하면 “귀족 신분과 특권, 재산 등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며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아이도 데려갈 수 없으며, 후에 시베리아에서 아이가 생기더라도 평생 농노의 신분으로 살아야 한다”는 등의 가혹한 조건을 내놓았다.

그러나 마리야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1826년 12월 22일 돌도 안 된 어린 아들 니콜라이를 친정에 맡기고(니콜라이는 2년 후 병으로 죽었다) 남편이 있는 시베리아로 떠났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시베리아로 가던 도중 그녀는 모스크바의 친척 지나이나 발콘스카야 집에 들렀다. 지나이나가 마리야를 위해 연 만찬에 마리야 가족과 가깝게 지냈던 시인 푸시킨도 참석했다. 이때 푸시킨이 마리야의 옆모습을 그린 그림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당시는 철도도 없던 때였다. 그녀는 살을 에는 듯한 혹한과 눈밭 속에서 수십 일간 마차와 이스보스치카(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달려 마침내 동시베리아의 수도인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트루베츠코이 집에 걸려 있는 예카테리나와 트루베츠코이 초상.

트루베츠코이 집에 걸려 있는 예카테리나와 트루베츠코이 초상.

트루베츠코이 집에 걸려 있는 예카테리나와 트루베츠코이 초상.

예카테리나 트루베츠카야.

예카테리나 트루베츠카야.

예카테리나 트루베츠카야.

남편의 족쇄에 입을 맞추다

이르쿠츠크에는 트루베츠코이의 부인 예카테리나(1800-1854)가 먼저 와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데카브리스트 부인 중에 가장 먼저 시베리아에 도착했다. 그녀 역시 부유한 집안의 딸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유럽에서도 오랫동안 생활했다. 예카테리나 집안은 문화 수준이 높은 가문이었다. 그녀의 집 도서실에는 장서가 5천 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카테리나는 트루베츠코이를 파리에서 처음 만나 1821년 결혼했다. 남편은 그녀보다 10살 위였다. 남편이 유형을 떠난 뒤 예카테리나는 곧바로 뒤따라갔다. 마리야 집안과 달리 예카테리나의 부모는 그녀의 시베리아행에 반대하지 않았다. 예카테리나가 1825년 12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수감돼 있던 남편 트루베츠코이에게 쓴 다음과 같은 편지가 전해지고 있다.

“사실 나는 당신 없이 살 수 없다고 느끼고 있어요. 나는 당신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그 무엇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미래도 나를 두렵게 하지는 못한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던 삶과는 담담하게 이별할 거예요.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단 하나는 당신을 보고, 당신의 고통을 나누고,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을 당신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예카테리나는 1826년 9월, 수개월 만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으나 남편은 그곳에서도 훨씬 더 가야 하는 네르친스크의 광산에 가 있었다. 그러나 그곳으로의 여행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르쿠츠크의 총독은 당국의 명령에 따라 그녀에게 되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그녀는 5개월을 버텼다. 그사이에 발콘스키 부인 마리야가 도착했다. 이들은 1827년 2월이 되어서야 네르친스크의 블라고다츠크 은광에서 중노동을 하는 남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네르친스크는 이르쿠츠크에서도 동쪽으로 일주일 이상 걸려야 닿을 수 있는 동시베리아의 벽지였다. 트루베츠코이, 발콘스키, 무라비예프 등 지도자급 여덟 명은 첫해에 이 블라고다츠크 은광에서 족쇄를 찬 채 강제 노역을 했다.
현재 이르쿠츠크 트루베츠코이 집 지하 전시실에는 당시 은광에서 강제 노역을 했던 일곱 명(한 명은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다)의 얼굴이 그려 있는 작은 영정들이 광산에서 쓰던 삽, 곡괭이 등과 함께 벽에 걸려 있다. 12kg이나 되는 무거운 족쇄도 그 옆에 전시되어 있다. 예카테리나는 처음 이곳에 도착해 수용소 벽 틈으로 족쇄를 찬 여위고 핼쑥하며 수염이 덥수룩한 채 해진 외투를 입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실신했다. 마리야는 족쇄를 찬 채 일하던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무릎을 꿇고 모두가 보고 있는 가운데 남편의 족쇄에 입을 맞췄다. 두 부인은 블라고다츠크 은광 근처의 허름한 나무 집을 사들여 남편들을 뒷바라지했다. 얼마나 작고 형편없는 집이었는지, 훗날 예카테리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한쪽 벽에 머리를 두고 누우면 발이 문에 닿았다. 겨울 아침에 눈을 뜨면 통나무 틈새에 머리카락이 얼어붙어 있었다.”

 

시인 푸시킨이 그린 처녀 시절의 마리야 초상화.

시인 푸시킨이 그린 처녀 시절의 마리야 초상화.

시인 푸시킨이 그린 처녀 시절의 마리야 초상화.

데카브리스트들이 찼던 12kg짜리 족쇄 (트루베츠코이의 집).

데카브리스트들이 찼던 12kg짜리 족쇄 (트루베츠코이의 집).

데카브리스트들이 찼던 12kg짜리 족쇄 (트루베츠코이의 집).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

주민들로부터 칭송받은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

귀족으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해온 부인들이지만 이곳에서는 음식이며 빨래며, 페치카에 불을 지피는 일 등 모든 것을 직접 했다. 이들은 자신의 남편뿐 아니라 함께 있는 다른 데카브리스트 유형수들에게도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음식을 만들어 주고 옷을 수선해 주며 가족들과 연락을 취해주었다. 주민들에게도 귀족 티를 내지 않고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로 대해 존경을 받았다. 이들은 심지어 탈주한 도둑들에게도 돈과 옷을 주었으며 그들이 수배 중이라는 것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 부인들의 헌신과 봉사에 대해 데카브리스트 중 한 명인 오블렌스키는 자신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진정 고귀한 성품을 지닌 지체 높은 여인들의 도착은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었다. 그 여인들이 오고 나서 우리에겐 가족이 생겼다. 다들 그들에게 의지했고, 그들은 항상 우리를 염려하고 뒷바라지해주었다. 두 여인이 오고 나서 가족과 친지들과의 관계가 되살아났고, 이후 그 관계는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가족과 같은 배려로 우리의 운명을 전혀 모르고 있는 가족을 위로할 수 있는 소식을 일가친척에게 보내주었다.

이 여인들이 자신의 남편과 함께 우리까지도 보살펴주었던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그들에게 진 신세를 어떻게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요리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도 실제로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트루베츠카야 공작부인(예카테리나)과 볼콘스카야 공작부인(마리야)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우리가 지내던 블라고다츠크 광산 막사로 가져다준 음식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 음식에 환호했고 너무나 맛이 있어서 부인들이 가져온 덜 구워진 듯한 빵조차도 페테르부르크 최고의 빵집에서 만든 것보다 더 훌륭하게 느껴졌다.”

이 기록을 남긴 오블렌스키는 형기를 마친 후 다른 데카브리스트들과 함께 이르쿠츠크에서 학교를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러시아어, 프랑스어, 수학, 자연과학, 음악 등이 이 학교의 수업 과목이었다. 1829년 데카브리스트들에게 족쇄를 풀어주는 결정이 내려졌다. 3년 동안 차고 있던 족쇄가 풀렸다. 그러나 족쇄가 풀렸다고 중노동형(카토르가)이 함께 풀린 것은 아니었다. 사람마다 형의 기간이 달랐다.

발콘스키는 1835년에 중노동형에서 풀려났으며, 트루베츠코이는 데카브리스트 중 가장 늦은 1839년에야 중노동형에서 벗어났다. 그는 족쇄가 풀린 후에도 10년간이나 더 노역을 해야 했다. 그러나 부부가 함께 살 수 있게 되어 아이가 없던 두 사람 사이에 1830년, 9년 만에 기적처럼 아이가 생겼다. 첫 딸 알렉산드라 이후 시베리아에서 모두 아홉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중 다섯은 어린 나이에 죽었다.


트루베츠코이는 1839년 말 13년 만에 중노동형을 마치고, 이르쿠츠크 인근의 부랴트 마을인 아요크로 이주한 후로는 농사를 짓고 살았다. 금광 개발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는 이곳에서도 항상 어려운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족과 친척들이 보내온 약을 집으로 찾아온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많은 사람이 예카테리나를 “명석한 지혜와 선한 마음이 훌륭하게 하나가 된 무한한 자비의 화신”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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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나멘스키 수도원.

즈나멘스키 수도원.

새집 완공 전 세상 떠난 예카테리나

당시 이들에게는 시베리아의 대도시인 이르쿠츠크에서 사는 것이 희망이었다. 이주 허가가 떨어지자 트루베츠코이 가족은 이르쿠츠크에 셋집을 얻어 살면서 목조 가옥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인 예카테리나는 안타깝게도 집이 완공되기 전인 1854년 10월 14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 새집에 살아보지도 못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동시베리아 총독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찾아와 애도를 표했다.

그녀는 앙가라 강변에 가까이 있는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먼저 간 아이들과 함께 묻혔다. 이 수도원에 들어서면 처음 마주치는 것이 예카테리나와 그녀의 아이들이 묻혀 있는 작은 무덤이다. 부인의 죽음을 애통해했던 트루베츠코이는 이르쿠츠크를 떠나지 않으려 했으나 3년 후인 1857년 아들의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면서 부인의 무덤에 들러 통곡을 했다고 한다. 한편, 발콘스키는 1829년 족쇄가 풀리면서 일단 유형수용소에서 나와 페트롭스키 자보드로 옮겨간다. 이때부터 당국의 승인을 받아 부부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으며, 그 후 미하일과 넬리 등 아이들이 태어났다.

발콘스키 가족은 발콘스키가 1835년 중노동형에서 풀려난 후 이르쿠츠크에서 멀지 않은 우릭 마을로 이주한 후 1838년 새집을 지었다. 그 후 이르쿠츠크로 이전이 허용되면서 1846년 우릭 마을의 집을 이르쿠츠크로 옮겨서 재조립한 것이 지금 데카브리스트 기념관으로 사용되는 발콘스키의 집이다. 이 집에서는 음악회나 연극, 시 낭송회 등이 자주 열렸다. 지금도 발콘스키의 집에서는 그 전통으로 음악회, 연극, 문학의 밤 등을 열고 있다. 이르쿠츠크를 ‘시베리아의 파리’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도시가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데카브리스트들의 공헌으로 도시의 문화 예술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니콜라이 1세가 죽고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한 1856년, 30년 만에 유배가 풀렸을 때 유배형을 받은 데카브리스트 116명 중 되돌아간 사람은 15명뿐이었다. 이 가운데 발콘스키 가족이 포함되어 있다. 그 후 황제는 발콘스키의 아들 미하일 발콘스키에게 공작 작위를 회복시켜주었다. 마리야는 귀환 후 병에 걸려 외국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으나 1863년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발콘스키는 마리야보다 2년을 더 살다 1865년 77세로 고난의 일생을 마쳤다.

 

가을의 바이칼 호수.

가을의 바이칼 호수.

가을의 바이칼 호수.

데카브리스트 탐구에서 시작된 톨스토이 소설 <전쟁과 평화>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 문학에 금자탑을 쌓은 명작인 톨스토이(1828~1910)의 <전쟁과 평화>는 데카브리스트와 깊은 관계가 있다. 톨스토이는 1856년, 전년도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의 특별사면으로 시베리아에 유형 갔던 데카브리스트들이 30년 만에 유럽러시아로 귀환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했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톨스토이가 데카브리스트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작가적 감각이 뛰어났던 톨스토이가 당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데카브리스트들의 정치사적·역사적 역할을 중요하게 인식하기도 했겠지만, 그의 외가 쪽에 대표적인 데카브리스트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톨스토이가 두 살 때 세상을 뜬 어머니 마리아는 러시아의 유서 깊은 귀족 집안인 발콘스키가 출신이다. 발콘스키가는 톨스토이가보다 훨씬 유명한 가문이다. 톨스토이는 어려서부터 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발콘스키가의 선조들과 데카브리스트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데카브리스트들의 리더 중 한 사람이었던 세르게이 발콘스키는 외가의 육촌 아저씨뻘이었다. 혁명 당일 현장을 지휘할 지도자였으면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트루베츠코이도 톨스토이의 외가 쪽 친척이다.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역사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1825년에 일어났지만 실패한 이 혁명의 역사적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연구해야 했다. 데카브리스트들 대부분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에 대항했던 이른바 ‘조국전쟁’에 참전해 나폴레옹군을 패퇴시키고 서유럽까지 진출해 그곳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맛본 장교와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톨스토이는 1805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자료를 수집하고 소설을 집필하는 데 많은 세월이 흘렀다.

수년간의 자료 수집을 마치고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 가을부터였다. 공식적으로는 1863년부터 1869년 사이에 <전쟁과 평화>를 썼다고 하나 구상에 들어간 1856년부터 치면 13년의 세월이 걸린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집필하려고 했다. 제1부는 1805년부터 1812년까지, 제2부는 실패로 끝난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의 난’, 제3부는 데카브리스트들의 귀환으로 쓸 계획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제1부는 <1805년>이란 제목으로 시작하여 <전쟁과 평화>로 제목이 바뀌면서 완성됐지만 2·3부는 결국 미완에 그쳤다. (다음 호에 계속, 64p 여행 참가자 모집 참조)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여행 문의 및 신청
바이칼투어(주)(02-703-1373, www.bktour.kr)
2016년 04월호

2016년 04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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