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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주가의 수작록(酬酌錄) (1)

On September 24, 2014

‘수작(酬酌)’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 이 말은 술잔을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수(酬)는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따라주는 것이고, 작(酌)은 그 답례로 손님이 주인에게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작은 주인과 손님이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정다운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장안의 애주가들이 자기만의 수작록(술을 즐기는 방법에 관한 기록)을 펼쳤다.

“술 마시고 싶다. 맥주를 마실까, 와인을 마실까? 오늘은 와인이 마시고 싶다. 그럼 레드, 화이트, 로제 중에 뭐를 마시지? 오늘은 레드와인. 어느 나라 것을 마실까? 프랑스, 이탈리아…. 고민을 한다. 나라와 생산지를 정하고 나면 와인 냉장고를 열어 와인병들을 차분히 살펴보고 선택한다. 그러곤 혼자 마시거나 아니면 누구와 마실지 고민한다. 술을 마시기까지 약간(?) 까다로운 과정을 거치지만, 맥주를 마시기 위해 풀코스 마라톤을 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모금만큼이나 술맛은 늘 경이롭다.”

박준우 푸드칼럼니스트

누군가 “애주가세요?”라고 물어보면 애주가라고 단언한다. 사실 술에 강하지는 않다. 하지만 술 마시는 그 순간을 즐기는 사람이 진짜 애주가라고 생각한다.
맥주와 와인을 모으는 수집벽이 있다. 부모님이 계시는 벨기에에 가면 벨기에 전통 맥주 ‘괴즈(Geuze)’를 꼭 챙겨 온다. 맥주계의 샴페인으로 불리는데, 1년 정도 숙성한 영 비어와 2~3년 숙성한 올드 비어를 섞어 2차 발효를 한다. 도수가 높고 약간은 시큼하며 라거만큼 탄산이 많은 것도 아니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이게 맥주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아주 맥주적이다’라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동안 스테인리스 통에서 발효해 특유의 이스트 향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가볍고 솔직한 맛의 밀맥주, 필스너 또한 좋아한다. 와인은 보수적인 유러피안처럼 신대륙 와인보다는 정통 와인을 선호한다. 특히 장인 정신이 깃든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을 사랑한다. 부르고뉴 지역의 섬세한 피노누아의 맛과 향은 정말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다. 단점이라면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인데, 부르고뉴의 피노누아 와인 중 포마르(Pommard)는 비교적 저렴하고 맛도 좋다. 포마르가 남성적이라면 볼레(Volnay)는 여성적인 맛으로 인기가 높다.

술 마실 때 누구와 마시는지, 어떤 안주를 곁들이는지를 우선시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술이 항상 중심이 된다. 고심하여 수집한 와인과 맥주 중에 어떤 병을 딸 것인가, 그것을 선택하기까지 고민을 즐긴다. 사람들과 술자리를 갖는 경우는 드물고, 집에서 간단하게 혼자 마시는 경우가 많다. ‘마스터셰프 코리아’ 준우승자라는 타이틀로 인해 안주를 만들어 먹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술을 마시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안주는 아주 간단하거나 아예 없다. 혼자서 와인을 마시다 보면 시간 흐름에 따라 온도와 맛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흐름을 타고 내 생각도 다양한 주제로 끊임없이 흘러간다. 나와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를 만나기 위해 술을 고른다.

박준우 푸드칼럼니스트가 추천한 괜찮은 술집

신사동, 뱅가
와인 수입사에서 운영하는 만큼 와인 종류도 많을 뿐더러 퀄리티에 비해 가격도 만족스러운 곳이다. 세계적인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가 수여하는 ‘레스토랑 와인 리스트 어워드’를 국내 최초 5년 연속으로 수상했으니, 와인 리스트에 관한 설명을 첨언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내가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손님의 취향을 맞출 줄 아는, 믿을 수 있는 소믈리에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추천하는 와인을 마셔보고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물론 와인과 잘 어울리는 음식 추천도 믿고 맡길 수 있다.

서촌, 까예 데 고미스
지금 일하고 있는 타르트 가게가 위치한 서촌에 있어, 간단하게 맥주 마시고 싶을 때 들르는 집이다. 타파스 바인데, 스페인에서 살다 온 부부가 운영한다. 한옥을 개조한 캐주얼하고 포근함이 느껴지는, 서촌스러운 술집이다. 안주를 즐겨 먹지 않지만, 이곳에 가면 꼭 시키는 것이 있다. 아보카도 꼰 하몬과 홍합 요리다. 바게트 위에 잘 익은 아보카도와 하몬을 얹었는데, 적절한 소금 간과 산도가 기분을 좋게 한다. 토마토소스에 자작하게 익힌 홍합 요리는 매력이 넘친다. 거기에 스페인 맥주 에스테르야 담 생맥주가 있으니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홍대, 와인주막 차차
와인, 주막, 차차.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들이 조합된 만큼 콘셉트가 독특하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와인을 즐길 수 있게 한국적 분위기를 조성해, 숯불에 구운 차돌박이와 함께 와인을 마시는 주막인 것이다. 영국에서 와인 MBA를 졸업한 뒤 귀국해 와인 수입사 마케팅 부서에 근무하며 줄곧 와인 공부를 한 주인장이 운영하는 만큼 셀렉션도 좋다. 또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저렴한 것도 큰 메리트다.

“소주를 목으로 넘길 때 특유의 알싸하고 씁쓸한 뒷맛은 ‘지금 나는 술을 마시고 있다’는 걸 잊지 않게 해준다. 입에 달달한 맛으로 홀짝거리는 즐거움과는 또 다른, 어떤 묵직한 존재감이랄까. 어떤 안주에나 무리 없이 잘 어울리고, 아무리 많이 마셔도 배가 부르지 않다는 점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값이 싸다. 매일같이 싱글 몰트위스키를 기울일 수 없는 형편에 소주처럼 만만하고 고마운 술이 어디 있으랴.”

웹툰 ‘술꾼도시처녀들’ 미깡 작가

모든 술을 좋아하지만, 소주에 무한 애정을 쏟는다. 그렇다고 소주를 맛있게 마시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주잔에 술을 남긴 채 놓아두면 미지근해지니까, 잔의 7부쯤 따라서 단숨에 꼴깍 마시면 시원하고 청량하게 넘어간다. (캬~)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이기는 하나 모든 술자리가 좋지만은 않다. 함께 있기 불편한 사람과의 술자리는 정말 곤욕스럽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런 자리가 만들어지면 술을 조금만 마시거나 가급적 빨리 일어선다. 불편한 사람과 마시면 술이 맛없는 것은 물론, 술기운이 나쁜 방향으로 뻗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술은 편안하고 기분 좋게 마셔야 독이 되지 않는다. 애주가는 자신만의 법칙이 있다. 사소하지만 내 나름의 법칙은 한자리에서 주종을 섞지 않는 것. 즉 1차에서 소주를 마신 후 2차로 맥주나 양주를 마시러 가는 건 좋지만, 줄곧 소주만 마셨던 자리에서 맥주 등의 술을 ‘입가심처럼’ 마시는 건 선호하지 않는다. 각각의 술은 ‘그 술을 위한 세팅하에’ 맛있게 마셔야 한다.

미깡 작가가 추천한 괜찮은 술집

망원동, 이자카야 정(情)
언제부터인지 거리에 널리고 흔한 게 이자카야지만, 이곳 ‘정’은 가격 저렴한 동네 이자카야치고는 퀄리티가 매우 높다. 소위 말하는 ‘가성비’가 뛰어난 술집. 선어회부터 꼬치, 볶음, 탕 등 여느 이자카야와 다름없는 메뉴를 제공하는데, 놀랍게도 그 무엇을 주문해도 평균 이상으로 맛있다. 특히 반으로 가른 감자 위에 타코 와사비를 얹고 마요네즈를 뿌려 그릴에 구운 요리는 이 집의 인기 메뉴로, “감자 그거 주세요”라고 대충 주문해도 알아서 갖다줄 정도다. 푹 익은 감자와 낙지가 어울릴까 싶지만, 일단 먹고 나면 한 접시 더 주문하게 될지도 모른다. 언제나 활기에 넘치는 젊은 사장님은 ‘흥’이 있는 타입이라 손님들과 곧잘 말을 섞고, 죽이 잘 맞으면 서비스 술과 안주를 시원스레 내주기도 한다. 맛은 물론 유쾌한 흥을 돋우는 술집이다.

연남동, 36.5℃ 여름 북쪽점
홍대를 중심으로 본점, 동쪽점, 북쪽점 총 3개 매장이 있다. 상호에 걸맞게 레몬 조각을 넣은 생맥주와 다양한 칵테일이 여름이라는 계절과 딱 어울리는 곳이다. 정형화된 인테리어가 아닌, 작업실처럼 또는 여행지의 게스트하우스처럼 허술한 듯 자연스럽게 꾸민 내부도 한몫을 한다. 인파로 과열된 홍대 중심가를 벗어나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고 싶다면 맨 나중에 생긴 3호점 북쪽점을 추천한다. 매장은 널찍한데 상대적으로 한산한 편이어서 사람에게 부대끼지 않고 시원한 기분으로 맥주를 마실 수 있다. 뚱뚱하고 느긋한 고양이가 상주하며, 벽면에 설치한 화면에는 동물이나 자연 다큐멘터리가 소리 없이 상영되고 있다. 무더운 날 불쑥 혼자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기에도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안주는 대체로 1만원 미만으로 저렴한데, 맛과 양에서 결코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 크래커에 마요네즈 참치와 과일 등을 직접 올려 먹는 카나페가 인기. 또한 해산물을 듬뿍 넣어 끓인 뒤 가쓰오부시를 한 움큼 올린 ‘여름 라면’은 그 일대에 소문이 자자한 맛이다.

대학로, 샘쿡 Sam cooke
LP판을 틀어주는 뮤직 바로, 대학로 골목 안쪽에 조용히 자리 잡은 지 10년이 넘었다. 분위기 있는 60~80년대 올드 팝과 재즈 선율이 술을 술술 들이켜게 만든다. 신청곡을 적어 카운터에 가져다주면 음악이 나오기도 하지만 100% 보장은 없다. 요즘 노래는 틀지 않는다, 인터넷 음원은 틀지도 않는다. 샘쿡 사장님은 늘 웃는 낯의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음악 선정에서만큼은 확실한 고집이 있는 분이다.
규모가 큰 매장은 아니지만 주종은 나름 다채롭게 갖추고 있다. 위스키, 칵테일, 맥주, 와인 메뉴가 골고루 포진해 있으며, 술을 좋아하는 사장님의 탐구 정신에 힘입어 ‘신상 술’이 자주 업데이트된다.
빈티지한 느낌을 풍기는 본관에는 LP 음악을 감상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는 맛이 있고, 본관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샘쿡 별관에는 별장에 놀러 온 듯한 깨알 같은 재미가 있다.
가끔 샘쿡에서 시작해 샘쿡으로 끝낼 때가 있다. 별관에서 그릴 소시지와 인디카 생맥주 그리고 쾨스트리처 생맥주로 1차를 하고, 본관으로 건너가 맥켈란이나 발베니 잔술로 마무리! 그러다 음악에 취하면 다시 별관으로 건너가 와인을 주문하면서 ‘음주 무한 루프’에 빠지기도.

‘수작(酬酌)’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 이 말은 술잔을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수(酬)는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따라주는 것이고, 작(酌)은 그 답례로 손님이 주인에게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작은 주인과 손님이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정다운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장안의 애주가들이 자기만의 수작록(술을 즐기는 방법에 관한 기록)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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