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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돌아왔다.

On November 08, 2011

오빠도 언니도 아닌, 형이 돌아왔다. 어린 시절 가슴 한구석을 뭉근한 먹먹함으로 물들게 했던, 든든한 울타리와도 같았던 바로 그 아련한 존재 말이다.



새삼 ‘형(兄)’이라는 단어를 찬찬히 뜯어본다. 어린 시절, 만나면 항상 꿀밤부터 먹이고 보던 얄미운 사촌 형. 동생 앞에서 힘든 기색 한 번 내비치지 못하다가 군에 입대한 다음에야 어릴 적 아픈 기억을 울컥 편지로 써내려간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 속 그 형. 그리하여 단어로 소환되는 기억의 범위를 조금 과하게 넓혀보자면 어둑한 술집 뒷골목을 나란히 걷던 그 순간,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 꼿꼿한 목소리로 끝끝내 학‘형’(學兄)이라고 못을 박던 그 아이.
말하자면 장동건은 남자들의 무의식 속에 형형(熒熒)히 잠겨 있는, 켜켜이 퇴적된 기억이 혼합되고 윤색되면서 결국 이상화된 모습으로 남은 순수한 형의 모습에 가깝다. 그건 마치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1980년대 학번들의 과(科) 익명 일기장(도저히 믿기지 않겠지만 옛날에는 그런 게 있었더란다)을 우연히 찾아내 킥킥거리며 뒤적이다 ‘조국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동생만큼은 학생운동권에 들어오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판·검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대목에서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찡해올 때라든가,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에서 외국인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했던 한 대목, 즉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광기에 휩싸인 눈빛으로 아군과 적군을 넘나들며 섬뜩한 살육을 자행하다 간신히 동생을 알아보고는 어렴풋이 마지막 안도의 웃음을 토하는 바로 그 대목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윽한 눈빛의 이 형에게 ‘<친구> 이후 좀 편한 길을 걸어도 되었을 텐데 왜 그렇게 험한 작품만 골라서 선택했는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가장 따스한 기억은 무엇이었는지’ ‘야구를 매주 하느라 어깨는 망가지지 않았는지’ ‘왜 굳이 좋은 직업 다 놔두고 배우라는 힘든 길을 선택했는지’ ‘왜 모든 후배들은 하나같이 당신을 따스하고 좋은 선배라 지칭하는지’ ‘다른 활동을 모두 접고 아이에게만 집중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지는 않는지’ 등등을 허심탄회하게 툭 털어놓고 물어보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해도 그대로 툭툭 받아줄 것 같은 ‘동건이 형’이니까. 왜냐. 지금껏 수백 명의 연예인을 인터뷰하거나 만나보았지만 “(화보를 촬영했던) 런던에 왜 같이 오지 않았느냐”는 매너 있는 인사를 먼저 건넨 다음, 담배를 한 모금 (그야말로 ‘내추럴 본 화보’의 자태로) 쭉 빨아들인 뒤, 어깨를 툭 치며 환한 웃음을 던지는 배우는 난생 처음 겪어보았으니까.

지난주 런던에서 <아레나>와 화보를 촬영하며 사진 찍기 참 어렵다고 하소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만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한국 최고의 스타일리시 가이가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아니, 왜. 사실 데뷔한 지 20년째이지만 그동안 패션 화보는 거의 찍어보지 못했다. 영화지와 광고만 주로 했지. 사실 이번에 <아레나>와 작업하면서 간만에 기분이 좋았다.


런던은 어땠나? 아무래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한국과는 달리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은데.
7년 만에 방문한 런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일단 미슐랭 가이드에 나온 레스토랑들이 참 많다는 것? 그런데 난 솔직히 한식이 제일 맛있더라. 네 번째 날, 한식당에 갔었는데 음식도 맛있을 뿐 아니라 분위기도 고급스럽고, 현지인들도 무척 많아서 런던에서 한식당의 위상이 꽤 많이 올라갔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외국인 입맛에 맞추기 위해 무조건 ‘퓨전’을 도입하는 게 아니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외국인에게 서브하는 걸 보고 잔잔한 자긍심을 느낄 정도였다.
음식 이외에 인상 깊은 건물 같은 건 없었나?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도시 중 하나인데.
묵었던 호텔인 클라리지? 1800년대 후반에 지은 호텔이라는데 처음에는 시설도 낡고 세면대도 삐꺽거리는 곳에 숙소를 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 이틀 정도 지나고 나서야 1층 바의 예술적인 인테리어, 세월의 관록이 묻어나는 화장실 벽의 타일, 시간의 흐름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멋을 느낄 수 있겠더라. 처칠 수상과 엘리자베스 여왕이 왜 이곳에 묵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호텔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저 거리를 한정없이 걸었다. 아무래도 서울에서는 마음 푹 놓고 걷기가 힘드니까.
예전 인터뷰 기사에서 십수 년 동안 밖으로 함부로 나가지 못했던 괴로움에 대해 토로한 대목을 본 것 같다.
그래도 요즘엔 의도적으로 밖으로 나가려고 많이 시도한다. 예전에는 불편하니까 잘 안 나갔고, 또 굳이 그럴 필요도 못 느꼈는데 아이가 생기고 나니까 바깥세상 구경도 좀 시켜줘야지 제대로 크지 않을까 싶어서. 가끔 도산공원 같은 데 유모차를 끌고 나가기도 한다.
아, 나도 가끔 유모차 끌고 도산공원에 가는데.(웃음) 결혼을 하고 아들도 생기면서 아무래도 일상에 변화가 많이 일어났겠다.
맞다. 물론 친한 지인들조차 내 겉모습만 보고는 거의 느끼지 못할 테지만 나 자신에게 무척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단 살 곳, 작품 등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아이를 가장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 요즘엔 작품을 선택할 때에도 ‘아들이 나중에 커서 이 영화를 본다면?’이라는 전제가 붙곤 한다. 스스럼없이 바깥에도 나가서 아기 선물을 고르러 장난감 가게에 쑥 들어가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젠 결혼을 하지 않은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기가 조금 어려워졌다는 차이점이 생겼다. 자식도 안 낳아본 ‘어린애’들과 무슨 얘기를 하겠는가.(웃음)
애를 낳아보기 전까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옛 어른들의 말인가?(웃음)
맞다. 예전에 박중훈 선배가 똑같이 얘기했었다. 아이 얘기가 나올라치면 “너랑 얘기하면 재미없어서 말 안 해”라고. 지금은 (김)승우 형이나 중훈 선배가 예전에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는지 완전히 이해한다. 그래서 한재석, 주진모, 현빈 등 예나 지금이나 가장 친한 후배들에게도 아이가 생기고 나서의 변화는 잘 얘기하지 않게 되더라.
흐흐. 아들이 생기니까 너무 좋지 않은가? 내 아들은 두 살이다. 지난번 김승우 씨와 인터뷰할 때도 내가 육아 비법을 꼬치꼬치 캐묻다가 1시간을 꼬박 다 써버려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
아, 우리 애는 이번에 돌인데. 이제 막 혼자서 벽 짚고 일어나는 단계에 들어섰다. 며칠 전에는 옆으로 손 짚고 일어나는 데 성공해서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참, 애는 언제부터 걷고 뛰기 시작하나? 스스로 걷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밖에 데리고 다니기가 더 편한가? 그리고 원래 ‘엄마’를 먼저 발음하는 게 정상이겠지? 의사소통이 가능한 건 언제부터인가?
아…. 또 시작되었군.(웃음) 우리 애는 ‘엄마’보다 ‘아빠’가 먼저였다. 확실히 남자아이라서 아빠만 따라다니면 꽤 다이내믹하게 놀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웃음) 안으면 마구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건 남자애들의 속성인 것 같다. 의사소통은 처음엔 단어로 시작한다. 바나나를 먹고 싶으면 ‘빠나’라고 반복적으로 소리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내 손을 갖다 대는 식이다. 우리 아이는 돌 직전까지 기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파닥거리기만 하다가 갑자기 걷는 동시에 뛰기 시작했으니 빨리 걷지 못한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그렇게 20여 분 경과)
아, <마이웨이> 때는 그래도 아이가 갓난쟁이여서 미안함이 덜했는데 이번에 허진호 감독과 중국으로 영화를 찍으러 가느라 아이와 한동안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다. 엄마의 깔끔한 성격을 닮아서인지 응가를 하고 나서 뭉개질까봐 기저귀를 갈기 전까지는 절대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고 끙끙거리며 버티고 선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워낙 빨리 큰다고 하더라. 중국에 다녀오고 나면 아마 같이 천천히 뛰어도 될 정도로 쑥 커 있을 거다.(웃음) 그때쯤에는 산책나갈 때 오감을 곤두세우고 차나 사람들을 꼭 조심하시길. 참, 이러다가 준비해둔 다른 질문들은 다 까먹겠다.(웃음) 이번에 또 중국으로 영화 촬영을 하러 간다니까 묻는데 <친구> 이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작품들만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것 같아 안쓰럽다는 느낌을 가졌더랬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그냥 끌렸다는 쪽에 가깝겠다. 왜 끌렸나 하면 20대 때는 그런 작품들을 선택해야만 사람들에게 내가 배우처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솔직히 했던 것 같다. ‘꽃미남’이라는 단어를 필두로 사람들이 항상 외모 이야기만 하니까 살짝 치기 어린 기분도 들었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육체적으로 힘든 작품들을 참 많이 했다. 요즘은 솔직히 좀 후회한다. 한창 젊고 보기 좋았던 시절을 잘 담아둔 작품이 거의 없구나 하는 생각에.(웃음)
젊었을 때는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게 싫었나?
정말 싫었다. ‘꽃미남’이라는 단어가 생긴 게 1990년대 초반, 우리 세대였다. 사실 남자가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게 너무 낯간지럽고 민망했다. 지금은 뭐 국어사전에까지 올라와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20년이 흘러 마흔이 된 지금까지 ‘꽃미남’이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데?
하하. 지금이야 뭐 그렇게 불러주면 베리 베리 생큐지.
너무 오래된 이야기겠지만 굳이 배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는지?
어릴 때부터 딴 건 몰라도 생활력은 꽤 강했던 것 같다. 재수, 삼수를 하면서 용돈 정도는 스스로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광고 단역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으니까. 그러다가 우연히 탤런트 공채에 합격하면 광고 개런티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같은 엑스트라인데도 공채 출신은 5배나 페이를 더 받았으니까. 연기를 하고 싶다는 특별한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조금 우습게도 개런티 때문에 공채에 응시해 운 좋게 합격했다. 운 좋게 청춘 드라마가 한창 인기 있을 때 <우리들의 천국>에 합류하고 난 다음 정신없이 지금까지 떠밀려온 거지. 결과적으로는 운명 같기도 하고. 
한창 인기를 누리다 느닷없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 화제가 되었다. 재학 중에는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할 수 없다는 엄한 학칙을 보유하고 있는 학교라 당시 소녀 팬들이 꽤 많이 눈물을 흘린 걸로 기억한다.
뭐, 요즘으로 따지자면 <마지막 승부>가 막 끝난 직후였으니까 현빈 씨가 군대 가는 것과 비슷한 분위기였을까?(웃음) <우리들의 천국>에 이어 곧바로 사극의 주인공을 맡았는데 내 한계가 여지없이 탄로나고 말았다. 이왕 연기할 거면 제대로 배우고 하자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지. 2년 동안 연기에 대한 기술을 배웠다기보다는 연기에 대한 자세를 배웠다고 생각된다. 당시 동기들은 모두 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온 친구들이었거든. 서울대를 다니다, 또는 굉장한 직업을 가졌다가 한결같이 연기에 대한 갈증 때문에 힘든 경쟁률을 뚫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으니까.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본질, 배우로서 살아가는 마음가짐 같은 걸 그때 깨닫고 얻었다. 학교를 나와서도 비스무리한 청춘물들 사이에서 고민할 무렵, 운명처럼 <친구>의 시나리오가 들어왔고….
역시 <친구>인가?
역시 그렇다. 당시로서는 정말 상상도 안 되는 콘셉트였거든. 매스컴도, 대중도 내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악역이 들어왔으니. 이 영화를 찍으며 배우 생활 최초로 실제 다른 사람이 되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연기했을 때의 그 절절한 느낌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사실 흥행에는 전혀 욕심이 없었다. 내부적으로 목표가 40만이었거든. 결과적으로 오히려 거대 흥행에 작품의 가치가 가려져버린 측면이 있어 조금 안타깝다. 어찌되었든 <친구> 이후에 비로소 관객들 앞에서 떳떳해질 수 있었고, 어디 가서 ‘배우다’라는 얘기를 거리낌없이 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만약에 배우가 아니었다면 어떤 직업을 선택했을 것 같은가?
뭐, 절대 될 수는 없었겠지만 야구 선수.(웃음)
야구에 대한 애정은 잘 알려져 있긴 하다.
솔직히 소질이 있는 것 같다.(웃음) 너무 재미있고, 참 좋아한다.
그런데 포지션이 투수라는 얘기만 알려져 있고, 실제로 어떻게 야구를 즐기면서 하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공터만 있으면 테니스 공으로 야구를 하곤 했다. 프로야구 생기기 전에는 선린상고와 군산상고가 맞붙는 고교 야구에 열광했었고 박노준, 김종훈 선수에게 푹 빠져 있었다. 무엇보다 프로야구 개막전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사실 한국의 프로야구는 그 순간 이미 성공이 예약되었다고 생각한다. 연장 10회 프로야구 사상 첫 끝내기 홈런이 만루 홈런이라니. 중·고등학교 때는 기회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야 하고, 장비도 갖춰야 하니 아무래도 힘들었던 거지. 그런데 확실히 한국 남자들에게는 나이를 먹어도 사그라지지 않는 야구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것 같다. 비슷한 친구들이 결국 다 모인 거다. 야구장에 함께 모여서 어릴 적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야구복을 맞춰 입고 야구 선수 흉내를 내다가, 결국 사회인 리그에 합류해 매주 야구 경기를 하기에 이르렀으니.
지금도 매주 야구를 한다고?
34세 때부터 경찰청 리그에 합류해 매주 각 지역 경찰서팀들과 경기를 해왔다. 지난주에는 영등포 경찰서랑 붙었다. 난 계속 투수를 맡았고. 내 자랑은 아니지만 한창 때는 스피드건에 124km가 찍힌 적도 있다. 역시 또 내 자랑은 아니지만 아마추어 리그에서 포크 볼을 던지는 투수는 거의 없는데 내가 또 포크 볼에 강하다. 손가락이 길어서 공이 잘 끼워지거든. 여전히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결정구로 포크 볼을 선택한다.
아, 포크 볼을 자주 던지면 아무래도 어깨에 무리가 갈 텐데?
사실 의사 선생님들이 야구 더 하고 싶으면 투수는 그만하라고 하더라. 지난주에 MRI를 찍었는데 프로야구 선수 수준으로 어깨가 상했다고들 하고. 사실, 9회까지 완투를 한 다음 날 밤에는 어깨가 아파서 잠자다가 자주 깨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은 야구를 더 오랫동안 즐기려면 투수 자리를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민도 한다.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이 있는지?
어렸을 때는 삼성이었다. 아무래도 어린이 회원에 가입했던 팀이니까. 그리고 어릴 때부터 투수를 좋아했으니까. 김시진, 김일융 등 좋아했던 투수들이 삼성에 있었다. 요즘은 김광현 선수 때문에 SK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뭐라 해도 김성근 감독의 지휘 스타일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고. 원칙 있는 모습이 정말 좋았다. 스포츠는 당연히 이기기 위해 하는 건데 그걸 가지고 비난하는 건 어불성설이지 않나? 그런 관점에서 그분의 야구를 바라보면 결코 재미없지 않다. 정말 팬이었는데 그렇게 떠나셔서 아직도 아쉽다. 뭐, 그래서 지금은 아무 팀이나 좋아한다.(웃음) 투수라서인지 아무래도 투수를 중심으로 야구를 보게 된다. 김광현 선수의 그 와일드한 폼을 너무 좋아했는데 바꾸겠다는 발표를 듣고 나서는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윤석민 투수는 여전히 신기하다. 예쁘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단아한 자세에서 어떻게 그런 완벽한 피칭이 가능한지….
(그렇게 또 20여 분 경과)
다시 연기에 대한 질문을 하나 더 하자면 배우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각자 자신만의 연기 근원에 대해 이야기 하곤 한다. 책, 영화, 어릴 때의 경험,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 아니면 평상시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등등. 당신 연기의 근원은 과연 무엇인가.
일종의 콤플렉스겠지. 학교 다닐 때 모범생 소리를 많이 들었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장남으로 태어나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항상 예의가 발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살아왔다. 그 흔한 가출 한 번 해본 적 없고. 사람이라는 건 다 똑같지 않나? 누군가 ‘착하다’고 해주면 당연히 좋다. 하지만 나를 은근히 괴롭히는 직장 상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오르는 것도 당연하다. 보통 그런 이중적인 마음을 숨기고들 산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 성격과는 달라서 평상시에 표출하지 못했던 반발심, 폭발성 같은 것들을 연기를 통해 확 풀어버리는 것, 그것이 내 연기의 근원인 것 같다.
아까 아들이 생기고 나서는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도 달라졌다고 말했다. 연기를 하는 자세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겼는가?
맞다. 요즘 배우로서 가장 큰 걱정 중 하나는 아기가 생기고 나니까 마음이 자꾸 평온해지고 순화된다는 거다.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이런 나를 찬찬히 관찰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감정의 진폭이 큰 역할은 잘 못할 것 같다. 사실 배우는 꽤 잔인하거나 어처구니없는 직업이기도 하다. 가족 중에 가장 먼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살아왔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고, 성인이 되고 난 뒤 그렇게 서럽게 울어본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슬픔 뒤켠에서 나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거다. 이 슬픔의 정체를 분석하고, 나중에 연기에 써먹기 위해서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던 거지. 사실, 내게는 그게 더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에게 차마 얘기도 못했고. 그때 ‘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배우의 길로 들어섰구나’ 하는 한탄을 내뱉었더랬다. 그런데 아들을 낳고 나서 이게 헷갈리는 거다. 앞으로도 계속 감정을 폭발 직전까지 몰고 가서 연기로 연결시킬 수 있을지, 아니면 아들이 너무 예뻐서 한없이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커질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다시금 아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가장 큰 자질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아들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자질이 있다면.
사실 연기와 야구, 이 두 가지 자질 모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조그마한 건축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그렇게도 야구 팬이었고, 영화 팬이었다. 주말마다 아버지가 일부러 낮잠을 재웠다. 밤에 <주말의 명화> 같이 봐야 한다고. 아버지랑 한 이불 덮고 방바닥에 누워, 직직거리는 흑백 TV로 봤던 <킹콩> <스팅> <빠삐용> <지옥의 묵시록>,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다뤘던 영화들…. 아버지는 나와 많이 달랐다. 유머 감각도 있고 호탕한 스타일이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에게 딱 물려받은 게 있다면 우유부단함인가?(웃음) 아버지가 사람이 좋아서 딱 거절을 못했다. 정말 풍채 좋고 남자다운 전형적인 쾌남이었지. 어느 모임에 가더라도 사람들을 우르르 몰고 다니는.
지금껏 후배들을 우르르 몰고 다니는 걸 보면 아버지를 똑 닮은 것 같은데?(웃음)
아버지에 미치려면 아직 멀었다.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딱 하나다. 잘하는 운동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것. 남자로 살아가려면 다른 건 필요 없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운동만 한 건 없다. 내게 없는 것 중 개발해주고 싶은 건 음악 또는 미술. 우리 때는 모든 교육이 입시 위주였기 때문에 난 거의 음악과 미술 감각이 제로에 가깝다. 그래서 더 기대가 된다. 아들과 함께 보고, 느끼고, 살아갈 날들이 너무 많이 남았다는 것. 그리고 보고,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것들도 점점 더 많아질 거라는 것, 말이다.




오빠도 언니도 아닌, 형이 돌아왔다. 어린 시절 가슴 한구석을 뭉근한 먹먹함으로 물들게 했던, 든든한 울타리와도 같았던 바로 그 아련한 존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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