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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고전 만화

만화와 이불에 푹 파묻히기 좋은 계절, 길고 긴 고전 만화의 첫 권을 펼쳐 든다. 우라사와 나오키부터 데즈카 오사무까지. 웹툰 작가, 시인, 미술가, 영화감독이 각자만의 고전을 지금 다시 읽는 의미에 대해 말했다.

UpdatedOn December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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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터치

나는 여행을 갈 때면 늘 미니멀리스트다. 가져가는 것이라고는 아래위 옷 한 벌, 속옷 두 장, 글을 쓰기 위한 노트와 펜. 그게 끝이었다. 아, 그런데 미니멀리스트라고 말하긴 어려울 수도 있겠다. 아다치 미츠루 만화책을 담기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한 것이니까. 나는 <터치> 소장판 11권을 바리바리 싸들고 여행을 갔다. 그냥 집에서 가장 먼 곳에서, 뭔가 좀 외롭고, 약간 공허하고, 겸허한 기분이 되어, 아다치 미츠루가 그린 풍경과 여백을 하염없이 보고 싶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가슴 뛰는 여행이 되었다.

아다치 미츠루의 미덕은 이미 잘 알려져 설명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다. 여백을 아름답게 활용하고, 컷 전환이 파격적이면서도 정적이다. 오랜 활동 기간 동안 그림체 변화가 거의 없고, 주인공들의 얼굴도 늘 비슷하며, 대표작의 주요 소재도 고교 야구, 고교생의 연애로 한정되는 등 한결같았다. 그러니까 아다치 미츠루는 안 읽어봐도 다 아는 얘기, 어떻게 될지 뻔한 청춘 드라마로 꾸준히 독자를 홀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터치>를 다시 읽고 싶다. 다르게 말하면 어디 먼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기 때문인가? 스포일러라고 할 수도 없는 스포일러를 하나 하겠다.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은 지독한 비극이기도 해서, 항상 초장에 누가 죽거나 다치면서 시작한다. 그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작가보다 충격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다. 나는 이미 그의 작품에서 언제, 누가 죽는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터치>를 다시 읽기 시작하면… 늘 똑같이 등장인물이 죽는 장면에서 깜짝 놀라 눈물을 흘리고 만다. 주인공은 잃어버린 사람을 위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야구 연습을 하고, 나는 그가 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가끔 진다),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다. 그렇게 만화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다음. 나는 늘 타지의 싸구려 숙소에 누워 중얼거렸다.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아. 그것도 열심히. 그건 어쩐지 교훈이 아니라. 그냥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곧 다시 여행을 갈 수 있을 것임을. 그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것임을. WORDS 김승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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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몬스터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 <몬스터>에 대해 논하는 글은 반드시 두 캐릭터 중 하나를 언급한다. 절대 악의 요한, 혹은 현실적인 룽게. 그중에서도 요한은 순수에 가까운 악함과 전능함에서 비롯되는 경외감으로 인해 각종 서사 속의 매력적인 빌런을 꼽을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몬스터>를 다시 들춰보는 이유는 요한과 룽게에 가려져 자주 언급되지 않는 주인공 ‘덴마’ 박사 때문이다. 덴마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의 인생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런 그가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떠나는 여정의 기록이다. 재능과 신념으로 인간을 살려온 이가 한 존재를 죽이기 위해 여생을 바친다는 아이러니는 요한의 큰 그림자에 가려져 있지만, 사실 그 어떤 이야기보다 모순되는 괴로움을 보여준다. 덴마의 동력은 타고난 의술의 재능도 아니고 다양한 동료들의 조력도 아니며 자신이 되살려버린 악을 스스로 정리하겠다는 책임감에 가깝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개인의 책임감이 현시대의 중요한 키워드라는 생각을 놓을 수가 없다.

나는 늘 요한보다 요한을 잉태한 시대에 더 많은 흥미를 느꼈다. 평범한 일상 속 작은 비정함이 생활 속의 악당을 만들어내는 동안, <몬스터>의 세계에서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 절대악을 잉태했다.

지금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 역시 매 순간 모두를 향한 혐오의 조각을 표출하며 괴물을 빚어내고 있다. 그렇기에 <몬스터>가 고전이 된 지금도, 요한의 절대악은 여전히 높은 해상도의 현실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도 어떤 방식으로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다양한 혐오의 잉태에 일조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작가로 살아가면서 무력감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실을 계속해서 곱씹는 것이다. 덴마의 여정은 고독하고 무력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끝맺으려는 책임감이다. 그 고루한 단어가 그의 여정을 숭고하게 만든다. 시간이 흘러도 유지되는 동시대성이 고전을 선정하는 기준이라면,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가 젊은 고전이 되는 지점은 바로 그 무력한 책임감이다. WORDS 이종범(웹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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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유유백서

숱한 만화가들 중 천재형 만화가를 논하자면, 언제나 ‘토가시 요시히로’를 꼽는다. 많은 작품을 창작하지 않았지만, 만화라는 장르 안과 밖을 관찰하며 지속적인 실험을 이어가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전형성에서 탈피하는 인물, 그림을 배제한 텍스트의 과감한 배치, 인물의 표정을 확대 복사해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심리 묘사, 상황에 따라 급변하는 광범위한 필체 등 만화의 보편적 어법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집요함이 작품 곳곳에 녹아 있다. 그 때문에 그의 만화는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익숙한 장면에서도 새로운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만화의 클리셰를 거부하는 이 천재 작가가 오늘날의 클리셰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의 대표작 <유유백서>의 ‘히에이’가 암흑 무술대회에서 선보인 ‘사왕염살흑룡파’의 설정은 오늘날 ‘중2병’ 캐릭터의 전형이 되었다. 뻔한 만화 속 여주인공의 표본 같은 히로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작가에게서, “오른팔의 흑염룡” 정도로 간소화된 허세 가득한 중2병의 표상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엔 참신했던 이야기와 독특했던 캐릭터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반복되고 재가공되며 마모되는 것은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흐름이 쿨한 암살자 히에이를 중2병의 원형으로 만든 것처럼, 연재 종료 후 25년의 세월이 지난 이 시점에 다시 보는 <유유백서>는 낡아버린 전형적인 소년 만화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 작가의 행보다. 토가시 요시히로는 <유유백서>가 남긴 수많은 명장면과 전형성을 후속작 <레벨E>와 <헌터×헌터>에서 계승함과 동시에 교묘하게 파괴하며 나아간다. 토가시의 만화는 과거에서 출발해 당대의 어법을 현재형으로 리모델링하는 반복적인 제련의 과정이다.

과거의 유산을 거울 삼아 복제와 재생산을 반복하는 레트로의 21세기, 토가시 요시히로의 만화 직조법은 새로움을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레트로- 리메이크의 흐름과 교집합을 이룬다. 클리셰의 반복과 타파라는 순환의 고리에서 <유유백서>는 그 중심을 천천히 선회하며, 같으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지금의 독자에게도 안내하는 중이다. WORDS 돈선필(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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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불새

‘역사의 어느 시점을 바라봐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한다’는 명제를 극대화하기 위해 데즈카 오사무는 <불새>를 과거와 미래로 나눠 연재했다. 과거 편은 고대사에서 국호가 탄생하는 시점까지 순방향으로, 미래 편은 인류 문명이 절멸한 3000년대부터 2000년대로 거슬러 간다. 2세기를 다룬 첫 번째 ‘여명’ 편이 끝난 후 ‘미래’ 편을 펼쳤을 때 느낀 현기증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유명한 ‘뼈 던지기 컷’과 비견할 만하다.

널뛰는 시공간 가운데 이야기를 관통하는 건 불새의 존재다. 불새의 피를 마시면 불로불사하기에 인간은 불새라는 허몽을 쫓는다. 등장인물은 제각기 개성을 지녔음에도 얼핏 이전 편에서 봤거나 다음 편에서 보게 될 인물처럼 느껴진다. 같은 인물이 다시 태어나 비슷하면서도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착시마저 든다. 그 반복이 <불새>라는 야심이다. 역사는 흐르고 권력은 모습을 바꾸지만 인간은 같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인간은 왜 더 많은 걸 욕망할까? 그 어리석음이 그들을 파멸시킬 거란 걸 왜 모를까? 모든 질문이 불새를 통해 모인다. 인간의 어리석음, 약점, 한계, 그 모든 게 죽음에서 비롯된다는 것. 작가는 죽음의 안티테제인 불새를 통해 생을 관찰하고 인간사 전체를 조망한다. 이전 세대 가장 뛰어난 작가들이 대하 서사에 천착한 건 그들이 세상과 인간을 한손에 우겨 넣어 보이겠다는 호기 때문일까?

인간사가 결국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버둥거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그쳤다면, <불새>는 거장의 차갑고 가학적인 대하 서사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는 불새를 특유의 데포르메를 거쳐 생생한 표정을 지닌 캐릭터로 그려낸다. 자신을 사냥하려고 달려드는 인간을 보는 불새의 얼굴에서 우리는 측은지심을 엿본다. 그 표정을 통해 우리는 불새의 입장에서, 즉 영원성의 입장에서 인간의 헛된 욕망과 파국을 본다. 걸작이란 시대를 초월해 언제나 우리 자신의 내면을 엿보게 만든다.

<불새>는 과거와 미래가 가까워지다 현대에서 끝내려는 구상이었다. 최종 장인 현대 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했다는 시놉시스로만 남았다. 데즈카 오사무도 죽음을 피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WORDS 홍석재(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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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예지
PHOTOGRAPHY 박도현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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