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FEATURE MORE+

죽음이 채드윅 보스만에게서 빼앗지 못한 것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야구선수 재키 로빈슨, 흑인 최초의 미 대법관 서굿 마셜, 흑인 최초의 히어로 블랙팬서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연기한 이들의 영혼을 닮아간 채드윅 보스만의 일생. 그가 남긴 불씨가 들불처럼 퍼지고 있다.

UpdatedOn September 04, 2020

/upload/arena/article/202009/thumb/45970-427037-sample.jpg

죽음은 그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했다. 4년간 대장암 투병을 숨기고, 자신의 삶에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듯 쉼없이 영화를 찍다가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채드윅 보스만의 이야기다. <블랙팬서>의 왕이자 첫 흑인 히어로, 영화를 넘어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아이콘이 된 인물.

/upload/arena/article/202009/thumb/45970-427040-sample.jpg

영화 <블랙팬서>

‘Dignity, honor, nobility. 품위과 명예, 고결함.’ 주변인들이 그를 기릴 때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들이다. 그리고 ‘warm hearted, 따듯한 마음.’ 브리 라슨은 그를 “힘과 평화로 빛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 일생을 싸웠다. 그러나 늘 미소 지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아한 사람”이라 회상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그를 알고 지낸 마이클 B 조던은 장문의 글로 그를 기렸다. “당신은 늘 가족과 친구, 아이들, 공동체, 정신, 우리의 문화와 인류를 아꼈어. 남은 날들을 당신처럼 살려 해. 용기를 지니고, 후회 없이.” ‘슈리’ 역의 레티샤 라이트는 “당신이 들어서면 어디든 평화로워졌고, 따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당신을 보면 세상이 한층 더 좋은 곳으로 보였다. 당신이 지구상에 뿌려놓은 모든 씨앗이 자라고 꽃을 피우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낭독하는 영상을 올렸다. 의미 없는 미사여구들이 아니다. 스크린으로 그를 접한 관객인 나조차도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기 때문이다.

/upload/arena/article/202009/thumb/45970-427039-sample.jpg

영화 <42>

채드윅 보스만을 본 첫 기억은 영화 <42>에서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야구선수이자 백 넘버 42번을 영구 결번으로 남긴 전설적인 선수, 재키 로빈슨을 연기하는 모습이었다. 갖은 차별과 핍박, 무시 속에 배트를 쥐고 우뚝 선 그의 등은 아직 소년 같았다. 그 외로운 등을 한껏 끌어안아주고 싶다가도, 돌아서 영민하게 반짝이는 두 눈엔 지지 않는 의지와 고결한 마음이 보여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채드윅은 그런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리고 그는 재키 로빈슨과 꼭 닮은 삶을 살았다.

/upload/arena/article/202009/thumb/45970-427038-sample.jpg

영화 <블랙팬서>

제국주의가 사라진 시대에 왕이라는 것이 아직 남아있다면 응당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블랙팬서’ 티찰라는 몹시 품위 있고 곧고 온화하여,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의 첫 등장에서부터 시선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 이면엔 온화한 왕이 되기까지 그의 싸움이 있었다. 단지 병마와의 투병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위엄 있는 왕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마블은 영국식 영어 억양을 제안했지만, 채드윅은 남아프리카 민족의 고유어인 코사어를 영화 속에 넣을 것을 제안했고 영어를 쓸 때도 아프리카 억양을 썼다. 그것이 투박하게 들렸나? 그의 말엔 어떤 언어보다 자긍심이 있었고, 단단한 품격이 있었다.

/upload/arena/article/202009/thumb/45970-427041-sample.jpg

영화 <블랙팬서>

“<블랙팬서>는 사람들에게 큰 의미가 있어요. '이 영화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이 시대에 가치 있는 작품인가? 제 대답은 ‘맞다’입니다. 단순한 현실 도피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이죠. 그건 정말로 큰 의미 아닐까요?” 채드윅 보스만의 말대로, <블랙팬서>는 단순한 히어로 무비 그 이상이었다. 영화가 전세계 영화 흥행 수익 11위에 랭크되고 히어로 무비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온갖 신기록을 달성하는 동안 흑인 사회는 와칸다의 표식을 세레모니로 삼으며 “와칸다 포에버”를 외쳤고, 영웅의 활약에 고무됐다.

/upload/arena/article/202009/thumb/45970-427043-sample.jpg

영화 <마셜>

/upload/arena/article/202009/thumb/45970-427042-sample.jpg

영화 <겟 온 업>

채드윅은 전기 영화에 자주 출연했다. <42>에서 흑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 <마셜>에서는 흑인 최초의 미국 대법관 서굿 마셜, <겟 온 업>에서는 소울 장르의 대부인 뮤지션 제임스 브라운을 연기했다. 그리고 매번 그들의 영혼을 닮아갔다. 이 아이코닉한 인물이 첫 흑인 히어로이자 그들의 왕이 되어 자신이 연기한 이들과 삶의 궤적을 같이 함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제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투쟁한 기록이니 말이다.

/upload/arena/article/202009/thumb/45970-427034-sample.jpg

영화 <Da 5 블러드>

2016년 대장암 3기 판정을 받은 그가 <블랙팬서>를 비롯한 숱한 영화를 전투적으로 찍는 동안, 그 사실을 안 건 극소수의 최측근 지인과 에이전시뿐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블랙팬서>의 라이언 쿠글러 감독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블랙팬서2> 각본을 쓰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생각이었을까? 항암 투병만으로도 모자랄 시간에 몸을 키우고, 전신 수트를 입고 액션 연기를 하며, 블록버스터를 비롯한 크고 작은 영화들까지 찍었던 건? 베트남 전쟁을 겪은 미국 흑인 군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스파이크 리 감독의 <Da 5 블러드>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고, 미국 최초의 여성 블루스 뮤지션인 마 레이니의 이야기를 흑인 극작가 어거스트 윌슨이 그려낸 영화 <Ma Rainey's Black Bottom>은 촬영을 마쳤다. 이것이 그의 유작이 됐다.

/upload/arena/article/202009/thumb/45970-427035-sample.jpg

영화 <Ma Rainey's Black Bottom>

도대체 어떤 생각이었을까. 이 영화들이 자신의 죽음을 앞당길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걸까? 혹은죽음을 예상했기에 더 열심히 많은 영화들을 찍었던 걸까? 사람들은 과거 영상 클립을 뒤져 그가 소아암 환자인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블랙팬서>를 보고 세상을 떠났다는 말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내용에 대해 말해달라는 질문에 “전 죽어요”라는 답으로 일관하는 장면들을 되새기며 그가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영화를 찍었을 것이라 예측한다. 혹은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투병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 거라 예상한다. 어느 쪽이든 그는 투사였다. 세상에서 가장 온화하고 의연한 투사. 삶과 태도와 신념이 하나가 된 사람에겐, 병마와 시한부의 삶마저 아무것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다.

채드윅 보스만의 마지막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마지막까지 보여준 방송이었다. 4월 15일, 재키 로빈슨을 기리는 ‘재키 로빈슨 데이’에 방송을 켠 그는 코로나 시대에 부족한 의료품과 검사 수를 우려하며 미국 정부를 비판하고, 영화 <42>를 만든 자신의 친구 토코가 420만개의 보호 장비를 기부하기로 한 사실을 격려하며, 이런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이라며 참여를 독려한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하지만 모든 게 제대로 되기 전까지 사람들이 죽어만 가는 걸 보고 있을 순 없어. 그렇기에 재키 로빈슨이 여전히 살아있는 거야. 여전히 2루에 있고, 3루에 있지. 우린 여전히 홈을 향해 도루를 하고 있어. 그러니 오늘 재키 로빈슨의 날을 기념하자. 의료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분들에게 그저 고맙다고만 할 수는 없어. 그들에게 필요한 걸 채워주자. 도움이 필요한 모든 곳에 말이야.”

/upload/arena/article/202009/thumb/45970-427036-sample.jpg

모든 메이저리거들이 등 번호 42번을 달고 뛰는 ‘재키 로빈슨 데이’는 코로나로 인해 8월 28일로 미뤄졌고, 채드윅은 바로 그날 죽었다. 자신이 연기한 인물들과 닮아간 한 배우의 마지막은 많은 이들에게 슬픔을 주었지만 그 이상으로 유지를 받들 의지를 안겼다. 재키 로빈슨과 서굿 마셜의 이야기가 아직도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 같은가? 여전히 수많은 흑인들이 공권력에 의해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시대, ‘Black Lives Matter’를 외쳐야 하는 시대에, 채드윅 보스만은 불씨를 지폈고 그것을 일생 동안 불태웠으며, 죽음 이후, “그가 심은 씨앗들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난 당신처럼 살 거야. 용기를 지니고, 후회없이”라는 동료 흑인 배우들의 선언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그렇다. 그는 여전히 3루에 서서 홈을 향해 달리는 중이다. 그러니, 죽음은 그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했다.

<에스엠라운지>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이예지
PHOTOGRAPHY 채드윅 보스만의 트위터, 출연작 스틸컷

디지털 매거진

MOST POPULAR

  • 1
    중무장 아우터들: Pea Coat
  • 2
    홀리데이 스페셜 에디션
  • 3
    중무장 아우터들: Double Breasted Coat
  • 4
    중무장 아우터들: Fleece Jacket
  • 5
    틱톡 만드는 사람들

RELATED STORIES

  • FEATURE

    부동산 예능이라는 불안

    고릿적 <러브하우스>부터 최근 <구해줘 홈즈>, 파일럿 예능 <돈벌래>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집을 보는 관점은 TV 예능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헌 집 줄게 새집 다오’에서 ‘세상에 이런 예쁜 집이’를 거쳐 ‘집 살 때 뒤통수 맞지 말자’ 나아가 ‘부동산 부자가 되어보자’까지, TV가 보여주는 구체적이고 선명해지는 욕망 속에서 시청자는 무엇을 채우고 있는 걸까? 대리만족? 투기의 지혜? 그렇다면 그 욕망이 소외시키고 있는 건 뭘까? 사다리가 사라진 서울의 장벽 앞에 망연자실한 세대의 일원이자, <아무튼, 예능>의 저자, 복길이 들여다봤다.

  • FEATURE

    틱톡으로 본 2020년

    2020년 틱톡이 가장 뜨거웠던 순간을 짚는다. 월별로 보는 틱톡 하이라이트다.

  • FEATURE

    4인의 사진가

    라운디드 A 에디션(Rounded A edition)은 고감도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라운디드와 <아레나>가 함께 기획한 프로젝트다. 라운디드 A 에디션에 참가한 사진가 네 명의 목소리와 그들의 작품이다.

  • FEATURE

    너만 인싸야?

    나도 인싸다. 왜 틱톡에 열광하는 것일까.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틱톡 세계에 잠입했다.

  • FEATURE

    틱톡 만드는 사람들

    틱톡의 음원 저작권은 어떻게 관리할까? 재밌는 스티커 기능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매일 틱톡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틱톡 직원들을 만나봤다.

MORE FROM ARENA

  • FASHION

    여름이 지나도 신는 슬리퍼

    패션 브랜드들이 여름이 아닌 가을, 겨울을 겨냥해 만든 슬리퍼 넷.

  • FEATURE

    먹고, 입고, 공유하라

    화성에서 우리는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으며 어떤 경제체제 하에서 소비생활을 하고 어떻게 정신 건강을 유지할까?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려본 화성 생활 상상도.

  • FASHION

    중무장 아우터들: Mouton

    혹한 대비가 필요한 12월, 보다 견고하고 멋지게 중무장할 수 있는 아우터들.

  • FEATURE

    게임하는 작가들: 조형예술가 차슬아

    기술 발전과 가장 밀접한 매체는 게임이다. 사실적인 그래픽과 정교한 구조는 사람들을 게임에 깊이 몰입시킨다. 이제 게임은 사용자로 하여금 이야기를 직접 만들게끔 유도하고, 사용자는 오직 자신만의 서사를 갖게 된다. 비록 로그아웃하면 그만인 휘발성 강한 서사라 할지라도 사용자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 다른 형태로 표현된다. 시나 소설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설치미술로 눈앞에 등장하기도 한다. 미래에는 게임이 선도적인 매체가 되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금, 게임에서 영감을 받는 작가들을 만났다.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게임과 예술의 기묘한 연관 관계를 추적했다.

  • CAR

    용인에서 로마를

    페라리 로마를 타고 용인 스피드웨이를 달렸다.

FAMILY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