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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의 괴물들, 그들은 평범한 이웃이었다

‘박사’의 텔레그램 n번방에는 70여 명의 ‘노예’와 26만 명의 관전자들이 있었다.

On May 1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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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8일, 여성과 미성년자들을 대상으로 성 착취 영상을 찍게 하고 이를 판매해온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핵심 인물 '박사'가 검거됐다. n번방은 아르바이트 등을 미끼로 여성들을 유인해 얼굴이 나오는 나체 사진을 받아낸 뒤 이를 빌미로 성 착취물을 찍도록 협박하고 해당 착취물을 유료로 판매, 배포하는 '성범죄 대화방'이다. 1번방, 2번방, 3번방 등 입장료 명목으로 받은 후원금의 액수에 따라 방을 달리해 흔히 'n번방'이라고 불린다.

수사를 통해 공개된 n번방의 민낯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여러 n번방을 총칭해 '박사방'이라고 불리는 비밀 대화방에는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음란물이 무자비하게 공유되고 있었다. 수천 명의 채팅 참여자들은 피해자들을 '노예'라 지칭했고 성 착취물을 촬영하도록 지시, 협박하며 하나의 '놀이'처럼 이러한 문화를 즐겨왔다.

'노예' 여성들은 방장 '박사'와 관전자들의 요구에 따라 스스로 음란 행위 영상을 촬영하거나 변기 물을 마시고, 스스로 칼로 몸을 긋는 등 자해도 서슴지 않았다. 수 십만원에서 많게는 200만원을 호가하는 입장료를 지불한 유료 채팅방 참여자들은 여성들에게 적극적으로 가학 행위를 요청하고 방관했으며 나아가 해당 자료들을 배포, 재판매하기에 이르렀다.

한 여성 단체에 따르면 n번방에 참여한 회원 수는 26만 명(중복 참여 회원 수 포함)에 달한다. 음지로 파고들어 견고히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하던 n번방의 실체를 처음 세상에 알린 이들은 대학생으로 구성된 '추적단 불꽃'이었다. 메신저로 성 착취물이 공유된다는 소문에 수개월간 n번방에 잠입해 증거를 모아 사건을 폭로했고 이후 국민 청원과 여러 보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n번방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것.

현재 경찰은 관련 디지털 성범죄 용의자 221명을 검거하고 5명의 자수를 받은 상태다. 더불어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적 분노를 바탕으로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고, 이례적으로 사건 재판부가 교체됐으며, '박사'로 밝혀진 조주빈은 검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신상이 공개됐다. 코로나19보다 더 강력한 '성범죄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텔레그램이 뭐길래?

n번방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메신저 텔레그램(Telegram)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카카오톡, 라인과 같이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앱, 텔레그램은 뛰어난 보안 능력을 토대로 보다 은밀하고 폐쇄적인 교류가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애초에 러시아 정부의 검열, 감청 등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된 앱으로서 비밀 대화 기능을 이용한다면 누구나 제약 없이 흔적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메시지는 암호화돼 전달되고 서버에 저장되지 않으며 타이머를 맞추면 자동으로 대화가 삭제되는 등 최고의 보안을 자랑한다. 또 정확한 본사의 서버 위치를 알 수 없고 각국 정부나 미국 FBI의 테러범 검거 협조 요청에도 "개인 사생활의 권리가 테러 위협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응하지 않으며 이름을 떨쳤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텔레그램만의 내밀한 기능을 바탕으로 일련의 성범죄들이 텔레그램으로 숨어든 것으로 분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라넷 폐쇄'와 '양진호 사건(불법 촬영물 유통으로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이면서 필터링 업체와 디지털 장의사 업체와의 유착 관계가 공론화된 사건)' 등을 계기로 온라인 사이트에서 소비되던 음란물의 주 무대가 더욱 음지화된 '텔레그램'으로 옮겨왔다는 것. 실제로 텔레그램은 '양진호 사건', 일명 '웹하드 카르텔'이 세상에 드러난 2018년 이후 활성화되며 수많은 n번방이 양성되기 시작했다.

'검열받지 않을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텔레그램의 특성상 n번방의 수사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경찰 관계자는 "텔레그램은 해외 메신저이기 때문에 협조 요청 등에 한계가 있어 수사에 애로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관련 채팅방이 수시로 없어졌다 생겨나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다양한 접근 방식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익명성과 보안을 강조하며 사실상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는 텔레그램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국내 수사기관이 어떤 성과를 이뤄낼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갓갓, 와치맨 그리고 조주빈

n번방 사건의 핵심 인물은 크게 3대 방주(房主)로 압축된다. n번방의 시초 격인 '갓갓'과 그 뒤를 이어 n번방을 운영한 '와치맨', 그리고 그의 빈자리를 채운 이가 바로 '박사'다.

30대 회사원으로 알려진 '와치맨' 전 모 씨는 공중화장실에서 여성을 몰래 촬영한 혐의와 게시한 혐의, 음란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한 혐의로 지난해 10월 기소됐고 현재 검찰은 3년 6개월을 구형한 상태다.

'와치맨'에 이어 디지털 성범죄 집중 단속에 나선 경찰에 의해 검거된 '박사'는 역대 성범죄자로선 최초로 검거 직후 신상이 공개됐다. 신상공개심의위원회는 "피의자는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노예로 지칭하며 성 착취 영상물을 제작, 유포하는 등 범행 수법이 악질적·반복적이고, 아동·청소년을 포함해 피해자가 무려 70여 명에 이르는 등 범죄가 중대할 뿐 아니라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인적·물적 증거가 충분히 확보됐다"고 밝히며 "국민의 알권리, 동종 범죄의 재범 방지 및 범죄 예방 차원에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종합적으로 심의해 피의자의 성명과 나이,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공개된 신상 정보에 의하면 '박사' 조주빈은 수도권의 한 대학을 졸업했으며 대학 재학 당시 학보사 편집국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장애 아동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참여하고, 범죄 수사를 도와 경찰로부터 감사장까지 받을 만큼 겉으로 보기에는 건실한 20대 청년의 모습이었다.

한편, 조주빈의 삶이 드러날수록 그의 기저에는 해소하지 못한 열등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의 최측근인 한 지인은 아버지와 단둘이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란 그가 집을 나간 어머니의 영향으로 '여성 혐오'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놨다. 정강이뼈를 절단해 키를 늘이는 수술을 한 후 걸음걸이가 어색해진 부작용도 악마 같은 그의 삶을 구성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란 의견이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조주빈의 지인들은 한결같이 그가 20대답지 않은 '부장님 느낌'이라고 입을 모았다는 것.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40대처럼 느껴질 수 있을 정도의 아재 느낌 목소리였다. 옛 감성을 좋아해 주변에서 '조 사장'이라고 불렀다"는 등의 증언이 줄을 이었다. 실제로 조주빈이 검거되기 전까지 '박사'는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40대 중년 남성처럼 행동해왔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본 피해자들 역시 그가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40대 이상의 남성일 것이라고 추측했으며 검거 직전까지도 수사 전문가들은 그의 여러 행적을 토대로 "적재적소에 맞게 한자어를 사용해 글을 쓰고 문법과 맞춤법도 완벽하다. 경제 분야에 대한 지식이 상당한 40대 중반의 인물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대학교를 갓 졸업한 스물셋의 앳된 청년이 저지르기에는 치밀하고 충격적인 성범죄였기에 대중의 충격은 배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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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우리의 이웃이 '공범'

박사 조주빈은 일찌감치 '갓갓'과 '와치맨'이 다져놓은 n번방을 통해 다양한 성 착취물을 수집하고 배포했으며 실제로 SNS를 통해 고액 아르바이트를 미끼로 여성들을 유인한 뒤 '노예'로 삼는 방식을 취했다. 메시지를 통해 그들에게 접촉하고 이후 얼굴이 나온 사진이나 개인정보를 탈취한 후 위조한 경찰 신분증을 제시해 그들을 협박하고 성 착취물을 촬영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동 운영자 및 감시자, 피해자 유인책, 홍보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공범들이 생겨났다. 현재 만 18세의 공범으로 알려진 대화명 '부따' 강훈과 현역 육군 일병인 '이기야', 수원 영통구청 사회복무요원 강 모 씨와 거제시청 소속 공무원 천 모 씨 등이 관련자 수사로 검거되어 조사를 받는 중이다. 특히 사회복무요원 강 모 씨는 성범죄뿐 아니라 여아 살해를 모의한 살인 음모 혐의로 송치됐다. 강씨는 고등학교 담임교사인 A씨를 스토킹하다 A씨가 자신을 협박죄로 신고하자 앙심을 품고 조씨에게 A씨의 딸을 살해해달라고 청탁한 혐의다. 이 과정에서 조주빈은 강씨에게 400만원을 건네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조주빈은 후원금 명목으로 받은 n번방의 입장료를 대부분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로 받는 치밀함을 보였다. 수사 초기 전문가들은 검거 당시 그가 현찰로 소유하고 있었던 금액이 1억 3,000만원에 불과했다는 것을 토대로 숨겨진 범죄 수익이 1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n번방 이용금액 중 중간값인 85만원에 수사 당국이 파악한 박사방 이용자 수 1만 명을 곱해 약 85억원 정도로 본 것이다. 조주빈의 암호화폐 지갑 주소에서 현금 32억원의 흐름이 발견됐다는 보도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는 범죄 수익 대부분을 "배달 음식 같은 먹는 것에 사용했다"며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동안 늘 붙잡힐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폭식으로 풀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사 당국은 '범죄단체조직죄'를 회피하기 위한 주장으로 보고 수사를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경찰은 가상화폐 거래소와 구매대행 업체를 압수수색해 조주빈에게 돈을 보낸 유료회원들과 자금 흐름을 좇고 있다.

한편, 조주빈이 검거된 직후 n번방 외에도 다양한 이슈들이 쏟아졌다. 신상 공개 당시 조주빈은 피해자에 대한 사과 대신 "손석희 사장님, 윤장현 시장님, 김웅 기자님을 비롯해 저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말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조사 결과 조주빈은 손석희 JTBC 사장(이하 손 사장)과 윤장현 전 광주광역시장, 김웅 전 기자를 SNS 메시지로 속여 수천만원의 금전을 갈취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손 사장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것처럼 꾸며 2017년 뺑소니 의혹으로 번진 과천 사고를 언급하며 협박한 것이다. 손 사장은 "흥신소로 위장한 조주빈이 김웅과의 친분의 증거를 보여주면서 '김웅 뒤에 삼성이 있다'는 식의 위협을 했고, 이들 배후에 삼성이 있다는 생각에 신고해야 한다는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며 금품을 건넨 사실을 인정했다.

평소 n번방에서 여러 유명 인사와의 친분을 과시한 조주빈은 배우 주진모 휴대폰 해킹 사건 역시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해왔다. '노예'로 부렸다며 인기 여자 연예인의 실명도 다수 거론했다. 전문가들은 조주빈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심한 열등감에서 유래한 자의식 과잉이라고 해석했다.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주의를 환기하려는 일그러진 영웅 심리일 뿐이라는 분석이다. 경찰 역시 조주빈의 주장들에 대해 "범행 수법이나 패턴 자체가 완전히 다르고, '주진모 사건'의 주범은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범죄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경단 '주홍글씨'의 등장

n번방에 접속한 관전자들 역시 공범으로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이 거세지면서 박사방 관련 가해자로 알려진 수백 명의 신상정보가 텔레그램 대화방을 통해 폭로됐다. n번방에 참여한 유료회원의 신상정보를 공개 저격하고 있는 '주홍글씨'가 스스로를 '자경단'이라 칭하며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수백 명의 범죄 정황과 개인정보를 무차별적으로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잠시나마 여론의 공감을 얻기도 한 '주홍글씨'는 이러한 과정에서 피해 여성의 실명과 사진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거나 가해자의 가족, 지인의 신상정보까지 여과 없이 공개해 현재는 되레 2차 가해의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 경찰 역시 "신상 공개 과정에서 기존 피해 영상이 다시 올라오는 경우도 있어 그들의 협조를 받기보다는 그들을 수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히며 우려를 표혔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n번방 사건에 대해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잔인한 행위"라며 특히 아동·청소년에 대한 범죄는 더욱 엄중히 다룰 것을 지시했다. 수사가 진행 중이거나 재판을 앞둔 사안에 대해선 즉답을 피해온 청와대의 행보를 고려하면 n번방 사건에 대해선 정부의 이례적인 반응 속도라는 평가다. 경찰은 n번방을 비롯한 성 착취 영상 공유방 참여자 추적을 본격화하고 11일 오전에 '갓갓'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CREDIT INFO

에디터
김두리
사진
시사저널, 일요신문, 게티이미지뱅크, KBS, SBS, YTN 뉴스, 각 스타 인스타그램 캡처
2020년 05월호

2020년 05월호

에디터
김두리
사진
시사저널, 일요신문, 게티이미지뱅크, KBS, SBS, YTN 뉴스, 각 스타 인스타그램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