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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특종/ 아내 전영자 씨 풀 인터뷰

이외수 부부 결별

On April 22, 2019

60대 중반에 ‘두 번째 삶’을 결심한 중년 여인이 있다. 그녀는 담담하다. 그 눈에는 수능을 막 끝낸 소녀의 호기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서려 있다. 그녀는 소설가 이외수의 아내 전영자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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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악화, 별거, 이혼 선언 … 결국 졸혼 합의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안다. 전영자 씨는 거침없고 씩씩하다. 하물며 외도를 한 남편의 내연녀 앞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외수라는 기인을 만나 우여곡절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으며 여기까지 왔다. 센 여자. 어쩌면 그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무너져내리기 직전, 그녀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었다. 한편으로는,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고도 싶었다. 이렇게 끝내기엔 너무 억울했다. 이외수의 아내이자 엄마이자 매니저였던 여자. 세상사에 관심 없던 남편.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그녀. 20인분의 밥을 매일 하는 일은 전영자 씨에겐 숨 쉬는 일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지난해 말 집을 나왔다. 그리고 이혼 서류를 법원에 제출했다. 뒤늦게 사실을 안 이외수 작가는 '내 아내가 설마?' '그럴 리가 없어!'라는 반응이었다. 결국 부부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졸혼'이라는 합의점을 찾았다. "1976년 11월 26일에 결혼했어요. 44년 전이네요. 그날은 눈이 펑펑 오는…." 그녀의 인생을 잡지 지면 몇 장에 다 옮기는 건 가당치도 않다.


이유가 뭔가요?
43년 동안(지난해 말부터 별거가 시작됐다) 같이 산 남편은 '삼식이' 같은 남자예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그 인생을 받아들였어요. 그저 남편을 잘 보살피며 살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도 그럴 것이 비교 대상이 없었으니까요. 그런 인생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어요. 인생이 버거워 옆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죠.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거예요. 여러 매체를 보면서 다른 여자들의 삶과 제 삶을 비교해봤어요. 저는 한 남자에게 목을 매고 살았더군요. 남자가 벌어준 돈으로 먹고살고, 돈을 못 벌어주면 징징대고, 그래도 없으면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그걸 깨닫고 나니 이쯤에서 혼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 선택이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
겁도 없이 까불면서 이혼을 선언했죠. 결국 졸혼이 됐지만요. 아주 오랜만에 방학을 맞이한 기분이에요. 휴가를 떠나는 기분인 것 같기도 하고요. 사람 마음이 그렇게 간사해요. 일거수일투족 제가 보살피던 사람인데, 지금은 근심이 되지 않아요. 저도 신기할 정도로 무미건조해요. 정말 다행이죠.


이 선생님의 상태는 어떤가요?
당신 없이 못 산다고 하지요. 남자들은 세 살이든 여든 살이든 엄살을 부리잖아요.


이후에 다시 합칠 생각도 있는 건가요?
아이들을 생각하면요. 장성해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나쁜 아버지를 만들 필요가 없고, 저도 나쁜 엄마로 남아야 할 이유는 없죠. 일단은 혼자 살아보고 싶어요.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일 24시간 붙어 지냈잖아요. 코흘리개 아이를 둔 엄마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스타의 매니저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낮이고 밤이고 주말도 항상 함께 있었잖아요. 남편은 '혼자'가 낯선 사람이에요. 더구나 남자들은 나이 들수록 아내가 엄마처럼 보살펴주길 바라죠. 그런데 제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어느 날 문득, 뭐든 제 도움이 필요한 남편을 보면서 '이 사람은 한평생 나를 보호자로 생각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정적 계기가 있나요?
건강이 나빠졌어요. 신장이 나빠져 꾸준히 관리해야 돼요. 고혈압도 생겼고 작년엔 뇌졸중으로 쓰러졌어요. 뇌졸중이라는 병이 무섭더군요. 저도 모르게 찾아오니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중환자실에 드나들게 되니 불현듯 겁이 났어요. 계속 병원을 오가는 것이 남편에게 미안했고, 행여 상태가 안 좋아져 가족에게 짐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남편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어요.


지금 건강 상태는 어떤가요?
즐거운 마음으로 치료를 받고 있고, 보다시피 많이 호전됐어요. 저는 죽음을 받아들여요. 제가 더 나이 들어 죽을 운명이라면 그때 하늘로 돌아가면 되고, 이대로 죽을 운명이라면 병을 가진 채 죽으면 되죠. 살아 있는 동안에 병이 있었을 뿐이지 병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에요. 누구든지 목숨은 하늘에 저당 잡혀 있어요. 때가 되면 그저 하늘로 돌아가는 거예요.


남편에게 짐이 되기 싫다…, 결국 사랑해서 이별을 택한 건가요?
그렇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몸 하나 챙기는 것도 힘든데 선생님까지 보살피며 살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일단 나부터 챙기자는 마음을 먹게 된 거죠. 되돌아보면 제 인생은 참 괴로웠어요. 고단했죠. 한 달에 쌀 두 가마니씩 밥을 해댔으니까요. 선생님의 작업실에 찾아오는 손님이 그만큼 많았어요. "밥 먹어요" 하면 작업실에서 20~30명씩 튀어나왔죠. 그렇게 오랫동안 밥을 하다 보니 몸이 늙고 병들었어요. 더 늙기 전에 집을 나와 무언가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어요. 두렵지만 무언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편은 꼿꼿하게 글만 썼다. 그녀는 그 인생을 받아들이고, 남편을 작가로서 존경했다. 남들은 그녀를 '보살'이라고 불렀고, 스스로는 '계집종'이라 칭했다. 남편이 "컴퓨터가 왜 이러지"라고 혼잣말을 하면 다음 날 새 컴퓨터가 배달되는 식이었다. 남편의 눈과 귀로 살았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온 세계다. "이런 내조를 평생 했더니 지겨워요." 그럴 만도 하다.


그동안은 그 삶이 지긋지긋하지 않았나요?
술이 지긋지긋했죠. 남편은 무박 3일 동안 술을 마셔요. 술을 마시는 도중에 술 상대가 바뀌면 저는 새로운 안주를 내가야 했죠. 또 술주정하는 사람들은 작은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잖아요. 그게 힘들었어요. 술을 못 이기는 사람은 술주정으로 물건을 부수기도 하죠. 이력이 나서 그러든지 말든지 내버려뒀어요. 그러다가 화가 나면 같이 부셔댔죠. 저희는 부부 싸움도 자주 했어요. 한두 시간 격렬하게 싸우고 망가진 물건을 같이 사러 가죠. 그러면 앙금이 남지 않아요. 그게 우리 부부가 살아온 방식이에요.


앞으로의 삶이 두렵다고 했지만 편안해 보여요.
솔직하게 말하면 보지 않으니까 살 것 같아요. 방학을 앞둔 학생처럼 마음이 평온하고요. 삼시 세끼 무슨 밥을 차릴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남편은 새벽에 참을 먹는데 기분에 따라 먹고 싶은 게 달라요. 집이 산속에 있는데 어느 날은 회가 먹고 싶다고 할 때도 있어요. 남편이 먹고 싶은 걸 미리 준비하는 게 제 일이었으니까, 지금 그걸 안 하는 것만으로도 가벼워요. 한데 평생 밥걱정을 하고 살아서인지 막상 집을 나오려고 하니 밥걱정이 가장 많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음식을 저장고에 가득 채워두고 나왔어요. 제가 몸이 아프면서 어쩔 수 없이 도우미 아주머니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분이 이제 웬만큼 기술이 늘어 안심하고 나왔죠.


선생님과 연락은 하나요?
40년 넘게 살다가 하루아침에 인연을 끊는 것은 불가능하더라고요. 간혹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아요. 그리고 남편이 SNS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올리니까 대충 소식은 알죠. 자랑도 하고 엄살도 피우더군요. 살도 많이 빠졌다고 해요. 외롭다고 투덜대기도 하는데, 그건 연애할 때나 통하죠. 저에겐 그저 징징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편은 깡다구가 있어 견뎌낼 거예요. 견딜 수 있도록 달래놓고 나왔어요.

특별한 계기 없이 어느 날 "우리, 이혼해"라고 했을 때 선생님은 어떤 반응이었나요?
"우리 이혼하자. 너무 오래 살았다. 지루하지 않니?" 툭,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더 늙기 전에 다른 여자랑 살아봐. 어느 날 그 여자가 싫어지면 재혼하자"라고 말했죠. 반응요? 씨도 안 먹히죠. 귀담아 듣지도 않아요. 선생님은 세상의 모든 여자가 다 자길 떠나도 저는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혼 얘기를 건넨 지가 한 1년 정도 됐어요.


이혼 서류를 법원에 제출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혼자 가서 넣었어요. 그런데 접수받는 분이 "이렇게 이혼하는 거 아닙니다"라고 하시더군요. 알고 보니 해야 할 게 많더라고요. 재산을 어떻게 분할할 건지 계산해 서류를 제출해야 한대요. 변호사나 회계사가 계산해 합의문을 써 넣어야 한다면서 제가 그렇게 세상 물정을 잘 몰라요. 밥하고 김치나 잘하지.(웃음)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난리가 났지요. 마치 엄마가 자식을 버리고 도망간 것처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어요.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럴 법도 하죠. 솔직히 말하면 돈을 주기 싫은 마음도 있을 거예요.(웃음) 넉넉한 살림이 아니거든요. 물론 그것보다는 오직 하나였던 자기편이 남이 된다는 게 무서웠을 거예요.


가족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우리 큰아들은 엄마 없이는 못 산다며 매일 저녁 눈물을 흘렸어요. "엄마가 어딜 가니, 엄마도 아빠도 그대로 있어"라고 달랬죠. 올해 설을 저 없이 보냈어요. 엄마가, 아내가 없다는 것을 실감했겠죠. 둘째 아들은 냉정해요. 엄마와 아빠의 선택을 지켜보는 것 같아요.


집에서 나온 지는 얼마나 됐나요?
신장 조직 검사를 하고, 뇌졸중 때문에 중환자실에 갔다가 지난해 말 한 달 정도 병원에 입원했어요. 이후 퇴원하고 병원 근처(강원도 춘천)에 집을 얻어 지냈고요. 남편이 있는 화천과는 차로 1시간 거리죠. 뇌졸중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병이라서 병원과 집이 가까워야 해요. 그렇게 집을 나왔는데 이후 기력을 찾고 이혼 서류를 넣은 거죠. 그리고 한 달 뒤 남편이 '졸혼'을 제안했고, 어디 한번 그거라도 해보자 한 거예요. 안 그러면 도망칠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게 두 달 전 이야기예요.


결국 건강이 계기가 된 거군요.
온몸이 아파오는데 문득 내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되면 누가 받아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엔 매일 밤 기도합니다. 잠자듯이 곱게 가게 해달라고요.


오히려 몸이 아프니 누군가 옆에 있어야죠.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으니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잖아요.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게 싫어요. 남편도 암이 완치된게 아니에요. 90% 정도 회복했지만 아직은 재발할까 봐 걱정하는 상태예요.


지금 가장 걱정되는 현실은 뭔가요?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한 걱정이 많죠. 이 나이에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60대 여성도 싱글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줄까, 많은 생각이 들죠. 중년 여성들이 이런 이유로 이혼을 결심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잘해내고 싶어요. 어떻게든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웃음)


집을 나온 이후 선생님을 뵌 적이 있나요?
얼마 전 집에 다녀왔어요. 제가 병원에 입원할 때 서너 벌만 들고 나와서 옷이 필요했거든요. 잠시 들렀더니 엉망진창이더군요. 눈에 걸렸지만 참고 뛰쳐나왔죠. 남편을 보지 않고 나왔는데, 남편이 금세 전화를 했어요. "왜 날 안 보고 가?" 하더라고요.(웃음)


당장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작은 전세방 얻을 돈을 받았고, 한 달 생활비 120만원 정도를 주겠대요. 120만원이면 한 달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이런 일로 자식들에게 기대고 싶지 않아요. 더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신세를 져야 할 수도 있으니 지금이라도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죠.


졸혼에 대한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주변 사람들에게 묻거나 상의하지 않았어요. 이외수의 아내로 존재했던 제가 이제는 저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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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누구도 이외수를 알지 못했고, 너무나 가난했죠. 그래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혼외자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도, 이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43년의 결혼 생활, 남편은 내 인생의 스승

혹자가 말했다. 전영자 씨의 삶은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의 삶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부부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40대 초반까지 굶고 살았다는 이외수의 말은 허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기죽은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는가!"라며 곧 죽어도 기 하나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는 남편. 그 사람을 향한 무조건적인 희생과 무조건적인 사랑. 묵묵히 43년을 그렇게 살아온 전영자 씨가 있기에 이외수라는 작가가 존재한다. 가난한 소설가의 아내로 살아온 전영자 씨의 지난 삶을 들어보면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투성이다.


결혼할 때 형편이 좋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아니, 무척 가난했다고 알고 있어요.
당시 방세가 월세로 2,000원쯤이었는데, 이 남자가 그걸 못 내는 거예요. 그래서 친정에 손을 벌렸죠. 나중엔 부모님이 제가 올 때쯤 되면 일부러 문을 열어두셨어요. 그러면 저는 아버지가 농사지은 쌀을 한 말씩 훔쳐왔죠. 그걸 팔아서 방세를 내고 원고지로 쓸 갱지와 새마을 담배를 샀어요. 한 달에 네 번 정도 친정에 갔던 것 같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아버지가 집주인에게 "방세가 밀리면 내가 줄 테니 우리 딸을 독촉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부탁하셨대요.


친정에서 결혼을 반대했을 것 같아요.
친정어머니가 남편을 보시곤 "거지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한다고 하니?"라며 노발대발하셨죠. 행색이 그랬고 가난하기도 했어요. 당시 남편의 직업이 기자였는데도 말이죠.


어떤 모습이 좋았나요?
허세가 없었어요. 남자들을 만나면 집안이 어떻고 돈이 어떻고 으스대기 일쑤였는데, 남편은 가락국숫집에 데려가 국수를 사주고 "외상!"이라고 외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 모습이 신선했어요. 평생 그럴 줄은 몰랐죠.(웃음) 그럴 줄 몰라서 여태껏 살 수 있었던 거예요.


살면서 후회한 적이 많았을 것 같아요.
남편과 저는 살아온 환경이 달랐어요.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남편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것을 몰랐죠. 친인척이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에 가야 되는데 그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네가 간다고 그분이 살아 돌아와?" 하는 식이었죠.


현실적이지 못한 성향 때문에 힘드셨을 것 같아요.
겨울을 지내려면 연탄이 필요한데, "예수님도 마구간에서 태어났는데 우리는 방이라도 있잖아" 하는 식이었죠. 사람들은 이외수 작가가 부자인 줄 아는데, 지금도 가난해요.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지내면서 제약이 많았어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 있어 앞뒤로 꽉꽉 막힌 채 10년을 보내니 통장 잔고도 바닥이 났죠. 그사이 이 양반이 외도까지 해서 위자료로 1억원을 썼고, 암에 걸려 3년 정도 고생했어요. 돈 모을 새가 없었죠.


애주가로도 유명하죠.
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클 거예요.(웃음) 남편은 물을 안주로 밤새워 술을 마셔요. 저는 술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에요. 남편은 술을 마시고 50여 회나 경범죄로 재판을 받았어요. 젊을 땐 술값이 없어도 술을 마셨어요. 술을 마시다가 술집 마담 앞에서 제게 전화를 걸어 "나 술 마신다!"라고 말해요. 그럼 저는 마담을 바꿔달라고 해 "대접을 잘해서 기분 좋게 보내면 술값을 지불하고, 아니면 못 준다"라고 호기롭게 말하죠. 그러곤 밤새 누구한테 그 술값을 빌릴지 고민하는 거예요. 제가 비슷한 약속을 세 번 정도 지키면 마담이 저를 믿고 외상술을 주기 시작하죠.


마담이 있는 술집을 드나드는 남편, 쉽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요.
남편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결혼하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근데 제 남편과 살다 보면 물이 들어요. 외로운 남자들은 회포를 풀어야 하는구나, 예술가는 더 깊은 외로움이 있을 거야, 하고요. 그렇게라도 이해해야지 어떡해요.

혼외자 문제도 있었죠?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본능이에요. 단, 아이는 낳지 말라고 했죠. 그런데 아이를 낳았어요. 그땐 무척 속상했죠.


혼외자의 존재를 알았을 때 이혼을 생각하진 않았나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그 여자분이 아이를 지우겠다고 하기에 같은 여자로서 그 마음이 오죽할까 싶었죠.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어요. 3,000만원을 건넸죠. 30년 전에 3,000만원은 굉장히 큰돈이에요. 당시 우리가 살던 집이 3,750만원이었으니, 집 한 채 값을 준 거예요. 결국 아이를 낳게 돼 이후 18년 동안 양육비와 생활비 명목으로 돈을 줬어요. 남편도 없이 힘든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게 마음에 걸리더군요. 언제든지 새 출발을 하고 싶은데 아이가 걸림돌이 된다면 제게 보내라고 했죠. 생모처럼은 아니어도 잘 키우겠다고도 했어요.


그게 가능한가요?
그런 일이 흔하던 시절이었어요. 소설이나 라디오, 연속극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자연스레 본처는 그래야 하는구나, 생각했어요. 보듬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이외수 선생님을 정말 사랑하셨군요?
그런 생각은 하죠. 어떤 여자가, 아니 어떤 사물이 이외수라는 한 인간을 이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저에게 목숨까지 주는 여자라고 해요. 지금도 저는 남편에게 제 목숨이 필요하다면 줄 수 있어요.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제 인생의 스승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외수가 아닐까요? 저를 달구고 깨뜨리고 부쉈던 사람이니까요. 그래도 저는 편식이 심해 좋은 것만 세뇌당했어요. 남 괴롭히는 면은 물들지 않았죠.(웃음) 남편을 만나러 오고 가는 사람들 중에도 제 스승이 된 분이 너무 많아요. 어느 날 싸리나무로 만든 빗자루 8개를 들고 계신 분이 있기에 집 앞마당을 쓸려고 2개만 팔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신부님을 드려야 해서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나는 고작 내 집 앞마당만 생각하는데 신부님이면 세상의 마당을 쓸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깨달음이 있었죠. 그냥 이렇게 깨치며 살면 되는 것 같아요.


결혼 생활 중 가장 후회되는 건 뭔가요?
다 후회돼요. 한편으로는 다른 남자를 만났어도 내 팔자는 이랬을 거라는 생각에 자괴감도 들고요. '그중 이 남자가 제일 나은 남자겠지'라고 합리화해요. 그러면서도 내 삶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희망도 품죠. 그러다가 내가 아니면 우리 남편을 누가 보살펴줄까 걱정도 되고요. 저는 친구가 없어요. 친구들을 만나면 콩나물값이 어떻고 남편이 늦게 들어와서 어쩌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우리 남편은 3년이나 나가 살면서 애도 낳고 들어왔는데, 고작…'이라는 생각에 대화가 안 되는 거죠. 자연스럽게 친구들과도 멀어졌죠.


그 3년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매일 밤 생각했어요. 첫차를 타고 가서 이 연놈을 다 죽일까, 하고요. 옆에 몽둥이도 하나 갖다 놓고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죠. 그러다 해가 뜰 때쯤 잠이 들고 일어나면 다 까먹어요. 아이들과 정신없이 보내다 밤이 되면 또 같은 생각을 하는 거죠. 그렇게 3년을 보내는데 어느 날부터 아이들이 아픈 거예요. 아빠가 보고 싶은데 못 보니까 고열이 나더군요. 새벽에 두 아들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다녔어요. 그때는 좀 힘들더군요.


아이들에게는 어떤 아빠였나요?
남편은 주로 밤에 글을 쓰고 이른 아침에 잠을 자요. 아이들은 아빠가 주무시는 걸 아니까 까치발을 들고 아빠 방 앞을 지나죠. 어릴 때부터 그렇게 아빠를 존경하는 마음이 컸어요. 남편은 무척 자상한 아빠예요. 글을 쓸 때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지만, 그러다가도 "아이들하고 놀아줘야 돼" 하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축구 게임 연습을 밤새 해요. 그러곤 아이들과 신나게 게임을 하죠. 중학교 3학년 때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는 거예요. 그걸 보더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차에 태워 바닷가에 가서 신나게 놀다 온 적도 있어요.


여자로서 궁금합니다. 마음속엔 지금도 혼외자나 외도에 대한 응어리가 있을 것 같아요. 이혼이나 졸혼을 결정하는 데 그 응어리가 영향을 끼쳤을 것도 같은데요.

큰스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응어리를 갖지 말라고요. 아니면 병이 생긴다고요. 당시엔 밤마다 옆에 연장을 챙겨놓고 잤지만, 이제 응어리는 없어요. 남자들은 아내가 있어도 어느 여자와 잠자리를 하든 그 순간만큼은 진실하죠. 번식 본능이에요. 그렇게라도 이해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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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친구가 없어요. 콩나물값이 어떻고 남편이 늦게 들어와서 어쩌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우리 남편은 3년이나 나가 살면서 애도 낳고 들어왔는데, 고작…'이라는 생각에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거죠.

다 행복했고 다 지겨웠다

가난했고, 술에 취해 있었고, 다른 세상 사람이었고, 혼외자까지 있었어요. 그럼에도 헤어지지 않았던 이유가 있나요?
아마도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또 남편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어요. 그때는 누구도 이외수를 알지 못했고, 너무나 가난했죠. 그래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혼외자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도, 이 사람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였요. 남편을 죽이고 싶다가도 아이가 이왕 태어났으니 명석하고 잘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선생님이 제일 멋졌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30~40년 전에 남편이 제게 50만원을 주면서 아무한테도 쓰지 말고 저 자신에게만 쓰래요. 당시엔 굉장히 큰돈이었죠. 그때 굉장히 멋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쓸 곳이 없어 그릇과 이불을 샀어요. 그리고 제가 결혼할 때 반대했던 친척들에게 보란 듯이 고기를 대접했죠.(웃음)


이 선생님의 아내라서 고달팠지만 그래서 행복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60세가 되는 해에 남편이 제게 선물로 손톱깎이를 줬어요. 손톱깎이 세 개를 사서 선생님이 하나 갖고, 하나는 후배를 주고, 나머지 하나는 케이스에 꽈리 그림을 그려 제게 건네더라고요. 꽈리를 그려주고 싶은데 코팅 때문에 케이스에 물감이 먹지 않더래요. 그래서 밤새 코팅을 벗겨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고 하더군요. 흔하디흔한 손톱깎이를 선물로 주는 게 기가 막혔지만 또 그림을 그려주니 재미있죠.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았어요.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요? 지독합니다.
그이의 순수함을 사랑했어요. 그 순수함은 정말 아름다워요. 물론 남편으로는 부족하죠. 언젠가 한번 남편이 술을 마시며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가족이 암적인 존재래요. 그 순간엔 '내가 암이야?' 싶어 화가 났는데 아이들을 장가 보내고 나니 남편의 마음이 이해되더군요. 우리나라 남자들은 가족을 버릴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거예요.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아무리 이외수라는 사람이 괴짜라고 해도 늘 가족의 무게가 있었겠어요. 저는 느끼죠.


43년의 결혼 생활, 되돌아보면 어떤가요?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열심히 살았죠. 남편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랬어요. 남편이 급성 암 3기 판정을 받았을 땐 충격이 엄청 컸어요. "쌈박하게 머리 깎고 병원놀이 한번 해보자!" 하고 대차게 말했지만 가슴이 미어졌죠. 나를 괴롭히는 남자이지만 만인에게는 좋은 사람인데 왜 암을 주셨을까, 수없이 물어봤어요. 차라리 내가 암에 걸렸다면 이해될 텐데 왜 이 착한 사람에게 암을 주셨는지 도대체 하늘이 이해가 되지 않았죠. 저는 착한 사람은 아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선생님은 여전히 사모님에게 좋은 사람인가요?
어느 날 수박국수를 만들어주겠다며 수박 세 덩어리를 사 온 거예요. 두 개는 멀쩡한데 하나는 딱 봐도 상했어요. "이걸 왜 사 와?" 물으니 "수박이 딱 세 덩어리 남았는데, 두 개를 가져오면 홀로 남는 하나가 외롭잖아"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미워해요? 그냥 사랑하고 말죠.


지난 43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요?
다 행복했고 다 지겨웠어요.


앞으로 계획은요?
무엇이든 할 거예요. 노동이든 뭐든 제가 할 수 있는 무엇이든지요. 잘 살고 싶어요.


졸혼을 생각하는 중년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을 것 같아요.
한 번쯤 호되게 싸움을 하고 나가서 방학을 누려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남자들? 어떻게든 먹고살아요. 마트에 가면 다 있거든요. 쓴맛, 단맛 다 느끼고 난 뒤 방학을 맞은 느낌, 나쁘지 않아요.


밝은 표정,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 거침없는 이야기. 행복했노라, 사랑했노라, 편안하노라, 그렇게 인생을 말했지만 오롯이 한글 파일로 정리한 그 인생은 쓰디쓰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다. 부부의 피날레는 지금이 아닐 수도 있다. 이토록 찬란한 인생 아닌가.

60대 중반에 ‘두 번째 삶’을 결심한 중년 여인이 있다. 그녀는 담담하다. 그 눈에는 수능을 막 끝낸 소녀의 호기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서려 있다. 그녀는 소설가 이외수의 아내 전영자 씨다.

Credit Info

에디터
하은정
사진
김정선

201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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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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