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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이영범·노유정 부부 지난해 4월 극비 이혼

노유정의 못다 한 이야기

고백의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살아야 했고, 내가 살아야 아이들도 사니까. 엄마는 이토록 강하다.

On October 2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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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범·노유정 부부가 4년의 별거 끝에 지난해 4월 이혼했다.
21년의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현재 아내는 지하 단칸방을 전전하며 시장에서 일하고 있고, 남편은 KBS2 드라마 <여자의 비밀>에 출연 중이다. 잉꼬부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 부부이기에 그 내막은 더욱 충격적이다. 오랜 설득 끝에 노유정을 만날 수 있었다.

네 시간 남짓의 인터뷰 동안 네 번은 오열했고, 세 번을 흐느꼈다. 기자와 마주 앉은 그녀는 이 순간이 두렵다고 했다.

“애들 아빠를 나쁘게 쓰지 말아주세요.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아이들이 상처 안 받게….” 그녀가 수없이 당부한 말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튿날 밤, 그녀에게서 문자메시지가 한 통 왔다.

“마치 심리 치료 선생님과 대화하듯 얘기했네요. 후련하기도 하지만 두려운 마음에 후회 아닌 후회를 하며 밤잠을 설쳤어요. 왜 이리 못나고 소심한지…. 모두가 상처 안 받게 잘 부탁드립니다.” 끝끝내 모질지 못한 그녀다.

오래전부터 별거 중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1994년에 결혼했고, 4년 전에 별거를 시작했어요. 그 사람의 이혼 조건이 언론 매체에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것과 아이들 성을 바꾸지 않는 거였죠. 저는 절박했기에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그냥 벗어나고 싶었어요. 오죽했으면 아이들한테 “엄마가 죽으면 아빠 옆에 묻지 마.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줘”라고 말했겠어요. 그와 살면서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제가 꿈이 너무 컸어요. 그래서 미움도 크고 원망도컸죠.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들었다.
별거를 시작하면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죠. 이런 얘기가 참 힘든 게…(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들 아빠가 무책임하지 않았다면, 아이들 양육비를 조금이라도 지원해줘서 생활이 안정적이었다면 이렇게 인터뷰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그걸 바라면서 이혼한 것도 아니에요. 제가 이혼한 이유는, 살고 싶었으니까. 제가 살아야 두 아이도 사니까.

그게 무슨 의미인가?
남편이 주식 투자를 하고 사기를 당하면서 힘들었어요. 일을 잠깐 쉬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10년 동안 활동 없이 쉬게 된 거예요. 그 세월 동안 제가 경제적인 책임을 졌죠. 옷 장사를 하면서 애들을 키웠어요. 사업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부은 돈이 있으니 만회하려고 더 큰 돈을 쓰죠. 사업을 하던 남편이 저한테도 돈을 구해 오라 요구했고, 안 되니까 큰소리가 나고 거칠어지고….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다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수도 없이 생각해봤거든요. 근데 이렇게 살다가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조심스러운 질문이다. 외도도 있었다고 들었다.
결혼 후 첫애를 가졌을 때 외도를 했어요. 심지어 그 상대가 저와 잘 아는 동료 배우였어요. 충격이었죠. 남편보다 그 여자가 더 미웠어요. 결과적으로 제 불행의 씨앗이 됐거든요. 당시 그 여자는 미혼이었는데 지금은 결혼해 유부녀가 됐어요. 그럼에도 늘 당당했고 아직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죠. 그래서 더 화가 나요. 남편과 사는 동안 늘 마음 한편이 허전했지요.

어떻게 지내고 있나?
빈손으로 집을 나와 지하 단칸방에서 지냈죠. 이후 친구들 집을 전전하다가 차를 팔고 빚을 내 다시 지하 단칸방을 구했어요.
시장에서 일하며 유학 중인 두 아이를 공부시키고 있어요. 남편의 경제적인 지원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그래도 애들은 공부를 마무리해야 하니까…. 제가 아이들 문제에서만큼은 악바리처럼 해내니까, 죽어가면서도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니까 나 몰라라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그 현실이 너무 가혹해요. 남편이 나 몰라라 하니까 제가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이젠 제가 죽을 것 같아서, 제 상황을 얘기하고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어요.

상상이 가지 않는 상황이다.
별거를 시작할 때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사기를 당해서 그 차압이 엄마한테 들어오니 잠깐 떨어져 살아야 될 것 같다”라고 설득했죠.
그 후 4~5년 지났고 아이들이 훌쩍 커버렸어요. 그런데 남편이 이혼을 안 해주는 거예요. 그 세월 동안 경제적인 지원도 없었죠. 혼자 지하 단칸방을 전전하고 시장에서 일하며 아이들 뒷바라지를 했어요. ‘올해까지만 하고 죽자’라는 생각으로 버텼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게 들려온 얘기는 “이영범은 아들 유학 뒷바라지를 하고 노유정은 바람나서 집을 나갔다”였어요. 그럼에도 모질지 못해서….

이영범 씨는 양육비를 전혀 부담하지 않고 있나?
위자료는 당연히 받지 못했고 양육비는 1백만원씩 석 달 정도 받은 게 전부예요. 줄 사람이 아니기에 요구하지도 않았어요. 그걸 주는 남자였다면 이혼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별거를 하면서 아들은 아빠가, 딸은 제가 돌보기로 약속했어요. 그런데 결국 나 몰라라 하니 제가 둘 다 돌보는 상황이 된 거예요. 졸업을 코앞에 둔 아이를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할 수 없었어요. 살고 있던 1천만원짜리 지하 단칸방을 빼서 아이에게 돈을 보내고 지낼 곳이 없어 친구 집을 전전했죠. 근데 방학이면 아이들이 한국에 오잖아요. 그래서 다시 차를 팔고 선배에게 5백만원을 빌려 지하 단칸방을 구했어요. 닭발집도 하고, 카드빚도 지고, 이것저것 돈 되는 건 다 팔고 시장에서 일하며 여기까지 온 거예요.

지금 지하 단칸방에 사는 건가?
다행히 우리 애들이 긍정적이에요. 첫 지하 단칸방은 화장실이 계단에 있었어요. 아들이 서면 화장실 천장에 키가 닿았죠. “엄마, 내가 다음번에 올 땐 고개를 더 많이 숙여야겠지?”라며 웃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1년 뒤엔 꼭 이사를 하마”라고 했고 그 약속을 지켰어요. 그래서 1층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4년 동안 살았죠. 그러다 아이들 학비가 부족해 다시 방을 뺐고 망원동 지하실 방으로 이사를 오게 된 거예요. 아이들이 친구들도 자주 집에 데리고 오는데, 언젠가 제가 “엄마 아빠가 누군지도 아는데 이런 곳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게 창피하지 않아?”라고 물었더니 “그런 게 어디 있어? 하나도 안 창피해”라고 말하더라고요. 고맙고 예쁘죠.

세상 사람들이 이혼한 사실을 모르니, 여전히 누구의 아내로 불리는 것 자체가 힘들지 않나?
애들 아빠와 같이 살 때였어요. 딸이 학교에 다녀와서는 “엄마, 오늘은 해피야? 새드야?” 하는 거예요. 순간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거 왜 물어?”라고 했더니 “엄마가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서”라고 말하는 거예요. 어린 딸의 눈에 비친 모습대로 저는 행복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나쁜 게 아니고 결국 저한테 문제가 있는 거였어요. 항상 그 사람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제가 문제였죠. ‘저 사람은 왜 가정적이지 못하지? 왜 책임감이 없지?’라고 늘 생각했는데, 그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늘 불만이었고 그로 인해 너무 괴로운 거예요. 결국 성격 차이를 이겨내지 못한 거죠. 이젠 누구의 아내가 아닌, 그냥 저 자신이고 싶어요.

결혼 생활은 어땠나?
제가 방송 일을 할 때는 그런 생각을 안 했어요. 일이 없어지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니 화가 나는 거예요. 억울하더라고요. ‘아이들에게 왜 저렇게 무심할까? 나는 시장에 나가서 단 5만원 벌려고 내 모든 걸 내려놨는데 아빠라는 사람은 왜 그러지 않을까?’ 제가 예전처럼 돈을 벌고 방송 일을 하고 있다면 이런 인터뷰를 하지 않았겠죠. 애들 아빠가 원하는 대로 별거하면서 그냥 살고 있었을 거예요. 근데 아이들을 돌봐야 하고 저는 여전히 이영범의 아내고…. 현재 애들 아빠가 드라마에 출연 중이에요. 사람들이 절 보고 “탤런트 아내가 왜 시장에 나와 남편 얼굴에 똥칠을 해?”라고 말하니까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된 거예요.

이영범 씨의 경제적인 상황은 어떤가?
언젠가 아이들이 방학이 돼 들어와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비행기 삯을 제게 미루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위자료 한 푼 안 받고 나왔고, 지금 지하 단칸방에 살아. 그래도 당신은 외제차 끌고 살잖아”라고 했더니 일단 신용카드로 긁으면 나중에 주겠대요. 물론 제가 빚으로 고스란히 안게 됐고요. 사실 저는 애들 아빠에 대해 아는 게 없이 살았어요. 밖에서 뭘 하는지, 얼마를 버는지,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요. 같이 살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죠. 밖에 나가면 내 남편이 아니라 생각하고 살았어요. 같이 살던 잠원동 집은 지금도 그 사람 명의로 돼 있을 거예요. 이후에 한남동 오피스텔에서 지내다가 지금은 어디서 사는지, 누구랑 사는지 저도 아이들도 모르죠.

경제적으로 힘든데 굳이 두 아이를 유학시켜야 하나?

저는 명품 옷도 골프도 피부 관리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냥 돈을 벌면 아이들한테만 썼어요. 그게 제 행복이었죠. 지금 찢어지게 가난하고 힘들지만 제가 아이들에게 한 희생을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아이들이 어긋나지 않고 잘 자라고 있는 건 제가 죽기 살기로 자기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알기 때문일 거예요. 전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시장에서 일하는 것도 창피하지 않아요. 유별난 엄마라고 하는데, 저희 엄마가 그랬듯이 저도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시장에서 어떤 일을 하나?
학교 후배가 시장에서 대게 도매업을 해요. 거기서 카운터를 봐주고 있어요. 애초엔 닭발집을 지인 동생들과 함께 운영했는데, 그 동생들이 한 달 만에 도망을 갔어요. 접을 수 없어서 혼자 버텼죠. 그렇게 1년을 고생하니 단골이 조금씩 생기더라고요. 될 만한가 싶었더니 주인이 계약을 연장해주지 않았고 그 돈으로는 갈 곳도 없더라고요. 이미 방송국엔 사업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섭외가 끊어진 상태였죠. 애들 공부를 시켜야 하니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거예요.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지하 단칸방에서 혼자 사니 동네 사람들이 수군대더라고요. 그래서 숨어 살았어요. 아는 사람 한두 명만 만나고, 교회에 다니고…. 사람들은 지금도 제가 이혼했는지 몰라요. 제 부모형제도 제가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모르고요. 부모님에게는 너무나 죄스럽고…. 제 상황을 아는 대학 후배가 제가 걱정됐는지 “가게로 밥 먹으러 와. 집에 있으면 뭐해” 하다가 “아르바이트나 해”라고 말해 지금까지 이 일을 하게 된 거예요. 벌써 1년이 넘었네요. 제겐 은인 같은 후배예요.

일하다 보면 상처 받을 일도 있을 것 같다.
손님들이 “노유정씨 아니에요?” “연예인이 여기서 뭐 해요?”라고들 하죠. 사실 방송하는 사람은 방송 일이 없으면 돈 벌 길이 없어요. 그래도 좋은 후배 덕에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어 감사하죠. 그걸로 월세도 내고 아이들 생활비도 보내니까요. 그래서 식당에 가면 뭐라도 도와주고 싶어요. 걸레도 빨고 찜기도 닦고….

문득 가족이 그리울 때도 있을 것 같다
시장에서 일하다 보면 엄마와 딸이 함께 오는 경우도 많잖아요. “엄마!” 하고 부르는 아이 소리에 저도 모르게 돌아봤어요. 그런 그리움이랄까요? 마트에 가면 가족끼리 시식을 하며 “여보, 이거 살까?” “이거 먹어봐” 하는 소리가 들리잖아요. 그럴 때 문득, 이제 나한테는 저런 즐거움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영범 씨는 요즘 드라마에 출연 중이다. 연락은 하나?
아이들 아빠와 원수처럼 지내지는 않아요. 애들 문제가 있을 때면 간혹 연락하죠. 전 예전부터 애들 아빠가 TV에 나오면 연기자로 봤지 제 남편으로 보이진 않았어요. 아이들에게도 아빠는 그저 ‘아빠’일 뿐이에요. 좋지도 싫지도 않은 아빠. 살아도 죽어도 아빠는 아빠, 그런 아빠죠. 예전부터 남편은 함께 밖에 나가야 가족들에게 살갑게 굴지 집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저희 가족은 평생 그렇게 살았어요. 이혼을 안 해준 것도 결국 이미지 때문일 거예요. 바른 이미지잖아요. 그것도 성격 나름이라고 생각해요. 다르게 보면 제가 이기적인 거죠. 제 위주이길 바랐던, 제 욕심의 죗값이라고 생각해요.

잉꼬부부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이 모든 게 충격적이다.
애초엔 저희도 잉꼬부부였어요. 아이들과 행복하게 잘 살았지요. 그런 시절도 있었네요. 하지만 저는 성격상 쇼윈도 부부도 싫고 가식적인 것도 싫어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요. 연예인이라서 사람들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어요. 능력 있으면 아이들과 고기 먹고, 능력 없으면 집에서 밥 먹는 거죠. 실제로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아졌을 때 방송에서 얘기를 많이 했어요. 남편과 대화하기 힘들고, 우울증도 겪었고, 결혼 생활이 위기였다 등등. 이후 관계가 아주 나빠졌을 때는 부부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나 광고도 안 했어요. 섭외가 꽤 들어왔거든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거절했어요.

이렇게 인터뷰에 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복잡한 감정이에요. 온전히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다 밝히고 떳떳하게 일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물론 이렇게 밝힌다고 당당하게 일할 수 있을지 고민도 되지만, 언젠가는 알려질 일이죠. 결국 제가 일을 해야 하니까 밝히는 거예요. 제가 어려우니까 도와달라고, 제 힘으로 아이들을 키워야 하니까 도와달라고요(그녀는 오열했다. 가혹한 삶 앞에 자존심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방송 일이고, 시장에서 버는 돈보다 방송국에서 버는 돈이 더 나으니까요. 다른 욕심은 없어요. 다른 욕심이 있었다면 애초부터 이렇게 어렵게 오진 않았을 거예요. 제가 다른 직업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다른 직업을 택했을 것이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죠.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돈 없다고 기죽지 마라. 내 딸이니까 할 수 있다. 내 아들이니까 할 수 있다. 나 또한 노유정이니까 할 수 있다…. 강남의 넓은 아파트에서 외롭게 사는 것보다 지금이 좋다고 스스로 다독이죠. 우리 딸에게 좋은 사람이 있으면 외국인과 결혼하라는 말도 해요. 마인드가 열려 있잖아요. 아들한테는 여자한테 상처 주지 말고, 정말 사랑하는 단 한사람에게 잘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죠.

고달팠던 인생의 반이 지났다.
어려울 때 주변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도와줬어요. 헛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죠. 남은 50년은요? 예전처럼 열심히, 웃으면서 살고 싶어요. 전 아주 유쾌한 사람이었어요. 동기 모임에 제가 나가지 않으면 날짜를 미룰 정도로 밝은 사람이었죠. 최근에 오래전 지인을 만났는데 표정이 어두워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이혼해서 어두운 게 아니라 생활이 힘들다 보니 표정이 어두워진 것 같아요. 오히려 별거 초기엔 표정이 아주 밝았대요.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있을 것 같다.
장하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대견하다….
노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흘려보내고 싶어요. 저, 정말 많이 죽고 싶었어요. 결혼 생활을 할 때도 이혼 후에도 목을 매달기도 했죠. 근데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 죽는 게 제 인생이었어요. 어쩌면, 아이들이 아빠하고 잘 지냈으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없어도 아이들이 외롭지 않으니까. ‘올해까지만 살다가 죽자, 그럼 애들 아빠가 아이한테 잘하겠지, 그래 내가 없어져야 돼’ 수도 없이 생각했죠. 딸과 매일 전화를 하는데, 문득 ‘저 아이가 엄마와 전화할 일이 없다면 얼마나 불행해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건 못 해줘도 말 상대는 해주자’라는 생각이 절 잡기도 했고요. 그리고 한편으로 제 인생이 너무 억울하잖아요.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세상에 못 할 게 없을 것 같은데 여기서 죽으면 억울하잖아요.

오늘 인터뷰에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가슴앓이, 응어리, 한… 그런 거지요. 결혼하면서 성격이 많이 변했어요. 남편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직업적인 영향도 있었을 거예요. 애들 아빠가 먼저 유명해졌고 저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 자연히 행동에 제약이 많아지고. 심각한 우울증도 앓았으니까요. 이 모든 게 그 사람 탓만은 아니에요. 눈물이 많아진 건 제가 모진 사람이 못 돼서예요. 저 혼자 가슴에 묻어야 하는 이야기가 많으니까. 지금도 걱정스러운 건 아이들이 행여 상처를 받지 않을까, 괜히 애들 아빠가 손가락질당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오늘 이 인터뷰에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몇 퍼센트 얘기했나?
50퍼센트. 집에 돌아가면 후회할 것 같고, 또 한편으론 속이 시원할 것 같기도 해요. 별거하고 이혼했으면서 뻔뻔하게 말도 안 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겠죠.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고 용기가 없어 숨어 지내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왔어요. 결국은 저도 애들 아빠와의 약속을 못 지켰네요. 제가 살기 위해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애들 아빠한테도 미안합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그도 저도 다 털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남들은 결혼 후 이혼하고 재혼하고도 당당하게 잘 살잖아요. 그냥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바라봐주면 좋겠어요. 누구의 아내도, 연예인도 아닌 그냥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요.

어둡고 긴 터널 끝에 한 여자가 서 있다. 터널을 벗어나야 하지만 용기가 없다. 하지만 한 발자국 내딛어본다. 그래서 그녀의 고백은 더욱 절실하다. 고단했던 그녀의 삶이 조금씩 편안해지길 바라본다. 

취재 | 하은정 기자

사진 | 하지영

스타일리스트 | 박경민

제품협찬 | 모노톡시, 케이트앤켈리, 데무, 제라르다렐, 에잇세컨즈,  블루페페, 루키버드, 세라, 아가타, 사바티에, 지고트, 헬레나 앤 크리스티

메이크업 |주정하(더 세컨) 

헤어 | 디자이너 신(더 세컨)

CREDIT INFO

취재
하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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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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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톡시, 케이트앤켈리, 데무, 제라르다렐, 에잇세컨즈, 블루페페, 루키버드, 세라, 아가타, 사바티에, 지고트, 헬레나 앤 크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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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신(더 세컨)
2016년 10월호

201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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