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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만에 읽는 역사 스캔들 네 번째

조선 과거 시험 커닝 백태

On July 21, 2014

과거는 성공한 관료가 되기 위한 필수 코스. 급제를 하기 위해 다양한 컨닝법이 시도되었다.

조선 양반의 지상 과제는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관료가 되려면 크게 세 가지 길이 있었다. 과거, 음서 그리고 천거. ‘음서’는 조상의 음덕으로 관료에 진출하는 것이고 ‘천거’는 글자 그대로 높은 사람의 천거를 받아 관료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꽃이라 할 수 있는 관료 진출의 길은 과거였다. 음서와 천거를 통해 관료가 된 사람들도 다시 과거를 치르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문과 급제자들이 중요한 관직을 독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3년에 한 번 치르는 문과의 선발 인원은 겨우 33명.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별시를 치른다지만 수만 명의 지원자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 ‘새 발의 피’였다. 일종의 예비 시험인 생원시와 진사시도 합격자는 각각 1백 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과거 시험 부정행위! 조선 초기에도 그런 조짐이 보였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과거 시험의 부정행위는 아주 노골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과거 시험을 혼자가 아니라 ‘팀’을 이루어 치르는 것. 이것을 ‘접’이라 불렀는데, 이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몸싸움 담당, 답안을 대리로 작성해주는 족집게 선생, 그리고 시험 당사자까지 서너 명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과거 시험장에는 ‘선착순 입장’이었으므로 일찍 가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좋은 자리가 왜 중요했을까? 이것은 과거 응시 인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선발 인원 33명에 1만 명 이상이 응시했으니, 시험문제가 걸리는 곳에서 가까운 자리, 답안지를 빨리 낼 수 있는 자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것이다.

시험문제가 걸린 곳에서 먼 자리는 가까이 가서 문제를 적어 가는 동안 시간이 다 지나가버렸다. 더 중요한 것은 답안지를 빨리 내는 것이었는데, 단 며칠 만에(때로는 하루 만에) 1만여 장의 답안지를 일일이 채점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합격자가 대부분 먼저 낸 답안지 수백 장 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전문 몸싸움꾼을 고용해 자리 잡기 쟁탈전에 나서기도 했는데, 이 와중에 죽어 나가는 사람도 생겼다고 한다.

‘접’을 이루어 시험을 치르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관행이 되어버렸다. 가끔 첨단 기법(?)을 동원하기도 했는데 숙종 때는 과거 시험장과 바깥을 대나무통으로 연결해 문제를 전달하면 밖에서 답을 적어 들여보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힘이나 돈이 있다고 아무나 이러한 부정행위를 통해 과거에 급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부정행위를 거쳐 급제하는 사람은 대부분 정권을 잡고 있는 권문세가의 자손들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웠고 만에 하나 그렇게 과거에 급제해 관리에 임용된다 하더라도 출세는 남의 이야기였다.

국가에서 과거에 급제한 자에게 발급한 급제 증서 ‘홍패’.

비천당은 성균관의 별당으로 과거를 시행할 때 시험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글쓴이 구완회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한 역사학도로서 저서 <아빠가 알려주는 문화유적 안내판>이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청소년 권장도서, 경기도 교육청의 수행평가 추천도서 등으로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역사책을 쓰고 있다. 최근에는 <중학생을 위한 딱 2시간 한국사>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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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기획
전유리
글, 사진
구완회
2014년 07월호

2014년 07월호

기획
전유리
글, 사진
구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