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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7개월, 혈액암 판정 이미아씨의 희망 여정

“암 환자에게도 삶이 있다.” 그녀의 말이 유독 귓전에 맴돈다. 배 속에 아이를 품고 혈액암의 일종인 악성 림프종 4기 판정을 받은 이미아씨는 뜻하지 않게 찾아온 인생의 절망에 담담하게 맞섰다. 그리고 이겨냈다.

On October 11, 2013

힘든 병마를 견뎌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환한 표정이 멀리서도 한눈에 띈다. 불과 8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미아(32세)씨는 소위 말하는 ‘암 환자’였다. 한 달에 한 번 항암 치료를 받는 것이 일상이었고, 그 후유증은 그녀의 몸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푸석해진 피부, 듬성듬성 빠진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 아예 깨끗하게 깎아버린 헤어스타일까지 영락없었다.
“최소한 5년 동안은 예후를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아직 완벽하게 ‘완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주치의에 따르면 지금의 몸 상태만 유지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거래요. 지금도 3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은 꼬박꼬박 받고 있고요. 지난 2월에는 다니던 회사에도 복직했어요.(웃음) 마음 졸이며 병원을 다녔던 지난 시간을 생각하면, 사실 지금의 일상은 마치 꿈같아요. 처음 암 판정을 받았을 때도 그랬지만, 얼떨떨하고 실감이 잘 안 나요.”

스물아홉 임신부, ‘암 환자’ 되다

그녀는 <한국경제신문>의 국제부 기자다. 늘 남의 얘기와 뉴스를 다루는 것이 일인 직업이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자신의 이야기가 바로 저서 <엄마는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다. 책에는 2년여에 걸친 암 투병기와 ‘암 환자의 솔직한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암 환자라고 해서 1년 365일 아프기만 한 건 아니에요. 그들에게도 삶이 있잖아요. 그 얘기를 진솔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 투병기는 감성적이라기보다 직설적이고, 현실적이에요.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인가 봐요.(웃음) 직업적으로 모든 상황을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훈련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아픈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돌이켜보면 차라리 그런 것이 제게는 훨씬 도움이 많이 된 것 같고요.”

그녀도 처음 암 판정을 받았을 때 자신에게 닥친 시련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암 판정 당시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지 7개월이 됐을 무렵이다. 그녀가 느꼈을 절망과 불안, 공포와 좌절은 짐작조차 하기 쉽지 않다.
“정확한 진단명은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 4기’였어요. 일종의 혈액암으로, ‘악성 림프종’이라고 통칭하죠. 제가 암이란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멍했어요. 대부분의 암 환자가 비슷한 감정일 거예요. 세상의 모든 불행이 나에게 불어닥친 느낌이랄까? 그나마 제가 걸린 병은 생존율이 60~70%로 꽤 높은 편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열 명 중 서너 명은 죽는다는 얘기잖아요. 게다가 ‘암’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두려움의 무게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죠. 그래서 감정에 너무 매몰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찾기 시작한 거예요.”

그녀가 혈액암 판정을 받은 건 2010년 9월 초, 둘째 아이를 임신한 지 7개월 되던 때였다. 갑작스러운 현기증과 피로감을 느낀 건 3주 정도 됐지만, 임신 때문이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기다 결국 참지 못하고 병원 응급실을 찾은 것이다. 임신 중이라 방사선의 위험 때문에 CT나 MRI를 찍을 수도 없었다. 골수검사 끝에 나온 최종 병명이 암이었다. “웬만하면 골수검사는 하지 않는데, 그때 왠지 기분이 꺼림칙했다”며 그녀는 긴박했던 상황을 회상했다.
암세포는 이미 전신에 퍼져 있었다. 또 암이 골수까지 파고들어 골수에서 백혈구와 같은 면역세포는 물론 적혈구, 혈소판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가족력도 없었고, 특별히 건강을 상하게 할 만한 나쁜 생활 습관도 없었다. 오히려 둘째를 출산할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행복에 겨워하던 시절이었다. 가장 먼저 배 속의 아이가 떠올랐다.

“병원에 가보면 임신 중인 암 환자가 의외로 많아요. 그들의 모든 걱정은 아마 아이일 거예요. 저도 암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럼 아이는?’이란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으니까요. 의사 선생님이 산부인과와 협진해서 저와 아이를 모두 살리는 방향으로 치료를 하자고 했어요. 굉장히 확신에 찬 말투로 말씀하시기에, 일단 안심은 했죠. 나중에 들어보니 ‘100% 확신은 없었지만 너무 낙담할까 봐 그렇게 말했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임신 초기인 5개월이 넘어가면 태아를 감싸는 자궁막이 독한 항암제를 철저히 막아주기 때문에 항암 치료를 해도 지장이 없다. 온몸의 세포와 조직이 오로지 아이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돌아간다고 보면 된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임신 7개월을 넘긴 그녀는 바로 항암 치료에 돌입할 수 있었다.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도 그녀에게는 좋은 징조였다.

편히 울 수조차 없는 ‘엄마’라는 존재

그녀는 그 자리에서 휴직 신청서와 암 보험금 청구서를 작성했다. 이제 막 세 살이 된 첫딸 현진이와 남편, 그리고 다른 가족들 얼굴을 차례로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2010년 9월 29일 첫 항암 치료를 받았다. 항암 치료의 후유증인 구역질 때문에 식사를 거의 할 수 없는 지경에도 그녀는 억지로라도 음식을 챙겨 먹었다. 배 속의 아이는 절대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에서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1일, 제왕절개로 아들 현준이가 태어났다. 마지막까지 항암치료 일정과 출산 일정을 두고 전문의의 의견이 엇갈렸지만, “아이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 결국 어렵게 수술 날짜를 잡은 것이다. 수술 내내 피와 혈소판을 수혈 받아야 하는 위험한 수술이었지만, 다행히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했다. 엄마의 고군분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현준이는 태어나고 두 돌이 갓 지난 지금까지 씩씩하게 잘 크고 있다.
첫째 현진이에게는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엄마가 지금은 많이 아프지만, 꼭 이겨낼거야”라는 엄마의 말에, 현진이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에게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엄마가 왜 아픈지 묻거나 칭얼대지 않았다.

본격적인 항암 치료가 시작됐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만 보던 항암 치료의 후유증도 찾아왔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더니 자고 일어나면 베갯잇이 온통 까만 머리카락으로 뒤덮였다. 암에 걸리면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머리카락을 다 깎아버리는지 몸소 깨달았다.

“현준이를 낳기 전 ‘빡빡머리 임신부’로 친정엄마와 함께 가발 가게에 갔어요. 엄마한테 ‘이것도 기념인데 사진 찍어달라’고 했더니, ‘그럴까?’ 하시면서 찍어주시더라고요. 지금도 부모님과 시어머니에게 감사드리는 것이, 그때 그렇게 무덤덤하게 저를 지켜봐주셨던 거예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나 항암 치료로 힘들어할 때 한 번도 제 앞에서 우시거나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요. ‘어서 나아서 네가 할 도리를 다 해라. 넌 꼭 나을 거다’라고 말씀하셨죠. 아버지는 심장이 좋지 않으셔서 병실에도 거의 못 오셨어요. 전화해 가끔 병세에 대해 말씀드려도 그저 ‘알았다’고만 하시고요. 한때는 그런 부모님의 모습이 너무 냉정하게 느껴져 서럽기까지 했어요. ‘불쌍하다, 안됐다’ 울면서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걸 바랐거든요. 가족이 너무 무덤덤하게 대하니까 저까지 ‘약해 빠진 소리’ 하기 싫어 억지로 웃곤 했는데, 그때는 제가 꼭 광대가 된 기분도 들더라고요. 고통 받는 건 나인데 왜 감정 노동까지 해야 하나 싶고….”

슬픔과 안타까움을 억지로 숨기는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고약하게 굴기도 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시처럼 가슴에 콕 박히면 자신도 모르게 화를 냈다. 무뚝뚝한 남편은 속과 다르게 툭툭 내뱉는 말 때문에 다툰 적도 여러 번이다.
“한번은 곪았던 게 터져 엄마와 언성을 높이면서 크게 싸운 적이 있어요. 한 번쯤 투정도 부리고 싶은데 그럴 여지가 없는 거예요. 그때 어머니가 ‘식구들 마음을 알기나 하냐, 나이가 몇 살인데 누가 누구한테 투정을 부리는 거냐’며 울면서 병실을 나가시더라고요. 엄마가 그렇게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까 다 이해가 됐어요. 제가 엄마잖아요. 자신은 아이들한테 강해 보여야 한다고 그렇게 다짐했으면서, 정작 아픈 저를 바라봐야만 하는 어른들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거예요. 엄마가 그렇게 ‘본분’을 강조하신 이유도, 병으로 죽을지 모르는 자식의 불행 앞에 부모가 무너지면 더 힘들 거라는 걸 아셨던 거죠.”

“ 저는 요즘 다시 아프지 않기 위해 좋은 음식을 먹고,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려고 노력해요. 또 돈도 열심히 모을 거고요. 두 아이에게 ‘난 이렇게 성공했어’보다, ‘나는 이렇게 실패하고 다시 일어났어’라고 나중에 꼭 말해주고 싶어요.”

항암 치료, 죽음보다 무서웠던 경제적 무력감

처음 딸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겉으로는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그녀의 어머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가족이 없었다면 그녀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어머니는 KBS 박경희(59세) 아나운서다. 공채 4기 출신으로, ‘아나운서계의 대모’로 불리며 지상파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뉴스를 진행한 최장수 아나운서이기도 하다. 지난해 퇴임 직전까지 매일 오후 4시 라디오 뉴스를 진행했다.

그 와중에도 박경희 아나운서는 거의 매일 딸의 병실을 오가며 그녀 곁을 지켰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그녀 대신 두 아이와 남편의 살림을 도맡았다. 며느리에 대한 원망은커녕, “무조건 네 건강만 생각하라”며 그녀를 다독였다. 워낙 예민해진 탓에 그녀는 가끔 시어머니의 별 뜻 없는 말에 가시에 찔린 듯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그녀의 건강을 걱정한 사람이 시어머니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두 살 터울 남동생은 그녀 대신 조카들을 살뜰히 챙겼다. 그래서 두 아이는 지금도 외삼촌과 사이가 각별하다고. 무엇보다 묵묵히 그녀 곁을 지킨 남편에 대한 고마움이 크다.


“남편이 정말 무뚝뚝해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표현을 잘 못하거든요. 오늘도 <우먼센스>와 인터뷰한다고 하니까 ‘<우먼센스>는 예쁘고 늘씬한 모델들만 나오는 잡지 아니냐?’면서 ‘네가 제일 뚱뚱하겠네!’ 하고 놀리더라고요.(웃음) 3년 연애하고 이제 결혼한 지 6년차라 어느 정도 적응하긴 했지만, 아픈 당시에는 서운할 때도 많았죠. 아내에게 살갑게 대하는 같은 병실의 다른 집 남편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웃음) 그럴 때마다 남편은 ‘무슨!’ 이런 표정으로 슥 나가버리곤 했죠. 그래도 마음은 누구보다 저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상관없었어요. 제가 암 진단 받았다는 얘기를 처음 할 때도 울거나 손도 잡아주지 않았어요. 그냥 ‘다 됐고, 나으면 되잖아. 내가 뭐 해주면 돼? 얼른 얘기해. 다른 건 생각하지 마’ 하고 병실을 휙 나가더라고요. 표정에는 당혹스러움과 슬픔, 원망이 뒤섞여 있고…. 말은 다정하게 못 해도 제가 부탁하거나 먹고 싶어 하는 건 다 구해다 줬어요. 물론 ‘많이 먹어, 백혈구 수치 올려야지’ 하면서 멋없게 말하긴 했지만.(웃음)”

그렇게 한 달에 한 번꼴로 여덟 번의 항암 치료가 이어졌다. 미국의 암 치료 지침서에는 ‘콜라와 햄버거라도 무조건 먹으라’는 지침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암 환자는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먹어야 한다. 하지만 항암제는 우리 몸 곳곳을 돌아다니며 몸을 피폐하게 한다. 그녀는 암 극복을 위해 두 가지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첫 번째는 먹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글을 쓰는 것이다. 암과 독한 항암제에 대항해 버텨내려면 체력은 필수. 먹고 토하는 한이 있더라도 음식물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자신의 현재 상태와 치료 현황을 꼼꼼히 기록했다. 자신을 ‘암 환자’라고 취급하며 무기력하게 누워 있어서 나아질 것은 없었다.

“의외로 사람들이 자기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병명을 정확히 모르거나, 무슨 약을 먹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병명은 물론이고, 어떤 항암제를 언제, 몇 회, 얼마큼 투여했는지 정확히 기록하고 외웠어요. 암 환자는 몸 상태가 언제 급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해요. 그때마다 차트 뒤지고, 주치의한테 연락하는 건 위험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또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감성적으로 나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요.”
그렇게 나름 병과의 싸움에서도 지혜롭게, 잘 견뎌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암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투병이 지속되면서 그녀는 암보다 더 무서운 적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바로 경제적인 위기다.

“항암 치료를 하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게 ‘돈과의 싸움’이에요. ‘집안에 암 환자가 한 명 있으면 기둥이 뽑힌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죠. 암 병동에 있으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가족에게나 직장에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경우가 의외로 많더라고요. 실제로 회사에 반차를 내고 잠깐 병원에 와서 항암 치료를 받는 남자 환자가 적지 않아요. 병력을 지워달라고 하는 환자도 많고. 가장이고, 자기가 없으면 돈을 벌 사람이 없으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암 환자들이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혼자 그렇게 병과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치료비와 입원비 등으로 거의 1억을 썼어요. 항암 치료를 8회까지 마치고, ‘자가 조혈모세포 이식’이 결정됐을 때도 치료 성공 여부보다는 돈 문제가 더 걱정됐죠.”

병원 침대에서는 치료의 성공보다 돈 걱정을 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게 진짜 암 환자의 현실이었다. 신문사에 다니던 시절, 너무도 당연히 받았던 월급이 그렇게 절실해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고. 건강을 되찾고 지난 2월 복직한 뒤 가장 기뻤던 것은 ‘다시 건강을 되찾아 일할 수 있다’는 것보다 ‘되찾은 급여통장’이 더 감격스러웠다고 솔직히 말하는 그녀다.
“암 환자들은 ‘죽음’이라는 걸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이에요. 그 처절한 생사의 기로에서도 당장 병원비 걱정하고, 밀린 공과금과 아이들 학비 걱정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비루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현실이죠. 내 몸을 갉아먹는 암세포보다 그게 더 무섭고 슬픈 것 같아요. 제 책을 읽은 분들 대부분이 돈 얘기에서 울컥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건 아픈 사람이건 안 아픈 사람이건 공감할 수 있는 얘기거든요. 이 사회에서 몸이 아픈 것보다 경제적 무능력자라는 무력감이 더 큰 상실감을 준다는 걸, 아프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회사에서 ‘잊힌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아픈 중에도 종종 회사에 들러 동료와 선후배에게 온 힘을 끌어 올려 밝게 인사했다.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는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남편 혼자 벌어서는 대출금과 병원비, 생활비를 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반드시 나아서 회사에 돌아오는 수밖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게 그토록 서글픈 말인지 절감했다.

이미아씨는 2년의 투병 기간 동안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할 일을 메모하고 실천했다. “암 환자라고 아프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현진(딸), 현준(아들)이의 엄마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인생의 굽이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아픈 건 제 탓이 아니지만, 병 때문에 날린 인생의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아까워 죽겠어요. 그나마 저는 감사하게도 회사의 배려로 이렇게 다시 복직해서 일할 기회를 얻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아요. 권고사직, 승진 불이익, 비정규직 계약 해지… 이런 문제도 꼭 한 번 얘기하고 싶었어요.” 이런 것에 비하면 오히려 독한 항암제의 고통을 참는 것은 차라리 단순해서 쉬웠단다. 몸의 고통을 견디기만 하면, 언제든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무너졌을 때의 무력감은 사회에서의 또 다른 사형선고와 다름없다. 그래서 지금도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지난해 가을, ‘자가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을 받았다. 성공적으로 끝나기만 하면 더 이상 항암 치료 없이 건강한 혈액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녀는 다시 밝은 웃음을 되찾았다. 지난 2년 반 동안 그녀는 ‘죽는 것이 두렵다’는 생각을 할 틈조차 없이 정신없이 살아왔다. 암 환자이기 전에 엄마이고, 아내이고, 딸이었기 때문이다. “평탄한 인생은 없어요. 문제는 위기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인 것 같아요. 저는 요즘 다시 아프지 않기 위해 좋은 음식을 먹고,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려고 노력해요. 또 돈도 열심히 모을 거고요. 마인드컨트롤도 중요해요. 그리고 두 아이에게 ‘난 이렇게 성공했어’보다, ‘나는 이렇게 실패하고 다시 일어났어’라고 나중에 꼭 말해주고 싶어요.” 그녀의 일기장은 앞으로 어떤 이야기로 채워질까? 다음 편이 궁금해진다.

CREDIT INFO

취재
김은향
사진
안호성
2013년 04월호

2013년 04월호

취재
김은향
사진
안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