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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 80쪽에 관한 얘기

8월호 80쪽에 관한 얘기

UpdatedOn July 28, 2012

파리 컬렉션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서울을 만났다.
케이팝에 관한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다. 지드래곤을 보겠다고 쇼장 앞에 줄 선 파리 소녀들도 봤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홍콩의 주윤발을, 알란탐을, 장국영을 흠모하던 1980년대. 그때의 영광이 한국의 아이돌에게 머무는 시절이 됐군, 했다. 서울 사람이 과녁의 중심에 들어서고 있다는 걸 저절로 알게 됐다. 9시 뉴스의 호들갑이 약간은 이해됐다. 사실 그 기간 내 마음은 한국의 디자이너들을 향해 있었다. 파리 컬렉션에 선 수많은 디자이너들, 톰 존스와 알버 엘바즈와 라프 시몬스와 리카르도 티시의 무대에 동공을 확대시킨 건 맞다. 박수를 아끼지 않았던 것도 맞다. 하지만 송지오와 우영미와 정욱준의 캣워크에 이르러선 신경이 곤두섰다. 두 눈을 부라리며 세계적인 프레스들이 얼마나 왔는지 살피게 됐다. 옷을 그렇게 잘 지어놓고 자랑하지 못하면 어쩔까 근심했다. 안다. 오지랖이다. 하지만 케이팝이 아니라 케이패션도 과녁의 중심이 될 만하다는 생각은 오만이 아니다. 큰 무대에 나가보면 안다. 자력갱생하는 한국 디자이너의 옷들이 천군만마를 거느린 스타 디자이너의 옷에 맞먹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개개인의 능력치는 그렇다는 말이다. 1980년대의 일본처럼 정부가 유럽행 패션 디자이너를 전적으로 밀어주는 것도 아닌데 요즘의 한국 디자이너들은 발군이다. 당시 일본의 전략은 훌륭했다. 아방가르드라는 패션 사조를 꾸준히 밀었다. 수억 엔을 짊어지고 자국의 디자이너를 파리로 보냈다. 규율 안에 갇힌 서양 복식의 틀을 깬 젠 사상은 옷 자체가 아니라 ‘옷을 입는 사람’을 부각시켰다. 옷을 벗어놓았을 때는 허물어졌던 선들이 사람의 몸을 만나 제각각의 선으로 부활했다. 구조적인 서양 복식의 세계에 비구조적인 동양의 선이 주는 메시지는 다분히 철학적이었다. 그리고 확연히 달랐다. 겐조와 이세이 미야케는 그렇게 급부상했다. 될 놈만 민다, 는 일본 정부의 선택과 집중 전략도 한몫했다. 패션 산업계란 천부적인 재능만으로 꿈을 이룰 수 있는 아마추어 리그가 아니다. 결국 이런 바람몰이 마케팅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에겐 전략이 없다.
무조건 우리 정부의 정책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지난 몇 해, 한국 디자이너의 해외 진출을 위한 다채로운 지원이 있었다. 콘셉트코리아라는 이름의 뉴욕 패션쇼, 파리 트라노이 쇼 비즈니스 지원, 해외 컬렉션 육성기금 지원… 안타까운 건 돈을 쓰고도 티가 안 난다는 거다. 지원의 일맥상통이 없으니 한국 디자이너들의 정체성을 아우르는 하나의 맥을 짚어내지 못한 게 사실이다. 거기에 공정성 운운하며 십시일반 지원금을 쪼개고 한 사람에게 몰리지 않도록 돌리고. 그러다 한 번쯤 어처구니없이 큰돈 들여 뉴욕 한복판에서 잔치를 벌이는데 손님은 없고. 난 잡지만 만들어온 사람이라 행정이라는 단어와 친하지 않다. 그러므로 행정의 과오를 내 잣대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을 리 없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전략의 오류다. 전략이 잘못되면 수많은 전술은 무용지물이 된다. 뉴욕 한복판에서 패션 굿판을 벌인 것도, 트레이드 쇼에 신진 디자이너들을 밀어 넣은 것도 모두 수포가 된다. 자위해본다, 이 모든 게 시행착오의 과정이라고, 결국 발전의 초석이라고. 하지만 그 혼란의 와중에도 대한 독립 디자이너들은 리그의 영건으로 떠올랐다. 어느 무대에서도 갈채를 받을 만큼 일정한 수준에 올라선 것도 사실이다. 왜? 어째서?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다. 실력이 좋아서다. 개인기가 좋아서다.
정보가 차단되었던 시대의 우리는 개인기가 부족했다. 돌이켜보자. 1987년이 돼서야 45세 이상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됐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이르러 30대로 그 연령이 낮춰졌다. 제5공화국 때의 일이다. 겨우 24년 전의 일이다. 보고 들은 바가 없던 그 시절엔 우리가 이렇게 옷을 잘 만들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 20여 년 후를 사는 지금의 디자이너들은 독해졌다.
아는 게 많으면 목표가 생긴다. 목표가 정해지면 오기가 생긴다. 오기가 생기면 독해진다. 이렇게 대한 독립 디자이너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독하게 옷을 짓는다. 철철이 느끼는 거지만 우리 민족이 일을 참 잘한다. 손끝이 여물고 머리채가 쨍하게 영글었다. 머리 좋은데 손맛이 매우니 못할 게 없다. 소위 말하는 창의적인 문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해외여행 자유화 24년. 그 짧은 기간에도 이렇게 청출어람인데 앞으로 십 년, 이십 년은 불 보듯 뻔하다. 진짜다. 그렇다면 선진화 정책의 최전선에 패션 산업 전략이 배치되는 건 당연하다. 지금은 원가절감의 시대가 아니라 부가가치 배가의 시대다. 패션을 사치  산업이라 치부하는 관료들을 많이 봤다. 그게 뭐? 사치 산업은 부가가치가 높다는 말이다. 그게 남는 장사라는 것이고. 남는 장사엔 투자를 해야 한다는 뜻이고. 그 남는 장사에 밑천이 되는 무형의 자산들이 여기 있다. 대한민국 남성복 패션 디자이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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