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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STER OF POSTERS

영화 포스터 왕중왕

한 장의 메타포. 누군가를 극장으로 가게 하고, 수많은 큐레이션 목록 속 플레이를 누르게 하는 동력. 시대 불문 힘 있는 영화 포스터 18선.

UpdatedOn June 22, 2021

  • <하이-라이즈> 2015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건 시대 불문 인간의 욕망이다. 부동산 광풍의 시대에 더 날카롭게 와닿는 벤 위틀리의 영화 <하이-라이즈>는 1975년 런던, 소득이 높을수록 고층에 살 수 있는 빌딩에서 벌어진 광기 어린 사건을 그린다. 포스터는 높은 빌딩 대신, 근사하고 미끈한 자동차 보닛을 보여준다. 들여다보면 높은 빌딩에서 추락하는 실루엣이 비친다. 가진 것이 많은 만큼, 높이 올라간 만큼 추락은 길고 깊으리라. 욕망의 법칙에 대한 한 장의 잘 빠진 은유.

  • <데쓰 프루프> 2007

    쿠엔틴 타란티노의 악취미에 대해 말하자면 길고 길지만, <데쓰 프루프>는 전반부에선 늘씬한 여자들을 포르노적으로 살해하며 전시해놓고, 후반부에선 여자들이 살인마에게 당하지 않고 맞서 응징하는,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의 영화다. 살인마의 수법은 스턴트 차량으로 여자들을 들이받는 것. 여자들의 시원시원한 추격전과 반격이 이어지고 ‘죽음을 막는(death proof)’ 스턴트 차량은 마침내 고꾸라진다. 20세기의 그래픽 노블 표지를 연상시키는 일러스트에 해골이 그려진 악마적인 자동차와 그걸 끝장낼 기세로-그러나 한편으로는 치이길 기다리는 볼링 핀처럼-서 있는 여자들의 모습은 이 영화의 이중적인 지점을 그대로 함축한다.

  • <더 랍스터> 2015

    한 쌍의 포스터가 있다. 여주인공이 실체 없는 대상을 껴안는다. 반대 방향에서 남주인공 역시 실체 없는 대상을 끌어안는다. 이들은 누구와 포옹하고 있는 것인가?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늘 독특한 세계관으로 세태를 우화적으로 보여주는데, <더 랍스터>에선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이 되어버리는 사회를 설정한다. 그 속에 기이한 아이러니를 던지며 감독은 묻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가능한가? 영화를 감각적으로 함축하는 이 포스터는 감독의 데뷔작 <송곳니>부터 <페이버릿>까지 함께한 디자이너 바실리스 마르마타키스의 작품이다.
    WORDS 한아름(미술감독)

  • <올모스트 페이머스> 2000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페이시스…. 로큰롤에 열광했던 1970년대 미국의 뜨거운 열기가 선글라스에 비친다. 하지만 주인공은 록 스타가 아니다. 카메론 크로우 감독은 록에 심취한 10대 비평가가 떠오르는 신인 밴드 스틸워터의 투어를 따라다니며 겪는 성장 이야기를 세심하게 그린다. 소년은 선망하던 록 스타의 멋진 퍼포먼스 이면의 진실을 마주하며 실망하고, 또한 그 실망을 끌어안으며 성장한다. 그렇게 비평가 소년과 그루피 소녀는 그 시절을 통과한다. 번쩍 빛나는 화려한 공연의 열기가 페니 레인의 선글라스에 비치는 포스터 디자인은 언제 봐도 훌륭하다.

  • <서스페리아> 1977

    <서스페리아>에 관한 한, 단 한 장의 포스터를 고르라는 건 잔인한 주문이다.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이 창조해낸 잔혹하고 말초적이며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는 전 세계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들의 창작욕을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율동하는 듯한 동화적인 타이포그래피, 여타의 뭇 영화들은 너무 과하다는 생각에 엄두조차 못 낼 총천연색,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생각나는 배우 제시카 하퍼의 놀란 얼굴. 독일 버전의 <서스페리아> 포스터는 맥시멀리즘의 매력을 원 없이 발산하는 이 영화의 정수를 담았다.
    WORDS 장영엽(<씨네21> 편집장)

  • <포이즌> 1991

    한 남자의 초상, 타이포그래피, 녹색 장미까지 삼등분된 포스터는 뉴 퀴어 시네마의 기수, 토드 헤인즈의 데뷔작 <포이즌>의 것이다. 성욕의 비밀을 푼 박사가 나병에 걸리는 ‘Horror’, 소년원부터 교도소까지 고립된 사회 속 동성애자를 그린 ‘Homo’, 아버지를 죽이고 도망친 소년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Hero’. 이 세 에피소드는 레이건 시대, 이성애와 가부장 강박에 사로잡힌 사회가 무엇을 독으로 여기는지 보여준다. 정상성에서 탈주하려 하지만 포박되고 마는 영화 속 인물들과도 같이, ‘포이즌’의 타이포그래피는 주변의 이미지들을 빨아들이며 소용돌이처럼 팽창한다.

  • <악마의 씨> 1968

    녹색 하늘과 검은 언덕, 그 위에 놓인 유모차 한 대. 여자의 표정엔 근심이 가득하다. 이 풍경이 보여주는 느낌은 따듯하거나 상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 프레임 안에서 대체 무슨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어두운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설명적이지도 구구절절하지도 않은 로만 폴란스키의 오컬트 호러 클래식의 포스터가 멋진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좋은 영화의 포스터는 결코 강렬한 태그라인과 유명 배우의 클로즈업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53년 전에 나온 이 포스터는 포토샵도 없던 시절 단순하지만 직관적인 콜라주로 증명하고 있다.
    WORDS 임필성(감독)

  • <잠입자> 1979

    파리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이 영화를 처음 보러 갔을 때 내게는 거의 정보가 없었다. 극장 앞에서 포스터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영화를 보았다. 보고 나오면서 한참을 포스터 앞에 서 있었다. 영화 포스터를 만든 사람은 틀림없이 자신의 감흥을 한 편의 감상문처럼 디자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나의 비평으로서의 영화 포스터. 가끔은 그런 포스터와 만날 때 나는 감동한다.
    WORDS 정성일(영화 평론가)

  • <지옥의 묵시록> 1979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파이널 컷 포스터는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다. 바뀐 건 단 하나, 고개를 쳐든 윌라드의 반사된 수면 아래 커츠 대령이 비친다는 것뿐. 포스터를 더 완벽하게 만들고 싶다면 거꾸로 돌려보라. 뒤집힌 글자는 읽을 수 없고 뜻을 잃는다. 남은 건 혼란과 광기. 그림자 속 커츠가 윌라드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걸 목도하게 될 거다. 이렇게 뒤집어두는 쪽이 ‘옳다’는 압력을 뿜어내며 우리를 유혹한다. 이게 바로 <지옥의 묵시록>이다. 피, 진흙, 정글, 악몽, 광기, 분열된 자아 그리고 호러. 좋은 포스터는 보통은 불가능한 방식으로 2시간짜리 시간 예술을 한 장의 공간에 접어낸다. 지옥은 공간이 뒤집어져도 성립된다. 혹은 완성된다.
    WORDS 홍석재(감독)

  • <멜랑콜리아> 2011

    우울은 재난처럼 찾아온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쳐 지구를 끝장내는 미지의 행성처럼. 행성 두 개가 겹쳐지는 순간을 미니멀하게 그려낸 포스터는 라스 폰 트리에 <멜랑콜리아>에 대한, 우울에 대한 정확한 은유다. 웨딩드레스 차림의 커스틴 던스트가 오필리어처럼 연못에 잠긴 메인 포스터도 훌륭하지만, 단순한 원과 공백만으로 그려낸 스티브 워맥의 포스터는 더 본질적인, 우울의 앙상한 밑그림을 그린다. 뼈와 밤처럼, 검은색과 흰색만으로 그려낸 고요한 광경.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서곡이 흐르는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보면 클래식 LP 커버 디자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 <어느 가족> 2018

    어느 날 <이웃집 토토로>의 중국 포스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털을 그렇게 보드랍게 시각화하다니! 중국 것은 촌스럽다는 오만한 편견이 털 앞에 무릎 꿇었다. 이후 중국 포스터를 종종 찾아보다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중국 포스터를 보고서는 군침이 흘렀다. 세계 어느 나라 버전보다, 그해에 나온 어떤 포스터보다 아름다웠다. 구도와 색, 스토리텔링까지 완벽에 가까웠다. 특히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이 포스터 속 ‘우산을 든 손’의 위로는 실로 엄청나다. 한 편의 영화를 한 장의 포스터로 압축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이 포스터는 답했다. 덕분에 영화가 또 한 번 파도쳤다.
    WORDS 진명현(영화사 무브먼트 대표)

  • <화양연화> 2000

    숱한 무드보드의 클리셰가 된 왕가위의 <화양연화>의 이미지가 이젠 좀 지겹지 않냐면, 그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아름답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개봉 20주년을 맞아 4K 리마스터링 버전이 재개봉하며 새로 디자인된 이 포스터 역시 그러하다. 강렬하고 바랜듯한 붉은색, 느슨하면서도 긴장감 있는 장만옥과 양조위, 단순하고 대담하게 들어간 금색 알파벳과 한자 제목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영화으로 보는 이를 데려간다. #mood 해시태그라도 걸어야 할 것 같지만 어쩌겠나? 제목부터 <In The Mood For Love>이거늘.

  • <이제 그만 끝낼까 해> 2020

    저 여자는 왜 외롭게 앉아 눈이 내려 쌓이는 동안 오래도록 꼼짝하지 않고 있었을까? 그것도 실내에서? 이 정도면 영화 포스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성공한 것 같다. 이런 궁금증을 안고 영화를 봤으니 말이다. 찰리 카우프만의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새로 사귄 남자친구 집에 인사를 가는 여자 이야기로 평범하게 시작하지만, 곧 그리 간단한 영화가 아님이 드러난다. 영화 속 내내 내리는 눈처럼 한 인간의 삶에 두텁게 쌓이는 고독과 우울, 후회들, 그 수많은 감정을 담은 이미지를 담담한 레이아웃으로 구성했다. 차갑고 아름다운 포스터다.
    WORDS 이동형(포스터 디자이너)

  • <미스테리 트레인> 1989

    어릴 적 포스터만 보고 본능적으로 끌려서 봤고, 짐 자무시 작품이라는 건 훗날 알았다. 그의 초기작인 <미스터리 트레인>은 한 도시에서 세 가지 에피소드가 벌어지는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로, 난해한 캐릭터들과 편편한 의식의 단편들이 신마다 연결된 듯 연결되지 않은 듯 이어진다. 이 일러스트 버전 포스터에선 영화 속 도시 ‘멤피스’와 서로 다른 이야기 조각들이 몽타주 위에 콜라주한 오브제로 그려졌다.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보자면, 1910년대 러시아 미래파 인쇄물 작품들에서 볼 수 있던 일러스트, 수제로 제작하던 북 커버의 형식을 연상시켜 더욱 실험적이고 흥미로운 포스터다.
    WORDS 맛깔손(그래픽 디자이너)

  • <도주하는 아이> 2019

    아이는 만사에 화가 난다. 나를 무책임하게 버린 부모도, 서로에게 떠넘기는 어른들도, 그럴듯한 희망으로 속여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세상도. 이 포스터는 영글지 못한, 영리하지 못한 아이의 분노와 절망을 핑크빛으로 물들였다. 잔인하게 아름답다. 노라 핑스체이트 감독의 영화가 어떤 태도로 아이를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포스터는 영화 이상으로 내 마음을 할퀴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아직 기대와 미련이 있다는 것. 영화 속 아이가 희망을 버리고 힘내길 바란다.
    WORDS 김태용(감독)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는 늘 포스터가 아름답다. 드레스 자락에 불이 붙은 채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포스터도 아름답지만, 한 줄기 타오르는 불을 그려낸 이 포스터를 좋아한다. 거침없이 붓질한 자국과 질감이 선명한 포스터는 두 여인이 규범과 금기를 넘어 서로에게 남긴 열상처럼 뜨겁고 직관적이다. 불은 경계가 없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번지며 삽시간에 모든 걸 집어삼킨다. 생생한 질감이 살아 있는 이 포스터는 그들의 사랑을 가장 단순하고 강력하게 비춘다.

  • <마더!> 2017

    창세기를 모티브로 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영화 <마더!>는 여성으로 은유되는 대자연이 인류에게 유린당하고 희생되는 이야기를 충격적으로 그려낸다. 포스터를 작업한 일러스트레이터 제임스 진은 기괴한 형상이지만 아름다운 색감의 식물들로 기이한 에덴동산을 재창조한다. 작가 특유의 초자연적 작품 세계와 영화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 든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운 미지의 세계와 대비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텍스트를 읽지 않아도 단번에 영화의 무드가 느껴지는 강렬한 이미지. 아르누보 스타일의 장식과 더불어 고전적인 폰트 선정 또한 훌륭하다.
    WORDS 서성경(미술감독)

  • <하나 그리고 둘> 2000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 필지로 쓴 한자 하나(一)와 검은 정장 차림의 소년이 눈에 띈다. 이 뒷모습은 영화의 메시지를 짐작하게 한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은 하나(一)와 하나(一)가 합쳐져 둘(二)을 이루는 가족 드라마로, 가족 구성원인 동시에 개별적인 개인들이 가족과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따뜻한 이야기다. “아빠가 보는 건 나는 못 보고, 내가 보는 건 아빠가 못 봐요. 둘 다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왜 우리는 뭐든 반만 봐요.” 포스터에서 등을 내보인 주인공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면을 들여다봐야 인생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듯이.
    WORDS 김성훈(<씨네21>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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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이예지

202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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