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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추억

바다 건너 다른 나라로 가지 못하는 연말, <아레나> 에디터들이 지금 당장 다시 가고 싶은 장소를 한 곳씩 꼽았다. 마음에 깊게 남은 풍경과 마주친 사람들, 향토 음식과 사소한 물건까지 타지의 그리움을 한데 모아.

UpdatedOn December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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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GETI

#빅토리아양식좋아 #다정한커플 #초원의아침 #점심은육회 #코끼리는소리없이걷고 #딸내미밥멕이는엄마마음 #실물이낫네 #아기기린

얼굴이 트는 계절이 왔다. 쓰라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벌어진 피부 틈으로 아프리카 초원의 열기가 빠져나간다고 믿는다. 몇 해 전 초겨울에는 세렝게티 국립공원에 머물렀다. #사자가 보고 싶었고, 초원이 정말 지평선을 이루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게 있었다. 내가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고, 결코 자연의 삶이 평화로울 수 없음을 목격해야만 했다. 그래야 내가 숨 쉬는 것은 꿈이 아니고, 나의 행동과 생각이 자연의 섭리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초원에서 깨달았다. 사자의 무료한 얼굴은 경계와 긴장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고, 떼 지어 이동하는 #얼룩말들에게 목표란 부질없는 것임을. 짧은 체류 기간 동안 몇 번의 경이로운 순간을 마주쳤는데, 그중 큰 감동은 #코끼리가족의 이동이었다. 그들은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였다. 인근에서 자동차 시동을 끈 채 코씨네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걸음이 가장 느린 늙은 개체가 앞장섰고, 후손들이 뒤를 이었다. 가장 강한 수컷은 무리의 꽁무니에서 낙오되는 가족이 없도록 일정 거리를 두고 이동했다. 코끼리 새끼는 여느 짐승처럼 쾌활하고, 사춘기에 접어든 코끼리는 무심했으며, 어미는 곁을 지켰다. 가족을 챙기는 것은 사자라고 다르지 않다. 프라이드에서 쫓겨나 피신한 어미 사자는 살아남은 새끼 사자 두 마리를 초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키우고 있었다. 새끼들이 새로운 프라이드의 왕에게 들키지 않도록, 어미는 초원을 경계하며 먹이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도망친 사자가 사냥에 성공하는 건 드문 일이다. 그건 #하이에나처럼 질긴 짐승에게만 쉬운 일이다. 하이에나는 사냥감이 지칠 때까지 쫓을 수 있는 체력이 있다. 초원에서 사냥에 성공하는 건 언제나 하이에나다. 다시 서울, 피로가 찾아오는 밤이면 생각한다. 나는 나의 하이에나를 잃고, 사자 가죽만 뒤집어썼다고.
EDITOR 조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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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I

#요가반 #로푸드 #대낮의레인샤워 #로열피타마하 #신에게금잔화를 #갈룽안데이 #어디든차낭사리 #꽃을달아드렸어요 #우붓왕궁

발리는 내가 죽을 뻔한 곳이다. 사고가 나기 전까진 모든 게 좋았다. 아침마다 수련하러 갔던 #요가반에선 세상 모든 히피가 모여 땀을 뺐고, 서퍼 같은 요가 강사가 쳐주는 기타 소리에 사바사나에 들었으며, 가뿐해진 몸으로 #로푸드를 아삭아삭 먹었다. 뜨거운 태양과 세찬 비, 새파랗거나 새빨간 꽃과 열매가 사시사철 열리는 곳. 목재와 석재가 넘쳐나 어떤 집도 대문만큼은 어느 도시의 집들보다 근사한 나라. 발리엔 어디나 #신이 있었고 그 신을 모셨다. 어디든 꽃과 쌀과 향으로 엮어 공양한 #차낭이 있었는데, 이 신성하고 아름다운 공양물을 들여다보면, 개미와 날벌레가 잔뜩 꼬이거나 거리의 개들이 훑고 가기 일쑤였다. 그 모든 이들이 이곳의 신이리라. 힌두력으로 2백10일마다 찾아오는 #갈룽안데이는 저승에서 조상의 영혼이 찾아오는 날이다. 명절을 몰랐던 난 그날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식당을 찾아다니다가 가는 곳마다 죄다 문을 닫아 낭패를 봤다. “되는 게 없는 날이네요.” 내가 투덜대자 기사는 밝게 말했다. “투마로 해피데이.” 다음 날은 해피하지 않았다. 오토바이에 치였으니까. 요가를 하고 좋은 걸 먹은 몸이 일순간 구겨졌다. 죽음을 앞두면 지난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더니, 단 하나의 생각만 들었다. 아직 할 게 많은데, 여긴 너무 멀다. 머리를 열두 바늘 꿰매고 병상에 누워, 도시 전체에 폭탄처럼 떨어지는 폭죽 사이에서 재난 같은 새해를 맞았다. 오토바이는 반파됐다. 이 정도로 다친 게 기적이라고 했다. 불운일까? 행운일까? 양쪽 모두였을 것이다. 발리엔 삶과 죽음이 함께 있었으므로. 멀리 온 지금, 한국에서 졸면서 글을 쓸 때면 생각한다. 어쩌면 그때 나는 죽었고, 지금은 ‘아직 할 게 많은데’라 느꼈던 순간이라고. 그래서 많은 것들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불운과 행운 모두 여기에 함께 있음을 느낀다. 투마로 해피데이, 투마로 해피데이.
EDITOR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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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ABAROVSK

#좋아하는온도 #사람의나날 #훈수두기 #세여인 #시원시원한여자 #우리가바로보아야할미소 #노인과호수 #평생 #하바롭스크행야간트램

진창에 빠진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건만 이미 마음 한편은 냉기가 가득했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옛 애인이 남기고 간 것들이 의외로 컸던 모양이다. 남아 있는 걸 비우기 위해 휴가를 냈고, 이한치한을 느끼려 홀로 러시아로 향했다. 10월인데도 러시아의 저녁은 혹독했다. 칼바람이 살을 에였고 인적 없는 거리는 불빛만 토해냈다. 그게 러시아에 대한 첫인상이었다(얼마 못 가 송두리째 바뀌었지만). 기왕 러시아까지 왔으니 어린 시절 선망했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로 했다. 짧은 휴가 일정상 하바롭스크를 목적지로 정했다. 시베리아 열차 안에선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아, 휴대폰은 시계로 변한다. 금세 따분해진 나는 열차 안을 누비며 사람들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친구 사이인 #세여인은 여행 일정에 대해 논하며 내게 떡을 나눠줬다. 바이칼 호수에 간다 했었나? 열차에서 잠을 청한 다음 날 해맑은 #미소를 띤 소녀와 아침 인사를 나누고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 배고픔에 허겁지겁 들어간 피자집엔 #시원시원한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호탕한 웃음으로 피자를 내준 그녀는 동양인인 나를 궁금해했다. 산책할 겸 올라간 작은 언덕에선 익숙한 풍경을 봤다. 어르신들의 체스 경기가 열리고 있었는데 옆에선 #훈수두기가 한창이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꼬박 하루를 하바롭스크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박물관, 미술관, 성당, 관람차 등 여러 곳을 다녔지만 나중에 현상한 필름 카메라에 들어 있는 건 사람들 사진뿐이었다. 그중 마지막에 찍은 인물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돌아오는 열차에서 같은 칸에 머문 신혼부부다. #평생 함께 지낼 부부와 꽤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누며 잠들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참 우스운 여행이었다. 사람을 피해 떠난 여행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다녔으니. 비우기 위해 떠난 곳에서 오히려 한가득 채우고 돌아왔다.
EDITOR 김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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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KONG

#에어포스 #골목길야경 #홍콩에새겨진내이름 #생긴것도기괴해 #핑크빛홍학 #쿠사마야요이언니와나 #대자로뻗은진격의카우스 #집앞단골손님 #필름카메라들고좋단다

제2의 고향, 나의 홍콩. 작년 초까지 나는 이 도시에 있었는데. 바람이 차가워지니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땀이 그립다. 숨이 턱 막히듯 습한 홍콩의 공기가 그립다. 2018년 크리스마스 이틀 뒤 출국했었지.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곧장 검은색 #에어포스를 사 신고 홍콩을 즐기러 화려한 간판이 반짝이는 #골목을 걸었다. 크…. 이거지. 처음 와본 건 아니었다. 매번 짧게 여행했었고 떠날 때마다 가슴을 아리게 만든 건 이 도시의 야경이었다. 수많은 불빛들이 가득 메운 홍콩은 반짝였고 머무는 동안 구석구석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살던 동네 벽 곳곳에 내 #이름을 새겨놓았지. 내 이름은 언제 들러도 남아 있을 것이다. 참고로 벽화마을이니 오해 말자.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첫 경험을 참 많이 했다. 첫 번째 첫 경험은 #두리안이다. 두리안의 악명은 익히 들었지만 그럼에도 도전장을 내밀겠다며 완차이 골목 어귀 시장에 줄을 섰다. 두리안을 향한 내 야욕을 아저씨도 느꼈는지 공짜로 하나를 건네주셨다. 아저씨의 땀 냄새로 얼룩진 두리안은 지금도 한 트럭 먹을 수 있을 만큼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두 번째 첫 경험은 핑크빛 #홍학이다. 침사추이의 한 공원에서 처음 본 홍학 떼는 머릿속이 하얘질 만큼 경이로웠다. 홍학만큼이나 아름다웠던 #아트바젤이 세 번째 첫 경험이다. 3일치 티켓을 끊었고 3일간 하루 종일 감상했다. 거대한 #카우스가 대자로 누울 만큼 길게 펼쳐진 빅토리아 하버를 바라보며 진행됐던 아트바젤의 관람객들은 한없이 여유롭고 평온했다. 하지만 이제 내가 그리워하는 홍콩은 사라지고 없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얼마 전부터 시작된 시위는 색채가 다양했던 홍콩을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으니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때의 홍콩을, 어렸던 나를? #필름카메라 들고 잇몸을 내보이며 웃던 너는 어디 있니, 돌아와….
GUEST EDITOR 정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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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UGAL

#와인 #상조르즈성 #리스본이야기 #역사가그려진벽화 #포르토러버 #구름다리 #너구리맛집 #미리크리스마스 #리스본행기차

딱 지금처럼 작년 12월호를 마감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리스본으로 떠났다. 뭔가에 꽂혀서 어떤 걸 해야겠다는 꼼꼼한 계획을 세운 여행은 아니었다. 인터넷을 하다가 리스본 직항편이 새로 취항한다는 소식을 듣고 티켓을 끊은 게 이번 휴가의 시작. 리스본과 포르토를 오가며 보낸 휴가는 맛과 가격, 의외로 높은 알코올 도수라는 삼박자를 고루 갖춘, #와인이 지천에 널려 있어 매일 적당히 취해 있을 수 있는 일주일이었다. 리스본에 도착한 첫날밤부터 포르토로 떠나는 날까지 비가 오거나 흐린 날씨였지만, 잠깐이라도 맑게 갠 날이라면 부지런히 나와서 걷고 싶을 만큼 조화롭고 즐거운 색채로 가득한 도시였다. #상조르즈성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처럼 공작이 돌아다니고, 시야에 걸리는 곳마다 엽서 속 사진 같은 곳. 사실 여행 중이던 당시에는 분명 리스본에 대한 감흥이 별로라 포르토로 이동하는 날 아침을 먹자마자 떠났었다. 리스본과 포르토는 기차로 서너 시간이면 이동할 수 있는 거리지만 바다가 가까운 리스본과 강 하나를 끼고 있는 포르토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유적지보다 시내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게 취향인 나는 포르토에서 탄력을 받았다. 포르토에서는 좀 더 관광객다운 자세로 더 많이 걷고 먹고, 마셨다. 밤낮으로 도루강이 보이는 동루이스 다리를 가고, 굳이 중심지 바깥쪽의 #중국슈퍼에 가서 컵라면을 사고, 현지인보다 한국인이 더 많던 유명한 맛집에서 그저 그런 식사를 했다. #미리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들뜬 분위기, 여행 중의 소소한 우연과 행운 같은 게 따른 덕분에 포르토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공항을 가기 위해 다시 #리스본행기차를 탄 게 이 휴가의 마지막 사진. 이와무라 류타의 <City>에 수록된 리스본을 들으며 이 사진들을 다시 보니 더 그립다. 이번 마감하고 어디로든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EDITOR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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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예지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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