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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땅

땅에서 태어난 문장들이 있다. 나쓰메 소세키부터 레이먼드 챈들러까지, 작가들을 키워낸 땅과 그 땅에 헌정하는 이야기 여덟 편.

UpdatedOn August 1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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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안달루시아

유럽의 가장 뜨거운 땅, 스페인의 남쪽. 로마와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며 이질적인 문화가 뒤섞인 올리브와 포도의 산지, 젖과 꿀과 피가 흐르는 안달루시아. 예술적 동지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 영화감독 루이스 브뉘엘과 함께 당대 안달루시아의 예술을 꽃피운 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대지가 지닌 어둠의 소리 ‘두엔데’를 담아 핏빛 희곡과 창백한 시를 썼다. <피의 혼례> <강의 백일몽> 등 토속적 필치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비극적 운명, 자연의 고매한 기품을 노래한 로르카의 문장은 그 자체로 안달루시아의 관능이었다. 로르카는 마드리드를 점령한 파시스트들에게 총살당했지만 그의 시는 굽은 칼날처럼 쇠락한 안달루시아를 비췄고, 천 마리 페르시아 말처럼 광장을 밝혔으며, 흰 석고와 상앗빛 글자처럼 언제나 우리 곁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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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칼브

헤세의 소설을 통과하지 않고 성장기를 보내기란 어려울 것이다. 10대 시절 <데미안>을 탐독하고 성인이 되자마자 찾아간 헤세의 고향, 독일 칼브는 예상외로 무척 작은 마을이었다. 지붕이 뾰족하게 솟은 독일식 목골 가옥들이 빼곡한 가운데 손바닥만 한 광장과 헤세의 생가가 있었고, 근교엔 낡고 바랜 수도원 터가 있었다. 신학교를 자퇴하고 자살을 시도한 작가의 유년을 담은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가 몸을 던져 삶을 마감한 강 역시 실개천 정도였다. 작가가 성장하기엔 지독히도 좁았을 이 마을에서 <페터 카멘친트> 등 내적 투쟁을 통해 치열하게 발돋움하는 헤세 초기 성장 소설들이 탄생했다. 이후 헤세는 세계대전을 일으킨 조국 독일을 비판하며 스위스로 망명, 그가 선택한 고향인 몬타뇰라에서 눈을 감았다. 칼브와는 달리 높고 너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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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마쓰야마

일본 본섬과 규슈 사이, 시코쿠라는 작은 섬이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런던 유학 시절을 제외한 대부분의 생을 도쿄에서 보냈지만, 청년 시절 이 섬의 마쓰야마 중학교에 잠시 교사로 부임한다. 그때의 경험을 써낸 책이 <도련님>이다. 세상 물정에 어둡고 어수룩하지만 대쪽 같은 고집 탓에 ‘도련님’이라 조롱당하는 화자가 작고 폐쇄적인 시골 마을의 협잡꾼, 사기꾼, 산미치광이, 온갖 인간 군상과 부딪히는 이야기다. 도련님이란 무엇인가? 구시대의 유물이자, 타협하지 않는 원칙, 꺾이느니 들이받고야 마는 성정. 그 불화의 맛은 퍽 유쾌하다. 도쿄 샌님인 소세키가 처음 겪은 날것의 경험은 초기 작품 세계에 경쾌한 활력이 되었다. 마쓰야마는 여전히 작은 도시고, 도련님이 벌게진 얼굴로 수건을 두른 채 오가던 도고 온천, 타고 다니던 작은 기차, 덴푸라가 맛있는 소바집은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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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모리아크, 보르도

프랑스 와인 산지 보르도엔 드넓은 부지에 익어가는 포도만큼 유명한 소설 속 인물, ‘테레즈 데케루’가 있다.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남편을 독살하려 한 죄로 재판받은 한 여성의 얼굴을 잊지 못하고 <테레즈 데케루>를 쓴다. 자의식이 또렷한 테레즈는 한 가문의 순종적인 아내 역할극을 더 이상 해낼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내면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불에 그을리고 타오르며, 테레즈는 관습과 억압에 저항하며 보르도 외딴 숲에서 파리로 뚜벅뚜벅 걸어나간다. 독실하고 보수적인 보르도 집안에서 자란 모리아크에게 테레즈는 “짓누르는 운명과 관습 앞에서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였다. 테레즈의 투쟁은 실존을 향한 것이며, 그는 끊임없이 세상과 불화하며 나아간다. 무거운 보디감이 특징인 보르도산 와인을 마실 때 종종 테레즈를 생각한다. 포도가 검붉게 익도록 테레즈는 보르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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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G. 제발트, 맨체스터

‘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 W.G. 제발트 <이민자들>의 막스 페르버 편을 여는 문장이다. 맨체스터는 한때 석탄 매연에 물든 산업혁명의 거점 도시이자 아일랜드 빈민, 유대인이 흘러들어온 이민자들의 도시였다. 나치를 피해 이주한 유대인 작가 제발트는 맨체스터에서 지내던 시기, 유대인 화가 막스 페르버를 만난다. 홀로 고향을 떠나온 페르버는 몰락한 공업 도시인 맨체스터 부두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문다. 물감을 두텁게 칠하고 벗겨내고 덧칠하는 작업을 통해 잃어버린 심원을 끝없이 복구하려는 화가의 몸짓과 생애를 집요하게 관찰하며, 제발트는 멸종된 나비를 채집하듯 이미 없는 것,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해 쓴다. 검은 매연과 분분한 석탄 가루, 이방인이 흘러들어와 고단한 삶을 마치고 무연히 스러지던 그 시절 불모의 도시에서. 이제 맨체스터는 축구와 밴드 오아시스로 대표되는 번듯한 상업 도시가 됐지만, 빈부 격차는 여전하고 운하 어귀에선 낡은 선박들을 조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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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하동

섬진강을 끼고 돌아 지리산 자락과 맞닿은 하동은 품이 넓고 넉넉한 땅이다. <토지> 1부의 배경인 평사리는 너른 곡창지대로, 구한말 마지막 풍요의 땅 중 하나였다. 경상남도 출신의 작가 박경리는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 한국이라는 땅의 곡진한 사연을 풀어낼 토지로 평사리를 점찍었고, 만석꾼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다양한 인간들의 욕망을 펼쳐낸다. 5대째 지주이던 최참판이 교살당하며 구한말의 봉건 시대와 작별하고, 친일파 조준구가 최참판댁을 차지하자 강인한 딸 서희가 그에 맞서다 머나먼 간도로 이주하기까지, <토지>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섬진강 물줄기처럼 도도히 흘러간다. 26년간 연재된 토지는 끝을 맺었고 역사는 흘러갔지만, 평사리는 여전히 많은 쌀을 생산해내는 곡창지대다. 여름이면 무성하게 푸르다가, 가을이면 온통 금빛 물결을 이룬다. 윤이 도는 단단한 쌀을 씹으면 바람에 수런대는 하동의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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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 LA

중절모를 눌러쓰고 트렌치코트 깃을 높이 세운 사립 탐정, 필립 말로. 그가 활동하는 무대는 1940년대 무렵의 LA다. <빅 슬립>부터 <기나긴 이별>까지, 고독하고 냉소적인 탐정은 석유와 부,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밀집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천사들의 도시를 떠돌며 무슨 일이든 해결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베벌리힐스, 야자수가 늘어선 선셋대로, 탐조등과 네온사인 불빛, 어둡고 은밀한 뒷골목까지 누비는 그는 냉정하지만 영혼을 잃지 않는다. 대공황을 지나 빛과 그림자가 선명히 드리운 미국에서 펄프 매거진 속 하드보일드의 세계는 또 다른 정의였다. 석유회사 부사장까지 지내다 알코올중독과 스캔들로 회사에서 잘린 레이먼드 챈들러는 추리 소설을 기고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고, LA의 비열한 거리에 꺾이지 않는 필립 말로를 세워둔다. LA는 여전히 뜨겁지만, 그곳엔 태양만큼 강렬한 어둠도 있었다. 하드보일드의 기수가 지켜내려 했던 정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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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리오 코르타사르, 부에노스아이레스

환상 문학의 땅, 남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선 낯선 공포와 관능의 문장들이 흘러넘친다. ‘점거당한 집’ ‘드러누운 밤’ ‘불 중의 불’ 등 단편으로 알려진 훌리오 코르타사르는 흡사 주술사 같다. 목구멍에서 토끼를 뱉고,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해 집을 점거당하고, 한 물고기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 자신이 물고기가 되며, 까무룩 잠이 들면 아즈텍 식인 제의의 희생양이 되어 돌칼로 심장이 도려내진다. 코르타사르는 현실과 환상을 환각적으로 뒤섞으며 주객을 전도하고, 독자를 읽는 이에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드는 참여자의 자리로 데려온다. 현실과 환상, 중세와 근대, 이곳과 저곳, 화자와 독자의 자리를 바꾸어놓는 마술적 체험. 잉카 문명부터 스페인 식민 시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난하고 복잡다단한 역사적 층위는 그 모든 마법의 뿌리가 된다. 이곳은 우리가 알던 세상을 송두리째 낯선 것으로 만드는 코르타사르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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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이예지

2020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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