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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동 그 집

On July 28, 2016

천막으로 둘러친 허름한 가게에는 탁자가 스무 개 남짓이다. 펄펄 끓은 감자탕 냄새가 큰길가까지 번져간다. 긴 세월을 버텨 돈암동의 명소가 된 태조감자국 이야기다.

박찬일의 백년식당 2

에세이스트이자 요리사인 박찬일의 오래된 식당 탐방기 <백년식당>의 두 번째 이야기가 <아레나>에 연재된다. 박찬일이 오랜 취재를 통해 어렵게 찾아내고 담아낸 노포들의 역사를 기록할 예정이다.

 

 

보글보글 끓는 전골냄비에 구수한 돼지뼈, 푸짐하게 들어간 감자와 얼큰한 양념장 국물. 국자로 푹푹 퍼서 나누던 전형적으로 ‘친구들끼리’ 먹는 음식. 바로 감자탕이다. 이 음식을 거래처 접대나 소개팅, 아니면 상견례 자리에 쓴다는 말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감자탕은 그저 수수하고 넉넉한 민중 음식의 상징이다.

‘범죄와의 전쟁’부터 얘기해야겠다. 감자탕 전성시대는 그 ‘어둠’에서 비롯했으니까. 노태우 정부는 빈약한 정통성을 호도하기 위해 몇 가지 정책을 폈다. 그중 하나가 범죄와의 전쟁이었다. 참, 명명 하나 기가 막히다. 원래 역사란 그런 것이다. 정통성이 약할수록 백성을 움직일 수 있는 쇼를 하게 마련이다.

최민식이 주연한 영화 <신세계>가 바로 이 시대의 부산이 배경인 실록 같은 이야기다. 노태우 정부가 펼친 ‘쇼 드라이브’의 아이템 중 하나가 ‘심야영업 금지’였다. 밤 세계를 폐쇄함으로써 범죄를 막겠다는 논리였다. 가장의 이른 귀가를 유도해 ‘가정주부’에게 호응을 얻겠다는 심사도 숨어 있었다. 실제로 어용 언론은 그런 바람몰이 기사를 써댔고, 12시 넘어 술 파는 일은 졸지에 범죄가 됐다.

노태우의 동지이자 전임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자정 통금 폐지로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과는 정반대 정책이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바로 그때, 여전히 사람들은 몰래, 재량껏 심야 술집을 다녔다. 1, 2차 정도 술잔을 기울이고 나면 해장이 필요한 법. 얼큰한 찌개와 허룩해진 뱃속을 달랠 국물이 필요했다. 감자탕집은 그중 최고의 선택이었다.

본디 서울의 뼈다귀 해장국은 소뼈를 기본으로 만든다. 청진동 해장국이 그 현존하는 증거다. 그런데 1970년대 접어들며 서울에서는 돼지뼈 해장국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국가가 정책적으로 양돈을 장려했고 부산물 생산이 늘었다. 서울로 서울로 올라온 이들은 기존 서울 음식인 소뼈 해장국 대신 돼지뼈 해장국인 감잣국을 골랐다.

지방 출신 이주민이 많이 살던 서울 부도심에는 감잣국집이 속속 문을 열었다. 잠깐, 감자탕이 아니라 감잣국이라고? 맞다. 시작은 감잣국이었다. 1980년대 들어 ‘~국’이라는 여린 이미지 대신 ‘~탕’이라고 이름을 갈아 붙인 식당이 여럿이다. 탕은 더 진하고 보양식 같은 냄새를 풍기니까.

감잣국 시대에 이는 전문점 음식이라기보다는 실비집에서 파는 안주 겸 식사의 한 메뉴였다. 공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감자탕집인 ‘태조감자국’ 2대 주인 박이순(69세) 씨의 증언이 여기 있다. “원래 뚝배기에 담아서 감잣국이라고 팔았지요. 나중에 전골냄비가 나오면서,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 음식이 되었지.” 감자탕은 본디 감잣국이었다.

 

1970년대 베스트셀러를 꼽을 때 세 손가락에 드는 책이 <어둠의 자식들>이다. 이철용이 구술하고 황석영이 써낸 이 책은 도둑놈, 강도, 창녀, 사기꾼 같은 부랑자 세계를 리얼하게 그려내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이 책의 파괴력이란 어마어마해서 책 속 은어가 초등학생 사이에까지 퍼져나갈 정도였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당으로 당선되어 주류 정치계로 돌아온 천정배는 서울대 법대-사법고시를 거친 전형적 엘리트였는데 야당 의원이 되었다. 그는 이 책을 읽고 받은 충격 때문에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스스로 밝힌 적이 있다. 책의 구술자이자 주인공인 이철용은 평민당 공천으로 13대 의원이 될 만큼 여러 가지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람이다.

이 책 속에 감잣국을 다룬 대목이 있다. 금은방을 턴 주인공은 도피하기 전 공범과 한 끼를 함께한다. 이때 먹는 음식이 바로 감잣국이다. 분명히 ‘감잣국’이라고 쓰여 있다. 내 기억도 마찬가지다. 실비집이나 대중 식사 집에서 붓글씨로 ‘감잣국 개시’라고 써 붙여놓은 장면이 선명하게 생각난다. 나는 서울 서부 지역에서 자랐는데 그 지역에는 대림감자국이 있었다.

성신여대입구역. 시장이 하나 붙어 있다. 돈암시장이다. 안쪽에 아케이드로 제대로 시장이 서 있고, 과거에 그 외곽에 상가들이 붙으면서 형성된 ‘바깥시장’ 자리에 감자탕집이 하나 있다. 놀랍게도, 저녁 6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긴 줄이 서 있다. 얼마 전, 텔레비전 방송에 소개됐기 때문일까.

“아녜요. 원래 이래요, 이 가게. 유명하잖아, 아주 오래됐어.” 시장 상인의 말이다. 태조감자국. 1958년 1월 24일이라는 날짜도 딱 부러지게 적혀 있다. 이 집은 3대 내림 식당으로 유명하다. 자식 셋이 함께 일하고, 어머니 박씨가 건재하다. “원래 감잣국만 파는 집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돼지뼈 전문이었는데 콩비지와 동태찜 같은 것도 팔았어요.”

우리 외식사에서 1980년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뚜렷한 흐름이 있다. 외식업체와 인구의 팽창, 세부적으로는 이른바 ‘전문점’의 득세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보통 식당은 여러 가지 메뉴를 팔았다. 냉면집은 대개 육개장, 갈비탕, 설렁탕 같은 한식을 같이 팔았다. 1980년대는 경제 규모가 팽창하던 시기다. 덕분에 한 가지 품목만 다뤄도 손님을 끌 수 있었다. 자연스레 전문점이 늘어갔다.

“우리도 1971년부터 감자탕만 하기 시작했지.” 이 집은 충북 진천 출신의 이두환(작고, 1913년생) 옹이 열었다. 처음에는 부암집이라는 상호를 썼다. 아들 이규회(작고, 1945년생) 씨에게 대물림하면서 감자탕 전문으로 널리 알려졌다. 돈암동에는 노동자가 많이 살았고, 시장은 흥성했다.

당시 돈암시장에는 지게꾼 같은 막벌이꾼이 많았다고 한다. 뚝배기에 감잣국을 담아 파는 태조감자국은 이런 이들에게 뚝딱 먹고 일하러 갈 수 있는 식당이었다. 덕성 있는 주인 이두환 옹은 늘 푸짐하게 뚝배기를 담았다. 새벽에 마장동에서 검은색 짐자전거로 실어오는 돼지뼈를 잔뜩 넣었다. 손님들은 뼈를 발라 먹고, 감자로 배를 채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할아버지는 돼지뼈를 통째로 사왔다고 해요. 도끼로 잘라서 썼던 거죠.” 3대 손자이자 이규회·박이순 2대 사장의 차남인 이호광(44세) 씨의 말이다. 도축장에서 돼지를 잡을 때는 등뼈를 기준으로 좌우로 분할한다. 살코기를 다 발라내고 나면 경추(목뼈)부터 꼬리뼈까지 반 마리 분의 뼈가 남는다. 이것을 싸게 사서 국 끓여 먹던 것이 바로 감잣국, 아니 감자탕이다. 오래 끓여 뼈의 골수를 충분히 우려낸 뒤, 돼지 잡내를 잡기 위해 들깨와 깻잎, 고춧가루를 풀어 맛을 냈다.

태조감자국이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있다. 서울 서부 지역 몇몇 집에서 원조를 자처하고 나서자 2대 사장인 이규회 씨가 원조 위의 태조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원조, 태조 논쟁은 대한민국 외식사의 기념비적(?) 언어다.
 

지금도 수많은 외식 업종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태조감자국이 자리 잡은 돈암동은 전형적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도심이 가까워서 일하러 가기 좋았고, 산동네를 중심으로 값싼 집들이 즐비했다. 이 동네서 오래 산 내 친구는 “산꼭대기까지 집이 꽉 들어찼고, 주변으로 혜화동, 미아리 등이 쫙 내려다보였지.

수도가 산 위쪽으로는 올라오지 않아서 물지게꾼이 다녔고, 연탄 장수는 길이 미끄러워서 웃돈을 받고 배달했어”라고 증언한다. 돈암동은 원래 미아리고개를 예전에 되너미고개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되너미고개란 병자호란에 청나라 군사(되놈)가 이 고개를 넘어 침입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되너미를 한자로 ‘돈암’이라 쓴 것이다. 이 지역에는 서울 토박이보다 지방 이주민이 더 많이 살았다. 그들은 서울의 하층 노동을 떠받쳤다. 그들에게 감잣국은 아주 적격인 음식이었다. 값싸고 열량 높고 맛있고 양도 많았다. 부족한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했다.

감잣국의 발생은 기록이 없다. 온갖 설이 난무한다. 태조감자국 주인은 가게에 이렇게 써놓았다. ‘감잣국은 먼 옛날 만주 조선족이 처음 개발했으며 남쪽으로 전래되어 서울에서는 6.25동란 후 실향민이 종로5가에서 처음 시작했다….’ 감잣국(감자탕)은 소뼈 해장국과 달리 별다른 역사적 기록이 없다. 옛 신문을 뒤지면 일제강점기까지 감자로 만든 설탕(감저당: 전분에서 당을 추출해낸 것)을 뜻했다. 1970년대 초반에야 감자탕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한 그릇의 감자탕 전골이 등장한다. 태조감자국의 감자탕은 크기별로 이름이 다르다. 대·중·소가 아니라 ‘좋~타, 최고다, 무진장, 혹시나’로 정해놓았다. 대략 2, 3, 4, 5인분이다. 값도 싸다. 1만2천원부터 2만5천원까지다. 서너 명이 소주 두세 병 곁들여 밥까지 볶아 먹어도 5만원이 안 나온다. 감자탕은 그 태생의 특징처럼, 변두리와 가난한 노동자의 음식으로 번져갔다.

신촌, 영등포, 용산, 부천 같은 부도심과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감자탕이 끓었다. 골수까지 빨리는 험한 노동의 시기, 그들도 감자탕 뼈라도 빨면서 허기를 채웠으리라. 태조감자국 감자탕에는 반드시 감자가 들어간다.

감자 값이 오르면서 언젠가부터 감자 없는 감자탕도 등장했다. 이때 감자탕의 감자가 우리가 아는 그 감자가 아니라 돼지뼈를 감자뼈라고 부르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말도 퍼졌다. 답부터 이야기한다면, 그런 뼈는 없다. 마장동, 독산동 같은 도축 시장에서 편의상 ‘감자탕용 돼지뼈’를 줄여서 ‘감자뼈’라고 부르면서 그런 논란이 생긴 것 같다.

“원래 감자를 통으로 넣어요. 간이 배려면 오래 걸려요. 요새는 성질이 급해서 빨리들 먹어야 하니까, 감자를 어느 정도 으깨듯 잘라 넣습니다.” 태조감자국 감자탕의 고명에는 푸짐한 깻잎이 보이는데, 겨울 3개월 동안은 유채를 넣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어로 ‘하루나’라고 부르는 이 채소는 단맛을 주고 씹는 맛이 독특해 여전히 사용한다.

“돼지뼈는 척추 전체를 쓰는 이유가 있어요. 보통 수입 뼈를 많이 쓰면서 등뼈 중심으로 많이 넣는데, 사실 각 부위별로 감자탕 맛을 내는 데 필요한 요소가 있어요.”

목뼈는 시원하고 ‘살밥’(살)이 많고 쫄깃해서 좋고, 그 아래 등뼈는 울퉁불퉁한 모양이 좋고 살점이 넉넉하며, 꼬리뼈도 쫄깃한 맛이 좋다고 한다. 이 집 뼈는 고기가 넉넉하게 붙어 있는 걸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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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많이 쓰니 거래처에서 살을 넉넉히 붙여 발라낸 뼈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흔히 국내산과 수입을 가르는 기준으로 국내산은 살점이 적다고 하는 게 정설이다. 좋은 뼈를 예전에는 ‘군납뼈’라고 불렀다. 군대 들어가는 고기 많은 뼈라는 뜻이었다.

“요즘은 대개 외상 거래를 하지요. 한 달 쓴 걸 모아서 다음 달에 돈을 주는데, 옛날에는 보증금을 내고 고기 뼈를 받았어요. 한 번은 업자가 사라져서 보증금을 떼인 적도 있어요.(웃음) 그게 분해서 아직도 그 장부를 가지고 있어요.” 어머니 박 씨의 말이다.

그의 옛날 추억은 고생한 것밖에 없다. 아이들 기르면서 하루 종일 일했다. 신혼여행을 갔다 오니, 시부모가 다락방에 신방을 꾸며주셨다. 그러고는 새벽부터 찬물에 손을 넣었다. “하루에 뼈가 1백 벌은 기본이고, 2백 벌까지 온 날도 많아요. 그걸 다 도끼로 쳐서 잘라 손질해야지요.” 박 씨는 덤덤하게 이야기하지만, 그의 손은 아직도 마디가 굵고 거칠다.

국물 한 숟갈 들어본다. 충분히 끓어서 걸쭉해졌을 때 탕 맛이 좋다고 하는데, 이 집은 일찌감치 맛이 올라온다. 두툼하지 않고 시원한 맛이 좋다. 어머니 박 씨가 만들어내는 다대기(일어이니 매운 양념장이라고 해야겠다)가 맛을 조절한다. 왕년에 그의 부친은 감자탕에 들어가는 양념을 벽에 써 붙여놓았다.

양심적으로, 양은 많고 싸게. 선대의 장사 비결이었다. 창업주의 가훈은 ‘글자대로 살아라’이며 2대 선친은 ‘남에게 피해 주지 말라’였다. 글자대로란 딴 생각 말고 원칙대로 살라는 뜻일 게다. 2대 주인의 피해 주지 말라는 뜻은 뒤집으면 좋은 음식으로 손님에게 이익을 주라는 뜻이었을 테고.

태조감자국은 여전히 셋집에 산다.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다. 아침 7시면 도축장에서 뼈가 온다. 곧장 핏물을 뺀다. 너무 오래 담가두지는 않는다. 맛도 함께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맹물에 푹 삶는다. 이 집 감자탕 맛이 시원한 것은 이것이 비책 아닌가 싶다.

100% 맑은 육수가 나온다. 이것이 하루에 수백 냄비를 파는 감자탕 맛의 바탕이다. “어려서부터 일했어요. 감자 깎고 뭐 이런 거요. 제 인생은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전부터 감자탕이었고, 지금도 감자탕입니다. 하루에 한 끼도 무조건 감자탕이고.(웃음)” 반찬으로는 깍두기가 유일한데 꽤 맛이 좋다. 식구들이 다 직접 만든다. 얼마나 무를 많이, 빨리 썰었는지 이 씨는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깍두기 달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태조감자국이 제일 호황이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 이렇게 줄을 서는데, 지금이 최고가 아니라고? 그렇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까지 돈을 가장 많이 벌었다. 특히 IMF(국제통화기금) 때 국가가 망했다고들 했을 무렵에 태조감자국은 더 잘됐다. 돈줄이 말라 싸고 푸짐한 감자탕만 한 안줏거리가 없을 때였다. 그렇게 고단한 몸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돼지뼈 살점을 발라내며 자욱하게 막막한 시절을 견뎌냈다. 그들이 바로 우리고, 우리의 선배들, 아버지, 어머니였다.

처음 뚝배기 한 그릇에 20~30원 하던 감자탕은 10여 년 전 제일 작은 전골이 5천~6천원대 했다. 이제 물가가 많이 올라 1만원을 넘는다. “원래는 장작을 땠겠지요. 제가 시집 오니까 연탄을 썼어요. 업소용 22공탄을 하루에 쉰 장 넘게 땠으니까 장사가 잘된 거지요. 애기 업고 졸면서 새벽부터 일했어요. 장남 호관이가 보자, 소띠(1973년생)니까 제가 46년간 이걸 했네요.” 어머니 박 씨의 기억이다.

다시 가족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발이 보이지 않는다. 태조감자국은 오직 가족 경영으로 긴 세월을 버텼고 명소가 되었다. 감자탕은 참 노곤하며 피 어린 음식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천막으로 둘러친 허름한 가게에는 탁자가 스무 개 남짓이다. 펄펄 끓은 감자탕 냄새가 큰길가까지 번져간다. 긴 세월을 버텨 돈암동의 명소가 된 태조감자국 이야기다.

Credit Info

Words
박찬일
Editor
이경진
photography
노중훈

2016년 07월호

이달의 목차
Words
박찬일
Editor
이경진
photography
노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