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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찾기

인터넷이란 지름길에서 잠시 이탈했다. 단 하루도 인터넷을 거를 수 없는 나약한 내가 싫어 발길을 도서관으로 돌렸다. 다시 찾은 도서관은 인적이 드물어 다소 군색했지만, 도서관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여흥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도서관에서의 느리고 `깊은` 지식 검색. <br><br>[2006년 12월호]

UpdatedOn November 21, 2006

PhotographY 우정훈, 이지인 Illustration 장재훈 Editor 정석헌

찬바람이 불었다. 탁해진 머리를 깨끗이 씻고 새 지식을 채우기에 좋은 날이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 풍문여고에서 아트선재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 10분 정도를 걸으니 고3 때 하루가 멀다 하고 오르던 정든 언덕 앞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독도서관 입구는 빨리 가려고만 했던 나의 조급함과 경솔함을 꾸짖고, 여과 없는 정보의 섭취로 뒤죽박죽이 된 뇌를 차분히 식혀주는 영험을 지녔다. 지식을 원하고 간절히 구하는 마땅한 절차가 바로 예서 시작되느니…. 입구에서 표를 끊고 들어가서 또 걸었다. 11월의 정독도서관 뜰 앞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이내 가슴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평일 오전의 도서관은 짐작대로 인적이 드물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앞서가는 이는 가방 한 가득 시험 교재를 싸들고 열람실 한구석을 차지할 요량이었고, 잰걸음으로 뒤따르는 이는 논문 작성을 위해 참고문헌과 자료를 물고 늘어질 태세였다. 나처럼 그냥 바람 한 줌 쐬고 머리 식히러 나온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 도서관은 읍내 장터 못지않게 복작거렸던 왕년과 달리 고요하고 숙연해 성당에 들어온 목자처럼 발소리를 죽여야 했다.
문득 눈을 드니 집채만 한 국어대사전이 있다. ‘ㄱ’에서 ‘가’로, ‘가’에서 ‘강’으로 ‘강마(講磨)’를 찾는 모처럼의 여정이 즐거웠다. 사전을 넘기고 손으로 원하는 단어를 쫓는 소리가 흥을 돋웠다. 강ː마[ 獅子― ] 강ː마(講磨·講)[명사][하다형 타동사] 학문을 강구하고 지식과 덕성을 연마함. 하지만 이 정도 단어는 엠파스 사전 검색창에 치면 뚝딱 나온다. 과연 나는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는 정보를 부러 도서관에 와서 확인할 명분을 찾을 수 있을까? 시간 대비 효과 면에서 좋은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결국 모두 공유할 수 있는 정보와 필요에 따른 전문 지식 중에서 무엇을 원하느냐의 차이겠지만, 도서관에 질서정연하게 비치된 책들과 인터넷 검색창을 단순 비교하는 건 무의미하다. 빠른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라면 도서관은 지식의 심연. 구하면 구할수록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갈 수 있음은 물론이다. 흘겨보는 인터넷 검색 단어보다 수고롭게 사전을 넘겨 찾은 단어가 더 오래 기억되는 것도 그런 이치의 소산. 다만 초고속으로 정보와 지식을 갖다 나르는 인터넷의 무한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어문학실은 그새 1층 입구 왼쪽으로 이사를 했다. 필요한 자료를 콕콕 집어 찾아볼 수도 있고, 기약 없이 미뤄두었던 책을 읽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덜컥 사기에는 좀 부담스럽고 책방에서 빌려보기 힘든 10권 이상의 대하소설 탐독 기간을 정한 뒤 섭렵해나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도서관 이용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새로 들어온 책은 서가 앞쪽에 따로 모여 있다. 자료 검색용 컴퓨터는 기본. 복사기에 사진 촬영용 간이 세트까지 완비돼 있다. 어문학실을 나와 중앙의 낡은 돌계단을 오르면 인문사회자연과학 자료실과 디지털 자료실, 간행물실 등으로 나뉜 2동이 나온다. 어문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자료가 바로 이곳에 집결돼 있다. ‘시간 관계상’ 2동을 지나쳐 열람실이 마련돼 있는 3동으로 향했다. 6개의 열람실이 있는데 3, 5열람실은 현재 임시 휴관 중이다. 찬란했던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고택을 보는 듯해 씁쓸했다. 열람실에는 순수하게 책을 읽는 이보다는 각종 시험 교재와 씨름하는 이가 훨씬 더 많았다. 떠도는 나그네가 오래 머물 곳이 아닐지 모른다. 2층 계단에서 3동 건물로 가는 중간에 우회전하면 예의 그 휴게실이 있다. 한때는 이곳이 좋아 공인중개사 교재가 가득 든 가방을 둘러메고 도서관을 찾던 시절도 있었다. 1천5백원짜리 우동과 3천5백원짜리 설렁탕 모두 성찬이다. 인산인해를 뚫고 급하게 끼니를 때웠던 예전에 비해 긴장은 떨어지지만 이제 눈을 책에 붙인 채로 천천히 배를 채울 수 있다. 자장밥을 앞에 두고 삼삼오오 모여서 스터디하는 여고생 그룹이 이렇게 예쁠 수가 없다.
오수의 욕구가 고개를 들어 도서관 밖 뜰 앞에 나섰다. 잡지 마감일이 임박한 탓이었다(역시 도서관에 오면 핑계가 많아진다). 그런데 이 뜰 앞 풍경이 심금을 울린다. 고등학교 건물을 개량한 친근한 풍경, 고즈넉한 종친부 건물을 보며 낙엽이 바람 따라 뒹굴고 쌓인 잔디밭과 그 사이사이를 채운 벤치에 앉아 책을 펴니 막혔던 숨이 탁 트인다. 주변을 죄다 금연 구역으로 바꿔 여간 섭섭한 게 아니다. 여간해서 흡연 구역을 찾기 힘들다. 그냥 나오기가 섭섭해 2주간 3권까지 빌릴 수 있는 도서 대출권을 적극 활용했다. 아는 형이 추천해 언제고 꼭 읽어보려 했던 조용헌의 <方外之士> 1, 2권을 들고 나오는 걸음은 가벼웠다. 새 지식이 추가된 머릿속과 가슴은 묵직했다.
여간해서 찾기 힘든 자료나 책을 구하려면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국립 중앙도서관을 찾을 만하다. 국립 디지털 도서관으로 거듭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인 국립 중앙도서관은 기획예산처와 서울지방 조달청 옆, 요새로 삼아도 좋을 만한 천혜의 장소에 위치해 있다.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이 아기자기하고 예쁜 마트라면, 국립 중앙도서관은 백화점과도 같다. 50여만 종이 비치된 정독도서관에 비해 중앙도서관에는 그 15배인 6백여만 종의 책과 자료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제1, 2, 3, 4열람실을 갖춘 정독도서관은 출근 도장을 찍으면서 공부하기 좋고, 1층에서 7층까지 다양한 테마의 자료실로 구획된 중앙도서관은 필요한 참고문헌과 자료에 몰두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인터넷에서 미리 이용자 등록을 해놓으면 1층 로비에서 카드 형태의 일일 이용증을 즉석에서 발급받을 수 있다. 주 2회 이상 도서관을 이용한 사람이 원하면 정기 이용증을 발급해 계속 쓸 수도 있다. 가방을 물품보관소에 맡긴 뒤 수첩과 볼펜을 든 채로 도서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서고 자료 신청대와 정보 봉사실을 겸하는 1층에 들어서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모반듯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내려놓는 걸음이 절로 무거워지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역동적인 3백50평의 넓은 공간에 빨간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알고 보니 공간을 오픈시키고 각 구역을 자연스럽게 나누도록 한 에이모듈(주)의 작품이었다. 사물놀이인 상모에서 영감을 얻은 유기적 형태의 오브제는 책상이 되기도 하고 벤치가 되기도 하며 오픈된 파티션이 되기도 하고 휴식처가 되기도 했다. 설계과업지시서라는 딱딱한 공문서에 반항이라도 하듯 자유롭고 역동적인 형태의 오브제를 구상했다는 디자이너의 설명에 무릎을 칠 만했다. 기분 좋은 스타트였다.
문득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선정한 이달의 읽을 만한 도서 목록 중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김정란 교수가 추천한 류수안의 <판독불능의 책>이 떠올랐다. 중견 시인 류수안의 첫 번째 소설로 형식은 엽편소설, 내용은 환상성을 취하는 걸로 들었다. 1백8편의 작품이 수록돼 있는 책을 집어들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반복, 순환, 시간의 의지, 파독 불능의 책, 전기, 시간의 간섭, 보물 찾기, 적막이 놀다가 갔다, 이다지도 아름다운 봄, 네 마음 속을 떠도는 섬…. 다음 편인 지는 해로 넘어가려는 순간 딴생각이 들었다. 이놈의 변변치 않은 집중력은 책 한 권을 한자리에서 끝내는 법이 없다.
2층 동북아·특수자료실에서는 북한서를 눈여겨볼 만하다. 웬만해서 보기 힘든 북한 잡지와 소설, 전문 서적 등이 꽤 많다. 3층은 정부간행물, 학술지, 일반 잡지와 신문이 죄다 모여 있다. 정확한 통계를 인용하거나 사보나 지방 신문에 난 주옥같은 기사를 발췌하는 부지런한 자들이 자주 찾은곳이다. 5층은 음반, 비디오, CD-ROM, DVD 자료와 원문 DB, 웹 DB, 전자 저널 등이 망라돼 있는 디지털 자료실이다. 자리를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는데, 전날 오후 5시 30분부터 시작된다. 모르고 갔다간 나처럼 낭패를 볼 수 있다. 6층에는 고서와 족보가 보관돼 있는 고전운영실이 있다. 모든 자료를 자유롭게 복사하거나 촬영할 수 있지만, <동의보감>이나 <석보상절> 원전 같은 고서는 직원의 손을 빌려야만 한다. 7층은 최근 3년 이후, 최근 4년 이전 발행으로 양분된 학위논문실이 있다. 나의 발길은 언제나처럼 4층 인문사회자연과학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안웅철의 사진에 김훈의 글이 더해진 <공차는 아이들>을 이제야 읽었다. 뭔가 대단한 ‘거리’를 찾던 내 눈이 서가 다섯 칸을 독점하고 있는 <국역 승정원일기>에 꽂혔다. 규장각 소장 <승정원일기>를 국역한 민족문화추진회의 백년대계로 만들어지고 있는 책인데 고종편이 고종 44년 5~6월분까지 모두 5백22권이 있다. 도서관을 제집처럼 들락거릴 핑곗거리를 찾았으니, 심봤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의 자료를 추린 32권짜리 <한일관계사료집성>도 노려볼 만하다.


목표가 생기니 기쁘기 한량없다. 흐뭇하게 나오는 길에 ‘책·랑 카페’에 들러 5백원짜리 카푸치노를 마셨다. 바로 옆에는 ‘북 레스토랑’이 있는데 매일 바뀌는 한식 메뉴가 3천5백원, 분식이 2천원이다. 주차는 2시간까지 공짜다. 사실 고속터미널역에서 걸어오기에는 다소 벅찬 거리다. 러시아워가 아니면 차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지난 11월 8일부터 중앙도서관의 이용 시간이 밤 10시에서 11시로 한 시간 늘었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모든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공짜 영화 관람이나 데이트 코스 겸용 같은 건 기본. 도서관이 나와 당신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망라한 책과 자료가 디지털 기술과 화친을 맺은 지 오래니 따분할 겨를도 없다. 지금이야말로 도서관 안에서 미래를 찾아야 할 때다. 조금 늦더라도 정도를 걸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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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우정훈, 이지인
Illustration 장재훈
Editor 정석헌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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