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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는 침몰해도 영화는 뜬다

On August 20, 2006

<린다, 린다, 린다>, <스윙 걸스>, <69>, <메종 드 히미코> 등 사소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어느 대작들보다 유쾌하고 재미있다. 블록버스터들의 스크린 장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명작을 만들어내는 일본 인디영화의 `사소한 저력`, 궁금해할 때다.<br><br>[2006년 9월호]

Words 김봉석 ILLUSTRATION 장재훈 Editor 김영진

요즘 일본 영화가 뜨고 있다. 하지만 일본 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면 처음 듣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영화 박스오피스를 들여다봐도, 일본 영화가 상위권에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인터넷을 봐도 화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한국 영화 아니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 그런데 일본 영화가 뜨고 있다니? 사실 그렇다. 일본 영화가 흥행에 성공을 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서울 관객 10만 명을 겨우 넘는 정도다. 지방에서는 여전히 일본 영화를 보기도 힘들다. 하지만 일본 영화의 개봉 편수는 점점 늘고 있고, 관객도 꾸준히 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얼마 전에는 일본 인디영화제도 열렸다. 외부에서 지원을 받은 영화제가 아닌, 일본 영화 마니아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본 영화 수입사에서 자체적으로 연 행사다. 최근 일본 소설의 붐이 일고 있는 것처럼, 일본 영화의 붐도 조용히 작은 흐름으로 시작되고 있다.

2년 전 개봉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소수 극장에서 상영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입소문을 거치면서 극장을 옮겨가며 3개월이 넘게 연장 상영되었고, 1년 후에는 이누도 잇신 감독과 배우까지 초청되는 앙코르 상영 행사도 가졌다. 이누도 잇신의 신작 <메종 드 히미코>는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게이 공동체라는 소재를 다뤘고, 이야기 구조 역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보다 조금 어렵지만 관객의 숫자는 더 많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극장에서 보고 팬이 된 관객만이 아니라 입소문을 통해 DVD를 본 관객 대부분이 다시 일본 영화를 찾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어떤 점에 매혹된 것일까?

일본 영화가 막 개봉되었을 때는 <러브 레터>, <철도원>, <주온> 등이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이와이 순지의 <러브 레터>는 개봉되기 몇 년 전부터 불법 비디오로 복제되어 수많은 사람이 보았지만, 그 감동을 다시 한 번 스크린으로 확인하고픈 관객들이 극장을 찾은 드문 경우였다. <링>과 <주온>은 일본 특유의 섬뜩한 심령 공포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최근 국내에서 관심을 끈 일본 영화로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메종 드 히미코>와 함께 <박치기>, <나나>, <스윙 걸스>, <린다, 린다, 린다> 등이 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메종 드 히미코>는 섬세하면서도 독특한 리듬감이 돋보이는 멜로 드라마이고 <스윙 걸스>와 <린다, 린다, 린다>는 코믹하고 즐거운 청춘영화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무엇보다 ‘작은 영화’라는 것이 눈에 띈다. 일본에서 히트를 친 <화이트아웃> 등의 블록버스터나 인기드라마를 영화화한 <춤추는 대수사선>,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해 일본에서 ‘순애’ 붐을 일으킨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등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본의 대중 다수가 좋아하는 영화를, 한국 대중 다수가 좋아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반면 국내에서 인기를 끈 일본 영화들은 대체로 일본에서도 소수가 좋아하는 영화들이었다.

국내에서 잘 팔리는 일본 소설의 장점은 섬세함과 개인주의다. 일본 소설의 전통 중 하나는 개인의 문제를 천착하는 사소설적 경향인데, 거창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거나 거대 담론을 거론하지 않고 한 개인의 내면을 치밀하면서도 부드럽게 파고드는 것에 치중한다. 개인을 통해서 개인과 사회, 세계의 문제를 다루고, 나아가 세계 그 자체를 해명하려 한다. 당연히 일본 영화에도 그런 전통이 흘러들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장애인 여성을 사랑하게 된 남자의 내면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아무런 편견도 없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결국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남자의 이야기. 이누도 잇신 감독은 그 남자를 욕하지는 않지만, 그를 통해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을 이야기한다. 개인의 문제라도, 그것을 깊고 치밀하게 파고들면 결국 세계와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인기 있는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 <파크 라이프> 등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 소설들은 개인적이지만, 결코 개인에 매몰되지 않는다. 한 개인의 내면을 죽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보인다. 그리고 난해하지 않게, 서정적인 문체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화사하고 아름다운 영상과 화법으로 관객을 매혹시킨다.
일본 영화에서는 거대한 이야기를 다룬 블록버스터보다 개인의 소소한 일상을 따라가는 멜로영화나 사적인 영화들이 더욱 매력적이다. 치밀하게 다듬어진 작은 순간들을 통해,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비극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일본 영화의 매력이다.

대체로 일본 영화들은 깔끔하고 잘 정돈된 느낌을 준다. 대규모의 제작위원회가 구성되어 만들어지는 대작이나 극단적인 예술영화를 제외하고, 대부분 일본 영화의 촬영 기간은 한 달을 넘기지 않는다. 치밀하게 프리프로덕션을 하고, 실제 촬영에 들어가서는 계획된 사항들을 정확하게 지킨다. 모든 것이 아귀가 맞고 흠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하지만, 반면 뭔가 지나치게 차분하다는 느낌도 든다. 많은 일본 영화가 그렇다. 일종의 단점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장점이다. 대부분의 일본 영화는 소위 ‘웰 메이드’다. 기본기를 갖춘, 잘 만들어진 영화를 뜻하는 웰 메이드 영화는, 일본 영화가 이미 오래전에 뛰어넘은 부분이다. 많은 경험을 가진 스태프들이 자신들의 역할과 책임을 철저하게 완수하면서 일 년에 3백여 편의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일본 영화계다. 언제 어디서든 안정된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일본 영화의 큰 장점이다. 작은 영화라도 결코 허술하지 않고, 오히려 대작보다 치밀하고 감독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난 ‘단단한’ 영화를 만들어낸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박치기>, <스윙 걸스> 등은 일본에서 소위 ‘단관영화’라고 부르는 영화들이다. 단관영화가 무엇인지 말하기 전에, 일본 영화계에 대한 사전 지식 하나. 일본 영화계의 메이저는 도호, 도에이, 쇼치쿠다. 메이저에 근접한 영화사로는 가도카와가 있고, 나머지는 독립제작사로 취급된다. 일본 영화계는 1960년대 후반부터 극심한 침체에 빠져들었는데, 메이저 영화사에서는 이후 자체 제작을 거의 하지 않았다. 메이저 영화사는 <남자는 괴로워> 등 흥행이 보장되는 시리즈 영화들을 주로 만들었고, 수입영화나 독립제작사가 만든 영화를 배급하는 것으로 돈을 벌었다. 제작과 배급, 극장을 독점한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가 자체 제작을 상당 부분 포기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독립제작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독립제작사들은 자체적으로 저예산 영화를 만들고, 메이저가 아닌 독자적인 배급망을 통해 영화를 개봉했다. 관객이 꾸준히 드는 영화들은 하나의 극장에서 몇 개월씩 상영하면서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러브 레터> 역시 단관상영으로 관객의 사랑을 받은 영화다. 일본의 단관영화는, 독자적인 박스오피스를 집계하는 등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단관영화는 반드시 예술영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 다수가 아닌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한, 즐겁고 재미있는 영화들도 포함된다. 아니, 오히려 그런 영화가 더 많은데 <스윙 걸스>가 대표적인 경우다.

일본에서는 매년 3백여 편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평균 70여 편을 만들고 있는 한국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다. 3백 편이라는 숫자는 그저 많은 양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대만처럼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지 않으면서도 양덕창, 후 샤오시엔, 채명량 등의 거장이 줄지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수많은 범작과 졸작들 틈바구니에서 걸작들이 나오는 법이다.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치고, 자기만의 것을 키워나가면서 걸작이 탄생한다. 할리우드도 마찬가지고, 일본 영화도 마찬가지다. 할리우드나 일본도 수많은 졸작과 범작이 있다. 하지만 그 졸작과 범작들 역시 하나의 토대가 되고, 다양성을 말하는 지표가 된다. 누구나 알고 있는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단관에서 상영되는 수많은 영화들이 일본 영화의 다양성과 힘을 말하는 것이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공존만이 아니라 메이저 영화와 싸구려 영화의 공존은 영화산업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일본에는 그런 다양한 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한동안 침체되어 일본 영화인 스스로 ‘일본 영화는 비주류’라고 자조하기도 했지만 최근 2, 3년 사이 일본 영화는 확연한 상승세에 있다. 지난해 흥행 20위 중에서 일본 영화는 무려 9편에 달한다.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포켓몬스터>, <춤추는 대수사선>의 극장판 2편 그리고 <나나>, <전차남>, <북의 영년>, <망국의 이지스>, <로렐라이>다. 그런데 이 영화들 중에서 정말 재미있고, 사회적인 의미도 보여주는 영화는 <나나>와 <전차남>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과거의 영광에 기대는 복고적 영화거나 뻔한 공식으로 만들어진 블록버스터다. 여전히 일본 영화의 힘은 작은 영화들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다.

일본 영화에는 무정부적이고 폭력적인 영화의 장인 미이케 다카시(<오디션>)와 커뮤니케이션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작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아무도 모른다>)가 있고, 인간의 원초적인 어둠 속에서 희망을 끌어내는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큐어>, <밝은 미래>)가 있다. 이들은 모두 비주류 감독이다. 최근 미이케 다카시가 메이저 영화사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기는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나 <반지의 제왕>의 피터 잭슨처럼 B급 영화를 만들다가 메이저에서 성공한 감독들처럼 여전히 비주류적인 감성을 잃지 않으면서 대작을 만들고 있다. 메이저에서, 다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망국의 이지스>의 감독 사카모토 준지는 <토가레프>, <철권> 등 액션영화의 걸작들을 만들다가 메이저에 발탁되었다. 사카모토의 전작에 비해 <망국의 이지스>는 감독만의 스타일을 찾아보기 힘들다. 주류의 공식이나 대중성이란 것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지루하고 획일적인지 실감할 수 있다.

일본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은 분명 비주류의 작은 영화들이다. 그건 감독이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예술영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비주류, 작은 영화들은 오히려 대중친화적이다. 그들은 관객을 생각하고, 관객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화를 만든다. 예술영화, 실험영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극단적인 영화들도 만들어지지만, 여전히 작은 영화들의 다수는 관객과 호흡하기 위한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영화들이다. 아직 그런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없다면, 일본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감성을 말해주는 것. 그리고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지금 일본 영화와 소설이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다.

&lt;린다, 린다, 린다&gt;, &lt;스윙 걸스&gt;, &lt;69&gt;, &lt;메종 드 히미코&gt; 등 사소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어느 대작들보다 유쾌하고 재미있다. 블록버스터들의 스크린 장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명작을 만들어내는 일본 인디영화의 `사소한 저력`, 궁금해할 때다.&lt;br&gt;&lt;br&gt;[2006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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