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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는 유효하다

누구나 창비를 기억한다. 그리고 누구나 창비를 그리워한다. 그래서 창비에 대한 기대는 오늘도 여전하다. 한때 모든 문학인의 꿈이자 소통이었던 창작과 비평사. 그런데 지금 창비의 현재는 어디쯤에 있는 걸까. <br><br>[2008년 3월호]

UpdatedOn February 22, 2008

Words 박종민(문화평론가) Editor 이지영 Photography 김지태

아아, ‘창비’는 대체 어디로 갔나? 요즘 초대형 서점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가판대는 ‘소위 가장 잘 팔리는 책’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 자리를 소설이 아닌 자기 계발서들이 메운 지 한참 되었다. ‘아침형 인간으로 살면 성공한다’를 주문처럼 되뇌던 몇 년 전부터 ‘날씬해지려고 하지 말아라. 날씬하다고 믿으면 날씬해진다’는 그럴싸한 외침이 먹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자기 계발서들이 섭렵하고 있다. ‘베스트셀러’의 뜻이 ‘잘나가는 소설책’인 줄 알았던 시절은 쌍팔년도에 끝난 것이다.
다행히 한 발 더 나아가니 이제 소설이 쌓인 가판대도 보인다. 그런데 이거 한국 소설이 아니다. <용의자 X의 헌신> <나이팅게일의 헌신> <레벨7>… 이거 추리소설들이다. 그 옆엔 <황금나침반> <붓코짱>… 아, 판타지 소설이다. 새로 번역되어 나온 따끈따끈한 책들이 많은 건 좋은데 한국 소설은 어디 없나 싶다. “한국 소설 없어요?”라고 물으니 F 코너로 찾아가라 말한다. 그래, 한국 소설은 한국 소설 자리에 가서 찾아야지, 명당자리를 차지하기엔 너무 작은 한국 소설 아닌가.
사라지는 한국 소설과 함께 아쉬워진 메이커가 바로 ‘창비(창작과 비평사)’다. ‘창비’와 ‘문지(문학과 지성사)’라는 이름이야말로 양서에 찍는 KS 마크였던 시절이 있었다. 프랑스의 갈리마르 출판사만큼은 아니어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만큼 먹어주던 때가 있던 것이다. 왜 자꾸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F 코너까지 와서 챙겨본 ‘잘나가는(?) 소설’
가판대 위에 창비 소설은 딱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공지영, 김훈, 박완서까지 대형 작가들의 책이 거나한데 이들이 가진 마크는 솔직히 생소하다. 과연 ‘출판사 전국시대’가 온 것인가. 창비의 아성은 완전히 무너진 것인가.

변하지 않은 건 늙어버렸다는 뜻인가
앞에서 말한 갈리마르 출판사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앙드레 지드가 편집장을 했을 정도로 왕년부터 유명한 곳이었다. 그리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퇴짜를 놓았던 출판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여곡절을 거쳐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이 성공을 거두었다. 프루스트는 2권을 어디서 출판했을까? 당연히 갈리마르 출판사였다. 바로 창비와 문지가
그런 존재였다. 작가라면 창비에서 소설을 내는 게 꿈이었고, 그곳과 계약이 된다고 하면 이전에 했던 계약도 취소하고 달려왔다. 하지만 이제 창비가 가졌던 ‘한국의 갈리마르’로서의 아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독자들은 이제 KS 마크에서 ‘고지식하고 답답한 책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것일까? 이제 고상한 한국 문학은 갈 길이 없다는, 혹은 무지 좁다는 뜻인가? 나 혼자 생각하기에는 버거운 주제라서 문학 관련 세미나가 끝난 후 갈 데 없어 모인 작가 A, 비평가 B, 편집자 C에게 물었다.
A는 창비에서 책 한 번 내보겠다던 작가 지망생이었을 때를 추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브랜드 네임이 약한 출판사면 계약금을 더 주게 마련인데, 꼭 그런 이유로 작가가 움직이는 건 아니지. 그보다 예전처럼 ‘어느 출판사가 이 작가에게 어울린다’ 하는 생각 자체가 없어진 것 같아. 작가의 이미지가 이젠 출판사에 고정되질 않는단 말야. 요즘은 계약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나랑 잘 맞는 편집자’니까.”
여기에 평론가 B의 분석적인 답변이 추가되었다. “민족 작가라면 창비에서 책을 낸다는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요새 누가 민족 작가이고 싶겠어? A 말도 맞네. 출판사보다 편집자 믿고 책 내는 작가 많지. 거기다 출판사 이직률이 워낙 높잖아. 같이 일하던 편집자 따라가는 작가도 많으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C의 동의가 이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대 의견이 나왔다. 그의 의견은 한마디로 ‘창비가 어때서?’였다. (참고로 그는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창비의 최종 면접에 못 간 게 평생 한이 된 비운의 사나이다) C의 말에 따르면 고용 구조가 ‘의외로’ 불안정한 출판계에서 노조까지 있는 창비는 꿈의 출판사라는 것이다. 최신 유행을 좇는 회사일수록 고용 구조가 각박하다는, 다 믿기는 힘든 푸념을 들어주다 보니 어느 새 ‘창비는 어디로 갔나’라는 주제는 ‘창비로 가고 싶어요’로 변질돼서 흘러버렸다.

창비는 변화한다, 아무도 모르게
A, B, C 너희들 말이 모두 다 맞다. A의 말대로 이제 한 출판사에 매인 작가는 없다. “누구는 등단한 출판사에서 첫 작품집을 안 내서 뒤에서 무슨 소리를 들은 모양이야. 하지만 앞에서는 말 못하지. 이젠 그런 게 흉도 아니지, 뭐”라고 하는 걸 보니 더 이상 그런 건 의리도 아닌 모양이다. 등단한 출판사에서 첫 작품집을 안 내도 되는 마당에 누가 하나의 출판사를 고집하겠는가. ‘작가는 움직이는 거야’를 외치는 시대에 No.1이 한 출판사에 고정될 이유가 없다. 창비에서만 내지 않더라도, 창비에서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요즘 작가 지망생들은 A와 달리 KS 마크가 달린 책의 이미지를 꿈꾸지 않는다. 그들의 꿈은 바로 거대한 상금을 내건 문학상들에 있다. 고상한 계간 잡지로 등단해서, 그 계간 잡지를 운영하는 고상한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길은 희미하게 잊히고 있다. 문학상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몇천만원을 내건 상들이 신진 작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신인, 신진 작가들에게 매력적인 문학상이 있다면 바로 문학동네 신인상과 한겨레 문학상일 것이다. 이들 문학상에는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바로 이들 문학상을 탄 작품이 매력적일 것이라는 독자의 신뢰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독자들은 한겨레문학상이나 문학동네 신인상을 탄 작품의 품질을 믿는 게 아니다. 창비 책처럼 질이 높을 거라고 믿는 게 아니다. 읽기 전부터 ‘치기 어린 작품일 게 틀림없어’라는 말을 듣고, 읽고 난 후에도 ‘역시 치기 어린 작품이었어’라는 말을 듣는 작품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 문학상을 탄 작품이니 읽어야 한다는 불평을 붙이면서 읽는다. ‘적어도 재미는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오래전에 상을 탄 작가들이야 이미 중견 작가가 되었으니 최근 문학동네 혹은 한겨레 문학상으로 이름을 알린 작가를 말하자면 박민규, 박현욱, 백영옥, 서진, 권리 정도가 있을 것이다. 박민규나 박현욱은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그 저력을 증명하긴 했지만, 현실적인 소재와 시간, 젊은 문화를 대변하는 모습으로 진중함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재기 발랄하다고 부르는 게 적절할 것이다. 권리는 더하다. ‘치기 발랄’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서진은 영상 언어를 옮겨놓은 듯한 새로운 감각으로 우릴 당황시키고, 백영옥은 “현실에 발붙인 대중소설을 성실하게 써서 돈 내고 책 사보기 아깝지 않게 하고 싶다”는 말을 당당하게 한다. 여기 그 누구도 진지한 작가 정신, 예술가 정신을 들먹일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누가 그런 고고한 말을 꺼냈다간 이들에게 등짝을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B의 말이 통하는 지점이다. 누가 요새 ‘민족 작가’이길 원하겠느냔 말처럼, 누가 요새 고고해 보이고 싶어하겠느냔 말이다.) 이들의 이런 화려한 젊음에 문학상은 점수를 주고, 독자는 그 고득점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모든 한국 문예 출판사가 불황인 이 시기에 문학동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치기보다는 ‘신중한 발랄함’을 선택하련다
그런데 창비는 문학상이 없느냐고? 있다. 문학상만 있는 게 아니다. 신진 작가의 작품집도 무럭무럭 나온다. ‘80년생 작가’라는 브랜드 네임이 붙은 젊은 작가 김애란의 첫 작품집도 창비에서 나왔다. 3년 전,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표지가 하도 발랄해서 창비에서 나온 책이 맞나 다시 확인할 정도였다고 A는 말했다.
그러고 보면 창비도 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알아채기가 너무 힘들긴 하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김애란만 해도 젊은 작가이긴 하지만, 박민규와 권리, 서진과는 카테고리가 다르다. 기성 문단의 인정이 전제된 작가이며, 덕분에 무리 없이 문단에 편입한 작가이다. 젊은 작가만이 부릴 수 있는 치기로 거부감을 산 적도 없다. 그 역시 젊음을 그려내지만 어딘가 모르게 안정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김애란의 두 번째 작품집은 문지에서 나왔다.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부연해서 문지 역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은근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2005년에는 배용준이 주연한 영화 <외출>을 소설로 다시 쓴 작품을 출판한다는 소식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과연 한국 문예의 전당에서 그런 대중적인 작업을’이라는 놀라움이 뒤따랐다. 하지만 과연, 문지다. 섬세한 필력으로 독자의 신뢰를 얻고 있는 중견 작가 김형경이 썼던 것이다.
결국 창비나 문지가 조금이나마 발랄해지고 대범해지는 것 같아 보여도 작가 선택이라는 기본적인 입장에서 신중함을 고수하는 것이다. 나쁘지 않다. 여기서 C의 말, “창비가 어때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국 문학이 독자의 요구, 독자와의 소통을 무시했다’ ‘독자는 재미있는 이야기, 튼실한 스토리를 원하지, 고고한 예술 정신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라는 자성에서 나온 변화는 나름대로 좋다. 하지만 열심히 지키던 제 색깔을 부정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창비마저 변한다면 오히려 통곡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창비에서 나온 신간, 천운영의 <그녀의 눈물 사용법>을 사서 돌아왔다. 이불 뒤집어쓰고 귤 까먹으면서 보고 싶은 책은 아닌데, 혼자 카페에 들러 뜨거운 녹차 한 잔 쥐어보고 싶다. 창비는 그런 브랜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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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Words 박종민(문화평론가)
Editor 이지영
Photography 김지태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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