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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소설 - 너무 많은

맛과 향이 술을 이루는 전부가 아니다. 이달 <아레나>는 다섯 명의 소설가에게 술이 환기하는 정서, 환영, 일상에 대해 짧은 소설을 써보자고 제의했다.

UpdatedOn August 08, 2013

너무 많은 한 병
Liquor : Heineken


그는 걷고 있다. 그는 위험해 보인다. 딱 봐도 화가 많이 난 것 같다. 양볼은 붉게 부풀어 있고 커다란 어깨는 경직됐다. 세 조각으로 선명하게 쪼개진 팔뚝 근육이 꿈틀꿈틀 움직였고 불끈 움켜쥔 두 주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앞을 향해 성큼성큼 걷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뒤로 크게 젖히고 소리 나게 한숨을 내쉬었다. 개운치 않은 듯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모습은 흥분을 제어할 수 없어 어찌해야 할지 몰라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성난 황소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와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고개를 푹 숙이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그를 피한 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흘낏 쳐다본다. 그는 길 한가운데 멈춰 서서 어떤 생각에 잠겨 있다.

그는 미스터 블랙. 사나이 중의 사나이, 실패를 모르는 남자, 강력한 유전자를 소유한 극강의 수컷이다. 하지만 그는 난생처음 당한 일에 혼란을 겪고 있다. 방금 전 여자에게 차였다. 이런 일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당황스러웠고 자존심에 말할 수 없는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고 동시에 엄청나게 화가 났다. 가슴에 불이 붙는 것 같았고 뾰족하고 무거운 돌덩이가 갈비뼈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제껏 이런 종류의 감정을 겪어본 적이 없던 그는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텅텅 때리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런 걸 사랑의 고통이라고 하는 건가.” 그는 감히 자신을 거절한 그 여자를 저주했다. 생각해보면 그녀를 좋아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매력적이지 않았고 그동안 자신에게 몸과 마음을 줬던 여자들과 비교했을 때 너무도 열등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여자에게 마음이 흔들리고 사랑한다고 고백까지 하다니,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종의 장난 같은 것이었다고 합리화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입술을 다물고 쓰게 웃고 말았다. 아무리 그녀를 욕하고 비웃어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을 부정할 순 없었던 것이다. 있는 것을 어떻게 없다고 하겠는가.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의 고통을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장난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답답하고 슬퍼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정면을 노려봤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더운 물로 샤워하고 꼼꼼하게 양치한 뒤 맥주 한 잔 쫙 들이켜면 이 모든 치욕이 말끔하게 씻겨 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걸음을 재촉했다.

냉장고 문을 열자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일렬로 가지런히 서 있었다. 희미한 푸른빛과 서늘한 냉기에 둘러싸인 맥주들은 그 순간 너무도 탐스러워 보였고 당장 저 중 하나의 뚜껑을 따고 들이켜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눈 녹듯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쉽게 맥주를 집어 들지 못했다. 무엇을 선택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원한 느낌만 따지면 반사적으로 녹색 병의 하이네켄을 선택했겠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만은 아니었다. 단순하게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뭐랄까 무겁고 강하고 거친 무엇인가가 목구멍을 긁으면서 씻어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는 마침내 맥주를 집어 들었다. 하이네켄 다크였다. 그것은 막 건져 올린 검은 물고기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평소에 흑맥주를 즐기지 않는 그로서는 의외의 선택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차가운 검은 액체가 몸속으로 들어간다면 끝내줄 것 같았다. 그는 병뚜껑을 따고 맥주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바로 삼키지 않고 입속에 잠시 머금었다. 밀도 높은 씁쓸한 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꿀꺽 삼켰다. 그는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껴 냉장고에 손을 짚고 비스듬히 기댔다.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위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혈관으로 흡수되어 혈액과 섞이는 기분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맥주 한 모금이 몸에 가한 영향력을 생각하면서 나머지를 두 번에 걸쳐 들이켰다. 맥주병을 비웠을 땐 자신도 모르게 낮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는 소파에 길게 누워 맥주병을 이마에 올려놓고 그녀를 생각했다. 맥주를 마시면 그녀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대신 다른 생각을 했다. 내일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다 잠들었는데 그는 잠드는 순간 몹시 짜증을 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내가 겨우 맥주 한 병에 취하다니. 겨우 맥주 한 병에.”

정용준(소설가)

EDITOR: 이우성
PHOTOGRAPHY: 안정환
ASSISTANT: 박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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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우성
Photography 안정환
Assistant 박희원

2013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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