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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내는 시간

혼자만의 시간이 중요한 나는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넷플릭스를 보면서 세상만사를 잊는다.

On March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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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서 MBTI를 주제로 한 대화가 시작됐다. 친구들은 “너는 누가 봐도 E”라든가 “나는 P라서 무계획으로 산다”, “MBTI 테스트를 하고 내가 남편과 안 맞는 이유를 알았다”는 식의 농담을 주고받았다. 아직도 혈액형에 따라 성격을 분류하는 내게 한 친구는 “4평짜리 집에서 나와 16평으로 이사하라”고 조언했다. 어쨌든 나는 먼 옛날 심심풀이 삼아 했던 MBTI 테스트 결과를 캡처해둔 사진을 앨범에서 찾아 친구들에게 전송했다(난 내가 4개의 알파벳을 못 외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반응은 “헉!” 일색. 학창 시절 왁자지껄의 대명사였던 내가 당연히 E(외향성)일 거라고 예상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ISFP라는 결과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러곤 누군가에게 나의 MBTI를 소개할 때 “유재석과 같은 유형”이라고 말하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유느님’과 MBTI가 같은 내가 ISFP의 분석 중 가장 공감하는 것은 집돌이, 집순이라는 점이다.

MBTI로 대학원 졸업논문을 쓴 친구는 온라인에서 떠도는 테스트는 신뢰도가 낮다고 했지만 어쨌든 나는 집순이다. 바깥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기분 전환을 할 때도 4시간이 지나면 집이 생각나고 여행을 떠나도 2박 3일이면 집에 가고 싶다. 매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마감한 뒤엔 어김없이 집에 혼자 있고 싶어진다. 타인의 감정을 신경 쓰거나 대화의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 없이 홀로 조용히 보내는 시간이 절실하게 그립다. 나를 예민보스로 만들었던 모든 것을 비워내는 시간을 갖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엔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20대 때만 해도 불금, 불토를 보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생각하고 매주 주말 불타는 밤을 함께 보낼 친구를 찾았다. 그런데 결혼하고 문득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졌다(남편은 잘못이 없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땐 내 방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었는데, 집안에 두 사람밖에 없는데 혼자 방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남편은 잘못이 없다). 게다가 아이까지 생기니 더더욱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내게 모두가 잠든 늦은 밤에 갖는 혼자만의 시간은 과장을 조금 보태 금보다 더 귀하다. 평소엔 아이를 재우다 함께 잠들기 일쑤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깨어 있는 마감 날이 최적의 기회다. 신혼 초 “먼저 자”라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늦게 귀가하는 나를 기다렸던 남편은 이제 내가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을 존중한다.
아무튼 혼자만의 시간은 마감 후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시작된다. 그날만큼은 노래도 틀지 않고 외곽순환도로의 고요함을 즐긴다. 집에 도착해 목욕재계하고 간단한 안주를 준비한 뒤 소파에 앉아 맥주 캔을 딸 때 쾌감을 느낀다. 캔 뚜껑을 딸 때 들리는 경쾌한 소리와 맥주를 컵에 따를 때 울려 퍼지는 탄산의 상쾌한 소리가 적막한 거실을 가득 채우는 순간이 좋다. 시원한 ‘소맥’을 들이켜 머리가 띵할 때 싱싱한 회나 마른안주를 먹으면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기분이다.

그렇다고 너무 조용하면 술맛이 나지 않기에 넷플릭스에 접속해 그날 기분에 맞는 적당한 콘텐츠를 고른다. 요즘엔 집중하지 않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장르가 좋다. 주로 화제작을 보는데 이도 저도 아닐 땐 <해리포터> 시리즈나 <스위트홈>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다시 본다. 주변 육아 동지들이 교육을 이유로 거실 TV의 존폐 여부를 고민하던 때 내가 “TV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외쳤던 것은 바로 이 순간 때문이다. 이렇듯 내 안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나면 비로소 나를 다시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CREDIT INFO

에디터
김지은
일러스트
킨주리
2022년 04월호

2022년 04월호

에디터
김지은
일러스트
킨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