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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리고 여자

세상을 바꾼 여자,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사람들이 기존 법만 철석같이 믿고 살았으면 여자들은 아직 신용카드도 못 만들 거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같은 영웅들이 세상을 바꾼 거다.

On July 2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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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건 낙태법 위헌 소송 때다. 그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자 자유주의의 수호자, 낙태법을 비롯한 각종 성차별 법과 싸운 주인공이다. 그는 “여성 대법관이 몇 명이면 만족하겠느냐”는 질문에 “9명 전부”라고 답한 적이 있다. 중요한 자리가 전부 남자에게 돌아갈 때 이상한 걸 못 느꼈다는 사실이 얼마나 이상한지 되물은 거다. 미국에선 이전에도 ‘RBG’란 이니셜로 불릴 만큼 유명했지만 최근 자유주의 진영의 위기감과 페미니즘 열풍이 거세지면서 대중문화계가 더욱 크게 그를 호명하고 있다.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와 극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이 연달아 제작됐다. 그중 <세상을 바꾼 변호인>이 한국에서 개봉할 때 작은 논란이 있었다. 미국판 포스터에선 주인공 얼굴 주변에 ‘영웅적인, 리더, 변호사, 행동가, 정의, 영감을 주는, 훌륭한’ 등이 쓰여 있는데, 한국에선 ‘러블리한 날, 독보적 스타일, 진정한 힙스터, 핵인싸, 데일리 룩, 포멀한 날, 꾸.안.꾸한(꾸민 듯 안 꾸민) 날’ 등으로 바뀐 거다. 관객들이 항의하자 배급사는 재빨리 포스터를 내리고 사과했다. 하지만 실수라고 웃어넘기기엔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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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주인공의 패션이 눈요기가 될 정도로 예쁜 건 사실이다. 영화는 그가 대학에 다닌 1950년대부터 첫 재판에서 승리한 1970년대까지를 그린다. 패션에서 최근 유행하는 소위 ‘뉴트로(뉴+레트로, 복고풍을 지향한 새로운 것)’의 고향이라 할 만한 시기다. 실제 긴즈버그도 옷을 잘 입는다. 특유의 스타일 덕분에 팬시 상품에 캐리커처로 등장할 정도다. 하지만 그게 포인트가 아니다.

영화 첫 장면, 정장을 입은 한 무리 남자들이 보무당당하게 행진한다. 하버드 법대 입학식이다. 그해 신입생은 500명, 그중 여자는 9명이었다. 법대 학장은 여학생들에게 묻는다. “남자들한테 가야 할 자리를 빼앗은 이유가 뭐지?” 여자라고 발표 기회도 안 주는 교수에게 실력으로 인정받으며 재미를 붙여갈 무렵, 새로운 난관이 닥친다. 하버드 법대를 다니던 남편이 병으로 쓰러진다. 주인공은 자기 공부, 간병, 육아에 남편 공부까지 대신 해준다. 정작 그 남편은 졸업 후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는데, 루스 베이더는 여자라는 이유로 열세 번이나 면접에 떨어지고 차선으로 교수가 된다. 유능한 여자들이 사랑과 가정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배은망덕한 남편은 저 혼자 성공한 줄 알고 기세등등한 스토리를 현실에서도 많이 봤다. 하지만 이 집안은 달랐다. 남편은 루스 베이더가 성차별 법을 파고드는 동안 가사를 도맡고, 아내의 연구가 실제로 적용될 수 있는 소송을 발견해 교수에서 변호사로 변신하게 돕는다. 성공한 남자들은 당연한 듯 받는 내조인데, 여자들이 얼마나 내조를 못 받으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다 이 남자에 감동한다.

영화 후반부의 핵심은 남편이 그녀에게 맡으라고 권한 문제의 사건이다. 의뢰인은 병든 노모를 돌보는 비혼 남성인데, 남자라는 이유로 간병에 따른 세금 공제를 못 받는다.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을 한다’는 차별 때문이다. 극적 효과를 위해 과장하긴 했겠으나 그 재판에서 루스 베이더는 멋진 역전승을 거둔다. 재판부가 관행에 연연할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 능동적으로 사회 정의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은 극 중 재판관들의 굳은 머리를 깨우친다. 주변에 법조인이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가서 보여주고 싶은 영화다.

이런 영화를 보고 패션 얘기를 먼저 하는 건 달을 보라고 손으로 가리켰더니 “반지 예쁘네요” 하는 식이다. 여자들은 법보다 패션에 관심이 많을 거란 편견, 여자를 소개할 땐 외모 얘기나 하는 게 어울린다는 착각은 정작 루스 베이더가 평생 싸운 성차별에 가깝다. 그는 최고의 지성인이고 슈퍼 히어로다. 모든 인간이 그렇게 될 순 없다. 하지만 자기 시대와 사회에 관심을 갖고, 사람들이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정도는 인식하고 살아야 중간은 간다. 안 그랬다간 평생 편견과 싸운 사람 얼굴에 편견을 끼얹는 무례를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글쓴이 이숙명

칼럼니스트. 영화 잡지 <프리미어>, 여성지 <엘르> <싱글즈>에서 기자로 일했다. 펴낸 책으로 <패션으로 영화읽기> <혼자서 완전하게> <어쨌거나 뉴욕> 등이 있다.

CREDIT INFO

에디터
하은정
이숙명(영화 칼럼니스트)
사진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스틸 컷
2019년 07월호

2019년 07월호

에디터
하은정
이숙명(영화 칼럼니스트)
사진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스틸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