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카카오 스토리 인스타그램 네이버 포스트 네이버 밴드 유튜브 페이스북

통합 검색

인기검색어

HOME > ISSUE

ISSUE

신뢰를 가장한 탐욕, 그루밍 성범죄

‘<무한도전> 전문의’로 통하며 스타 의사 반열에 올랐던 김현철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성폭행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그루밍 성범죄’다.

On July 23, 2019

3 / 10
/upload/woman/article/201907/thumb/42372-377152-sample.jpg

 


MBC 예능 <무한도전> 등 각종 방송에 출연해 얼굴을 알리며 스타 정신과 의사가 된 김현철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김현철 원장은 지난 2017년 SNS에서 배우 유아인을 급성 경조증으로 진단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번엔 그루밍 성범죄다. 김 원장이 의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피해자들에게 호감을 얻고 돈독한 관계를 만든 뒤 이들을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에서 성폭행을 했다는 것.

지난 5월 방송된 MBC <PD수첩>에서 환자 A씨는 "김 원장이 갑자기 제의한 일본 여행을 따라갔다가 성폭력을 당했다. 눈을 떠보니까 김 원장이 내 옆에 누워 있었다. 누워서 나를 안은 채 몸을 만지고 있더라. 내가 여기서 싫다고 하면 이상해질 것 같고, 치료에도 영향을 줄 것 같았다. 이후에도 그가 여러 차례 성관계를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A씨의 주장은 꽤 구체적이었다. "만나면 모텔이나 호텔로 가기 바빴다. 김 원장과의 모든 만남에는 성관계가 포함됐다. 내가 이상해서 '나를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냥 잠자리 대상이냐'라고 묻기도 했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까 봐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또 다른 환자 B씨는 자신이 김 원장에게 호감을 표시하자 그가 곧바로 성관계를 언급했다며, 치료 기간 3년간 다섯 번 이상 성관계를 가졌다고 전했다.

이에 김 원장은 오히려 환자들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폭력은 여자분이 당하기도 하지만 반대일 수도 있다. B씨는 항상 마지막 진료 시간에 예약했다. 퇴근해야 하는데 뭔가 일을 낼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거절하고 싫은 내색을 드러냈는데 달라붙은 건 두 분이다"라고 호소했다.

그루밍 성범죄란?

'그루밍(grooming)'은 본래 주인이 자신의 취향대로 반려동물의 털을 손질하거나 몸단장하는 것을 뜻한다. '그루밍 성범죄'란 주인 마음대로 동물을 길들이는 행위에서 착안한 용어로, 가해자가 피해자와 신뢰 관계를 형성한 뒤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뜻한다. 본래 어린이나 청소년을 정신적으로 길들인 뒤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가리켰는데, 최근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그러한 관계를 일컫는다.

2016년 유명 심리 상담가가 여성 내담자들과 성관계를 맺으며 촬영한 동영상을 타인에게 보낸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된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 인천 한 교회의 청년부 목사는 여성 신도 4명을 10대 때부터 장기간 성폭력했다는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해당 목사는 가정적인 문제를 겪는 사춘기 소녀들에게 접근해 "내가 너의 보호자다. 너를 책임지겠다"는 등의 말로 신뢰를 쌓은 후 성관계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국민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던 '조재범 성폭행 사건' 역시 그루밍 성범죄다. 만 6세부터 10여년 간 조재범의 지도를 받아온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는 만 17세부터 4년간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심석희는 "조 전 코치가 범행을 할 때마다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없느냐'고 협박했다"고 털어놨다. 부모와 떨어져 합숙 생활을 하는 운동선수의 특성상 코치는 보호자를 자처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정신을 지배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엔 디지털 그루밍 성범죄도 증가하고 있다. 채팅을 통해 아동에게 접근해 호감을 산 뒤 아이들을 멋대로 조정하는 것. 성적인 대화를 하거나 누드 사진을 얻어내 유통하고, 때론 직접 만남까지 시도한다.

그렇다면 그루밍 성범죄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루밍 성범죄에는 단계가 있다. 피해자를 고르고, 신뢰를 얻고, 욕구를 채워준 뒤 피해자를 고립시킨다. 그리고 관계를 성적으로 만들고 피해자를 통제하면서 서서히 길들인다. 피해자가 처한 상황이나 심리를 이용하는 것인데, 아동 학대나 학교 폭력의 피해자, 심리적 불안을 겪는 이들이 범죄에 노출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약점을 가감 없이 털어놓다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의존하게 된다. 이를 '전이 현상'이라 부르는데,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상대를 부모 혹은 연인처럼 느끼기도 한다. 이 과정에 다다르면 대다수 피해자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나이가 어릴수록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더 어렵다.

무혐의·무죄 판결 다수

관련 성범죄는 점점 늘어나는 데 비해 처벌 기준은 미미한 상태다. 그루밍 성범죄 성립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 가해자가 피해자와 연인 사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자신이 지도하는 선수가 초등학교 2학년일 때부터 6년 동안 강간하고 강제 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골프 코치는 피해 아동에게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교육했다고 알려졌다.

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이현숙 소장은 "아이들은 신뢰하는 어른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때로는 커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성관계를 갖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부분의 가해자는 아이들의 호감을 이용해 성 접촉을 시도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마음과 성관계에 동의하는 것을 혼동하게 만든다"고 밝혔다.

이처럼 그루밍 성범죄의 경우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보일 가능성이 커 가해자가 위계 및 위력을 행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어렵다. 또 성적 자기 결정권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데, 국내에서는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이를 13세로 규정한다. 이에 대해 이현숙 소장은 "자기 결정에 대해 책임지는 연령의 기준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투표권이나 근로권 등이 주어지는 나이에 비해 법적으로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갖는 나이가 터무니없니 낮다"고 말했다.

영국, 성관계 제안만 해도 최소 10년 징역

최근 더불어민주당 신창현 의원이 그루밍 성범죄를 가중 처벌하는 의료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의료인이 자신에게 진료받는 환자를 대상으로 저지른 성폭력 범죄,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에 대해 형량의 2분의 1까지 가중 처벌하는 내용이다. 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진료받는 환자를 간음 또는 추행하는 경우에는 형법의 '미성년자의제강간죄'에 준해 처벌하는 내용을 신설했다. 검찰 역시 기준 강화에 나섰다. 절대적 복종 관계에서의 성범죄는 최고 징역 10년까지 구형할 수 있던 것에서 최대 징역 15년까지 형량을 가중해 구형할 수 있다. 또 문화·체육·예술계 등 절대적 복종 관계에 있는 지도자가 제자 등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를 경우 6개월~1년 형에서 3년 형으로 가중해 구형하기로 했다. 특별 가중 요소가 있으면 상한의 50%를 가중, 최대 7년까지 더해 구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더 엄격한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루밍 행위만으로 처벌할 수 있는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것. 영국은 지난 2003년 일명 '그루밍법'을 만들었다. 채팅 앱 등을 통해 성인이 만 16세 이하 청소년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모든 행위를 최소 10년 이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만나지 않고 대화를 통해 성관계 제안만 해도 처벌을 받는다. 캐나다는 피해 학생들이 자신도 고소당할까 봐 두려워하지 않도록 성 착취 행위를 한 가해자만 처벌한다. 아동·청소년에 대해 '성매매'라는 말 대신 '아동 성 착취(child sexual exploitation)'라는 표현만 사용하며, 16세 미만 아동·청소년이 설령 자발적으로 '동의'했더라도 '진짜 동의'로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진료 환자가 정신과 전문의와의 성관계에 동의했더라도 이를 성적 착취로 보고 해당 전문의를 처벌하고 있다. 이는 의사와 환자의 특수 관계에서 환자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법률로 보호하려는 목적이다. 한편 김 원장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치료받던 환자를 성폭행한 혐의(피감독자 간음죄)로 입건된 상태다. 또 최근 성폭행 혐의와 환자에게 사생활 공개를 협박한 혐의 등이 불거지며 지난해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제명됐다.

우리 아이, 어떻게 보호할까?

Q 부모가 자녀의 '그루밍 성범죄' 피해를 의심할 정황은?
부모에게 감추는 것이 있거나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다. 용돈보다 많은 돈을 쓰는 경우도 징후 중 하나다. 부모는 아이가 온·오프라인에서 접촉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또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살펴봐야 한다.

Q 자녀를 온라인 그루밍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어려서부터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거나 부모에게 비밀로 한 채 만남을 제안하는 것에 대한 주의를 심어줘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경우 보호자에게 알리도록 교육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억압자가 아닌 격려자이며 상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Q 아이가 온라인 그루밍을 당했을 경우 부모로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나?
정서적으로는 부모님이 내 편이고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중요하다. 부모는 수사나 상담이 아닌 아이를 지지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증거를 확보하고 경찰 및 상담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 상담 기관은 수사 과정에서 아이가 힘들어하지 않도록 지원도 한다.

CREDIT INFO

에디터
김지은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도움말
이현숙(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소장)
2019년 07월호

2019년 07월호

에디터
김지은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도움말
이현숙(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