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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도시

작가들의 인생도시 #발리

On July 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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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 눌러산 지 2년쯤 되다 보니 처음의 설렘은 잊은 지 오래다. 첫 6개월은 우붓에서, 다음 1년 반은 이웃 섬 누사페니다에서 지냈다. 요즘 나는 시골 사람이 읍내에 장 보러 가듯 발리에 간다. 여행자들이 쿠타 해변에서 서핑하고, 스미냑에서 쇼핑하고, 창구에서 힙스터 카페를 찾아다니고, 우붓에서 요가를 할 때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6차선 대로를 누비며 쇼핑하고 에어컨 바람 팡팡 나오는 몰에 간다. 평소 못 먹는 중식이나 일식을 먹고,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보고, 식료품을 사고, 치과·휴대폰 수리점·전파사에 간다. 그러다 보니 내가 왜 여기 사나 잊어버릴 때가 많다. "어쩌자고 이렇게 매연 많고 시끄럽고 걸어 다닐 수도 없고 무질서한 동네까지 흘러온 걸까" 한탄도 한다. 그래서 막 도착한 여행자들이 눈을 반짝이며 신선도 100%의 사랑을 고백하면 0.1초 정도 어리둥절해져서 눈을 끔뻑인다.


사누르에는 은퇴 후 조용히 살러 온 부유한 서양 노인이 많다.
그래서 인터넷 리뷰어들의 타깃이 되는 겉만 번드르르한 '핫 플레이스'가 아니라 '정통' '내공'이란 말이 어울리는 식당이 많다.

2년 전 밤 비행기로 처음 발리에 도착해 정신없이 체크인을 하고 '이게 잘하는 짓일까?' 고민할 새도 없이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문을 나서자 정글의 신선한 공기가 몸 안 가득 퍼져나갔다. 나는 숙소에서 나가 갈색 타일을 얹은 단층집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 골목을 지나, 코코넛 숲을 지나, 벼를 베어낸 평평한 논 사이로 길게 뻗은 농로를 지나 이웃 마을로 건너갔다. 저희끼리 뛰놀던 동네 아이들이 나를 보곤 신기한 듯 "할로, 할로(Halo, Halo)!"('Halo'는 'Hello'의 인도네시아식 표현)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할로" 하고 응답하자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달아났다가 다음 골목에서 나타나 또 "할로, 할로!" 손을 흔들었다.

하늘은 높고 파랬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맑고 가볍고 서늘한 것이 조금씩 내 안으로 고여들면서 도시의 독소를 밀어내는 기분이었다. 발리와 사랑에 빠진 이방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영적인, 마법 같은, 사람을 사로잡는, 자연과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 바로 그건지 모른다. 그 논둑길이 내 인생의 고된 한 시절에 맞닥뜨린 '차원의 문' 같은 게 아니었을까? 첫날 밤 그 앞에서 택시를 세우고 불빛 하나 없는 저 길 너머에 호텔이 있을 리 없다고, 여기가 아닌 거 같으니 돌아가자고 기사에게 떼를 쓴 건 그곳이 자기 자리가 아니란 걸 알아본, 내게 들러붙어 있던 '도시 유령'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 문을 열어젖힌 뒤,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날이 덥네, 관광객이 많네, 물건 살 데가 없네 불평을 하다가도 다시 이 섬이 사랑스러워진다. 그곳은 우붓 외곽의 멩귀(Mengwi)라는 마을이었다.

여행자에서 거주자로 생활이 달라지니 도시를 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여행지 특유의 들뜬 분위기에 지친 그들이 공통으로 추천한 지역은 사누르다. 발리 동쪽, 누사페니다로 가는 항구가 있는 마을이다. '이거 완전 실버타운 아냐!' 마을의 번화가라야 3km 남짓한 2차선 도로를 끼고 작은 카페와 슈퍼마켓, 부티크들이 늘어선 게 전부였다. 작고 조용하고 나른하고 더운 곳이었다. 솔직히 지루했다. 하지만 누사페니다에 살면서 한 달에 두세 번씩 발리에 나올 때마다 거점으로 이용하다 보니 지금은 어디보다 정감 가고 즐거운 곳이 됐다. 이탈리아 레스토랑 마시모(Massimo), 인도 음식점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Gateway of India), 브런치 카페 스퀘어 원(Square One) 등 내가 발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식당이 여기 다 모여 있다. 매달 마지막 주 열리는 '사누르 일요 마켓(Sanur Sunday Market)'에선 발리 전역의 인기 있는 오가닉 숍과 로컬 디자이너 제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긴 휴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발리에 여전히 아늑하게 숨어들 곳이 많다는 점은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다. 우붓 외곽 덜 알려진 마을에 숙소를 잡고, 비 오는 날엔 북쪽 화산 지대의 신비로운 안개를 경험해보고, 사누르에서 맛있는 것도 좀 먹으면서 빈둥거리다 보면 인생이 좀 초록초록하게 보일 거다. 우리 인생에도 때로 광합성이 필요하고, 발리는 그걸 위해 신이 마련해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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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에디터
하은정
이숙명(칼럼니스트)
사진
칼럼니스트 제공, 하은정, 게티이미지뱅크
2019년 07월호

2019년 07월호

에디터
하은정
이숙명(칼럼니스트)
사진
칼럼니스트 제공, 하은정, 게티이미지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