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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게 설경구

On May 22, 2019

가볍지 않은 소재를 다룬 영화라고 특별히 다르게 연기하진 않았다. 조심스러웠지만 우리 모두의 이야기처럼 자연스럽게 다가가고자 했다. 배우 설경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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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천만 배우’ ‘충무로 다이어트 신’ ‘지천명 아이돌’. 관련 없어 보이는 이 수식어들은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바로 배우 설경구다. 그는 “비겁한 변명입니다”라는 명대사를 남긴 영화 <실미도>로 국내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의 주인공이 됐다. 다이어트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는 작품마다 자유자재로 몸무게를 조절한다. <역도산>에서 몸무게를 28kg 늘렸다다 차기작인 <공공의 적2> 촬영을 위해 원래 몸무게로 복귀했고, 이후 <사랑을 놓치다>에서 6kg을 감량했다가 <그놈 목소리>에서는 다시 10kg을 감량했다.

충무로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로 자리 잡은 설경구에게 최근 새로운 별명이 생겼으니 바로 ‘지천명 아이돌’이다.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에 출연하면서 얻은 수식어인데, 포마드 헤어스타일에 완벽한 핏을 자랑하는 슈트를 입은 그는 섹시함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의 생일을 기념해 영화관에 ‘설경구관’이 생기고, 강남역에는 초대형 축하 광고가 걸렸다. 지난해엔 1,000석 규모의 팬미팅을 열기도 했으니, 이쯤 되면 영락없는 아이돌이다.

팝콘 같은 벚꽃이 꽃망울을 맺기 시작할 때쯤 만난 설경구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편안한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불한당>을 통해 ‘아이돌’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는데 다시 수더분해졌다며 농담을 건네는 그는 최근 개봉한 <우상>과 <생일>에서 자식을 잃은 아빠 연기로 진가를 보여줬다. 특히 영화 <생일>에서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아들의 생일날, 유가족과 친구, 이웃들이 서로 간직한 기억을 함께 나누는 이야기를 그렸는데, 아들 ‘수호(윤찬영 분)’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돌아온 아빠 ‘정일’ 역을 맡아 절절한 부성애를 보여줬다.

“정일은 참사의 당사자이면서 관찰자예요. 마치 아들의 죽음을 남 일처럼 대하며 슬픔에 서서히 접근하죠. 아들의 죽음을 지키지도 못했으면서 무슨 염치로 슬퍼할 수 있겠어요. 이제 와서 어떻게 아들을 추모할 수 있겠어요. 정일의 자책감, 그게 바로 우리의 마음인 것 같아요.”

영화에서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정일’은 초인종을 누르는 그를 보고도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는 아내 ‘순남(전도연 분)’이나 아빠 앞에서 손으로 가린 채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둘째 딸 ‘예솔(김보민)’을 그저 지켜본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수호의 방문을 열고선 눈물을 삼키고 수호와 함께 낚시를 하던 강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지만 겉으로 표현하진 않는다. 설경구는 천천히 사건의 중심으로 다가가는 정열을 섬세하게 표현해 관객들의 감정을 서서히 달아오르게 한다.

“시나리오를 보고 생긴 첫 궁금증이 ‘왜 3년 뒤에 아빠를 돌아오게 했을까?’ 였어요. 의도적인 설정이었어요. 5년이라 시간이 흐르면서 참사를 잊은 사람도 있고 애써 잊으려는 사람들도 생겼잖아요. 그런 분들이 거부감 없이 영화에 스며들도록 하는 장치였죠.”

결국 출연했지만 제안을 받았을 땐 거절할 생각이었다. 소재도 소재였지만 제안 당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시선이 걱정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영화 <우상> 촬영 스케줄이 길어져 스케줄 조절이 어렵기도 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제작사 대표님이 시나리오를 건네며 일주일의 시간을 주길래 거절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고 나니 오로지 ‘해야겠다’란 생각만 들었고 어떤 이유도 저를 설득할 수 없었어요.”

세월호 참사를 만든 어른으로서 책임감이 작용했을까?
이 질문에 그는 “울컥해서 말하지 못하겠어요”라고 답했다.

“멋있는 말을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 않아요. 사고가 발생하고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사고는 계속 발생하잖아요. 어떤 책임을 갖고 있다고 말해도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결심을 굳힌 것은 ‘위로를 하는 데 시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종언 감독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첫 장편 영화를 선보인 이종언 감독은 이창동 감독의 연출부 출신으로, 2015년부터 안산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유가족을 만나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감독님은 단단한 사람이에요. 데뷔작으로 위험 부담이 있는 소재를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죠. 시나리오를 읽고 감독님이 이야기를 잘 풀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출연을 결정하기 전이었지만 믿음이 생겼죠.”

영화에는 감독이 유가족에게 들은 실화가 등장한다. 현관 앞 고장 난 센서등이 아무런 기척 없이 켜질 때면 아들 수호가 왔다 갔다고 생각하는 순남이나 비어 있는 수호의 여권에 출입국 도장을 받기 위해 출입국관리소를 찾아간 정일의 모습이 그렇다.

“센서등 장면은 여러 유족이 같은 생각을 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출입국관리소를 가는 장면도 실화예요. 유족들의 실화가 담겨 있어서 연기할 때 계산적으로 하지 말자고 되뇌었어요.”

설경구는 아들의 여권을 들고 출입국관리소를 찾아가는 장면의 촬영을 마치고서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이 장면뿐만 아니라 촬영 내내 “컷” 소리가 나면 구석에서 펑펑 눈물을 흘렸단다.

“제가 눈물이 많은 편이에요. 유가족들이 어떤 심정일지 짐작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유가족 시사회 때 유가족분들을 처음 뵈었는데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죄송스러웠어요. 제가 그런 말을 들어도 되는지 모르겠더군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아들 수호의 생일날이다. 아들이 떠난 그날에 시간이 멈춰 생일 모임을 거부했던 순남은 정일과 예솔, 지인들의 권유에 마음을 열고 수호의 생일 모임을 갖는다. 수호의 가족과 이웃, 지인들은 다 같이 모여 음식을 나눠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울고 웃는다.

“촬영 전에 유튜브에서 생일 모임을 찾아봤는데 아버지들의 얼굴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어요. 어머니들도 버티다가 어느 순간 무너졌는데 아버지들은 눈이 빨개지는데도 끝까지 참으시더군요.”

생일 모임 장면은 50~60명의 배우가 함께 30분 동안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촬영한 장면이다. 극에서 정일의 조카로 나오는 초등학교 2학년의 아역 배우는 큰대자로 누워서 통곡하기도 했다.

“해본 적 없는 묘한 경험이었어요. 카메라가 누구를, 어디를 찍는지 모르니까 어느 누구도 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집중해 연기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수호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제 감정이 터져버렸어요. 참고 참다가 썩은 게 터져 나온 느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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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슬픔을 외면할 줄도, 정면 돌파할 줄도 몰라요. 그저 견딜뿐이에요.
우리에게 언제 상처가 올지 모르고 피할 수도 없잖아요. 어차피 내게 온 상처라면 고통스럽지만 견뎌야죠.

‘지천명 아이돌’이 말하는 아이돌

설경구는 <생일>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함께 울고 위로해주는 이, 가시 돋친 말을 하는 이들과 무관심한 이까지. 다양한 ‘우리’의 모습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는 것. 따라서 영화를 보기 전에 편견을 갖지 않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인 그는 실제로 편견을 지양한다. <생일>에서도 유가족에 대한 선입견이 생길까 봐 유가족 시사회 때까지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임시완을 비롯해 설현 등 아이돌 출신 배우와 호흡을 맞춰온 그는 ‘연기돌’에 대한 선입견도 없었다.

“저는 시완이나 현이(그는 설현을 현이라고 불렀다)를 아이돌 출신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같이 영화를 하고 작품을 하면 배우고 동료죠.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제 딸로 출연한 현이는 배우로서 고민을 하고 연기를 잘하려고 노력해요. 연기에 대한 욕심도 있고요. 당시 언론 시사회가 끝나고 현이가 기자들에게 호평을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기분이 좋아서 ‘현이를 그렇게 표현한다고!’라며 소리를 질렀어요. 현이가 제 목소리에 깜짝 놀랐죠.”

<불한당>에서 ‘끝장 브로맨스’를 보여준 임시완과는 더 친밀하다. 설경구는 바쁜 스케줄임에도 최근 전역한 임시완을 축하하기 위해 전역 당일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가 하면, 기계치인 그가 매니저에게 부탁해 소속사 공식 SNS 계정에 임시완의 전역을 축하하는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오늘 인터뷰 자리에 부은 얼굴로 나올 수 없어서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어요. 예의 바른 청년인 시완이는 <불한당> <원라인> <왕은 사랑한다> 팀에게 전역했다고 연락을 하더군요. 시완이는 모든 사람을 꾸준히 챙기고 만나는 친구예요. 같이 술을 먹으면 다음 날 오후 3시에 전화를 걸어 잘 들어갔는지, 해장은 했는지 안부를 물어요. 그런 친절이 몸에 배었죠.”

아이돌과 우정을 쌓는 설경구는 50살에 팬미팅을 여는 ‘지천명 아이돌’이 됐다. <불한당>을 보고 그에게 빠진 팬들에게는 ‘불한당원(<불한당> 팬들을 지칭)’이라는 애칭까지 생겼다. 최근 그가 촬영한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의 막내 스태프도 ‘불한당원’이었을 정도로 20~30대 여성 팬들이 늘어났다.

“왜 저를 아이돌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팬들이 저의 좋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해요.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팬들을 보며 책임감이 생겼는데 한편으론 조심스럽기도 하죠. 작품을 선택할 때 고민이 돼요. 매번 <불한당> 속 캐릭터와 같은 모습을 보여드릴 순 없지만, 제가 선택한 작품을 팬들도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설경구는 지금까지 연기를 하는 게 ‘복’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기회가 온다면 더 겸손하고 당당하게 연기하고 싶다고. 그에게 이런 힘을 주는 것은 열광적인 팬들이다.

“팬들의 사연을 들으면 뭉클한 이야기도 많아요. <불한당>을 보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분도 있거든요.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우울증에 빠져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영화를 보고 팬이 되고, 영화 행사에 참여하면서 힘을 얻으셨다고 해요. 그분에게 오히려 제가 위로를 받았어요. 영화로 힘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인터뷰에서 드문드문 등장했던 단어는 ‘위로’였다. <생일>을 통해 우리 이웃을 위로하고 싶었고, 그로 인해 상처가 아무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듯했다. 설경구는 어떻게 상처를 이겨낼까. 답변은 그처럼 담백했다.

“견뎌야죠. 저는 슬픔을 외면할 줄도, 정면 돌파할 줄도 몰라요. 진부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가 언제 올지 모르고 피할 수도 없잖아요. 어차피 내게 온 상처라면 고통스럽지만 견뎌야죠. 유가족들은 ‘살아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상처가 남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려고 하시는 거죠. 영화를 촬영하며 그분들의 마음을 느꼈고 오히려 제가 위안을 받았어요. 그분들에게도 제 마음이 전달됐길 바랍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설경구는 스마트폰을 꺼내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 속엔 입대 전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임시완이 있었다. 임시완을 비추는 거울을 통해 설경구의 모습도 보였는데, 설경구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그려져 있었다. 얼마 전 사진 속의 리본을 발견하고 신기했었다고. 잊지 않으려는, 기억하려는 자신만의 작은 방식이란다. 담백하지만 진솔한 설경구다.

가볍지 않은 소재를 다룬 영화라고 특별히 다르게 연기하진 않았다. 조심스러웠지만 우리 모두의 이야기처럼 자연스럽게 다가가고자 했다. 배우 설경구의 힘이다.

Credit Info

에디터
김지은
사진제공
씨제스엔터테인먼트

201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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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지은
사진제공
씨제스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