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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 기행 24

도스토옙스키의 수호천사 안나, 최후의 임무를 완수하다

On April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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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넵스키 수도원의 도스토옙스키 묘소와 참배객들.

상트페테르부르크 넵스키 수도원의 도스토옙스키 묘소와 참배객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다
- 말년의 안나를 분노케 한 스트라호프의 편지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32년이 지난 1913년 가을, 이미 67세 할머니가 된 안나는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스트라호프(1828~1896, 평론가)의 편지를 읽어보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안나는 스트라호프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죽는 날까지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 중 하나로 남편의 공식 전기까지 자진해 쓴 사람이므로 그가 쓴 편지라면 모두 좋은 이야기들이겠거니 생각하고는 "아직 못 읽어보았다"고 대답한 후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14년 여름, 안나는 모스크바의 '도스토옙스키 기념 박물관'이 보완을 위해 그녀에게 보내온 신문과 잡지들을 살펴보던 중 지인이 말했던 그 잡지(<현대세계> 1913년 10월호)를 보게 되었다. 잡지를 펼쳐 보던 안나는 스트라호프의 악의 가득한 편지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는 남편이 죽고 3년이 채 지나지 않은 1883년 11월 28일 자로 스트라호프가 톨스토이에게 쓴 것인데 도스토옙스키를 깎아내리고 비방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트라호프, 편지에서 도스토옙스키를 '악한'이라고 표현

"친애하는 레프 니콜라에비치(톨스토이), 쓸 말은 무궁무진하지만 당신께 간략하게 편지를 씁니다. (…) 저는 도스토옙스키를 좋은 사람으로도, 행복한 사람으로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본질적으로 이는 일치하는 것이니까요). 그는 악한이고 질투심이 강하고 방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그를 가련하게 여기고, 만약 그가 그토록 악의적이고 똑똑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런 그를 조롱거리로 여겼을 격동과 혼란의 시기 속에서 평생을 살았죠. 그 자신은 자기가 루소처럼 참으로 훌륭하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기면서요. 그의 전기를 쓰다 보니 이 모든 성격이 생생하게 기억나더군요. 스위스에서는 제가 보는 앞에서 어찌나 하인을 마구 부리던지 그 하인이 화가 나서 "저도 인간이란 말이에요!"라고 그에게 말했을 정도였죠. (…) 그런 장면이 그에게는 끊임이 없었죠. 자신의 사악한 심성을 억누를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가 남자답지 않게 빙빙 말을 돌리면서 느닷없이 던지는 돌출적인 말과 행동을 여러 차례 보고도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어 번은 그에게 몹시 심한 말을 하기도 했죠. 그런 심한 말에 대한 그의 반응은 보통 사람들과는 너무나 달랐어요. 무엇보다 가장 나쁜 점은 그가 그런 걸 즐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이 저지른 온갖 비열한 행위를 끝까지 뉘우친 적이 없었습니다. (…) 그가 가장 닮은 인물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 그리고 『죄와 벌』에 나오는 스비드리가일로프, 『악령』의 스따브로긴이죠. 스따브로긴이 나오는 한 장면(소녀를 겁탈하는 장면)을 카트코프가 싣지 않으려고 하자 도스토옙스키는 그 자리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그 장면을 읽어줬지요. 그는 천성이 그러함에도 달콤한 감상주의와 숭고하고 인본주의적인 공상에 대해선 무척 호의적이었어요. 그러한 공상이 그의 지향점이고 그의 문학적 음악이자 길이죠.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의 모든 소설들은 자기 정당화이고, 또한 인간의 내면에는 갖가지 추잡함과 고상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입니다. (…) 그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상상하고 자신을 주인공으로 생각했던, 그리고 자기 자신만을 자애롭게 사랑했던 정말 불행한 악인이었습니다. 나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는 그런 느낌을 이해하고 그런 것을 용서하는 법을 나는 배웠습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해서도 출구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찾을 수가, 찾을 수가 없군요!"

스트라호프는 '악인'으로 생각한 사람의 전기를 왜 썼을까?

도스토옙스키가 어린 시절 여름을 보냈던 다로보예 영지의 통나무집.

도스토옙스키가 어린 시절 여름을 보냈던 다로보예 영지의 통나무집.

도스토옙스키가 어린 시절 여름을 보냈던 다로보예 영지의 통나무집.

스트라호프의 편지는 도스토옙스키야말로 자신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악인들 그 자체라는 얘기다. 스트라호프는 자신이 그의 전기를 쓰는 동안 혐오감과 싸워야 했고, 기분 나쁜 감정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했다면서, 톨스토이에게 "이 감정에서 벗어날 길을 찾도록 좀 도와주셨으면 한다"는 부탁의 말도 썼다.

스트라호프의 편지가 잡지에 공표된 1913년은 스트라호프도 죽은 지 이미 17년이나 지난 때이고, 톨스토이가 죽은 지 3년 후이다. 스트라호프는 1828년생으로 도스토옙스키보다는 7살 아래지만 톨스토이와 동갑이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와 가깝게 지냈을 뿐 아니라 톨스토이와도 가까웠다. 문학평론가였던 그는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며 소문을 옮기는 사랑방 식객 같은 존재였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가 톨스토이와 친했기 때문에 그를 통해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했다. 물론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이야기도 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1867년 안나와 결혼 후 유럽을 떠돌며 생활할 때도 스트라호프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스트라호프는 유럽의 도스토옙스키에게 톨스토이의 신작 『전쟁과 평화』를 보내주기도 했고, 도스토옙스키는 스트라호프에게 "결혼해서 아기를 갖는 데에 인생의 행복 중 4분의 3이 있다"면서 "빨리 결혼해 가정의 행복을 찾으라"고 조언하기도 했던 사이다. 도중에 무언가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다소 벌어진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도스토옙스키가 죽는 날까지 자주 만났다. 그러므로 안나의 입장에서 볼 때, 남편의 최초의 전기를 쓴 사람이 마음속으로 도스토옙스키를 악인으로 생각하며 사실상 저주해왔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안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녀가 쓰고 있던 회고록에 스트라호프와 톨스토이 사이에 도스토옙스키와 관련해 오간 편지를 온전히 다 싣기로 했다. 톨스토이가 스트라호프에게 보낸 답장 속에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스트라호프의 비방에 직접적으로 동조하는 등의 내용은 없다. 다만, 스트라호프가 편지에서 19세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에드몽 프레상스의 책 등 두 권의 책을 톨스토이에게 보냈다고 한 데 대해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써 보냈다.

"(…) 프레상스와 도스토옙스키는 둘 다 결함을 갖고 있지요. 그래서 한 사람은 학식이 출중한데도,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지성과 동정심이 그렇게 넘치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죠. 사실 뚜르게네프가 도스토옙스키를 극복한 것은 예술성 때문이 아니라 그가 결함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지요."

내용 자체만 보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죠" 등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할 수 없다. 스트라호프는 톨스토이의 답장을 받은 후 다시 보낸 편지에서 다시 도스토옙스키를 언급한다. 여기에서 자신은 도스토옙스키 전기를 쓸 때 문학적 측면에만 집중했다면서 "도스토옙스키의 장점만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고 강조한다. 톨스토이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태도를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안나는 이렇게 스트라호프와 톨스토이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그녀의 회고록 속에 거의 다 실었다. 그러고는 그 편지를 읽은 후의 감정을 털어놓으면서 스트라호프가 쓴 편지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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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스트라호프 / 말년의 안나 / 고요히 잠든 듯한 도스토옙스키 사후 모습. 사망 다음 날 당대 유명 화가인 크람스코이가 그렸다.

 

안나, 스트라호프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끝까지 '악의 화신'이었다고 기록하다.

스트라호프의 편지를 읽고 나는 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10년 넘게 우리 가족을 찾아왔던 사람이, 남편으로부터 그토록 따듯한 대접을 받았던 사람이 거짓말쟁이였다니! 그런 더러운 중상모략을 남편에게 뒤집어씌우다니! 그런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남편과 내가 속았던 것을 생각하니, 그를 신뢰했던 것을 생각하니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나는 스트라호프가 편지에서 "글을 쓰는 동안 내내 끓어오르는 혐오감과 싸웠다"고 한 것에 놀랐다. 대체 무엇 때문에 혐오감을 느끼면서, 그리고 자신이 쓰기로 한 전기의 대상인 그 사람을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그 일을 거절하지 않았단 말인가?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발행인인 내가 전기 작가를 찾느라 애쓰는 것이 가여워서? 하지만 밀레르가 전기 쓰는 일은 자기가 맡겠다고 했었다. 물론 나중에 남편의 전기를 썼던 다른 문인들(이베르끼예프, 슬루체프스끼)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스트라호프는 편지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악한이라고 말하면서 그 증거로 남편이 급사를 마음대로 부려먹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예를 들었다. 남편은 병 때문에 가끔씩 몹시 성을 내곤 했다. 아마 그가 사다 달라고 한 물건을 늑장을 부리면서 갖다 주지 않는(급사를 '부려먹었다'고 표현할 만한 다른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인에게 고함을 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사악해서가 아니라 참을성 없는 그의 성격 때문일 뿐이다. 하인이 "저도 인간이란 말이에요!"라고 대답했다는데, 그것은 사실일 수가 없다. 스위스의 평민들은 몹시 거칠어서 화가 났다면 점잖게 항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심한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스트라호프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도스토옙스키)가 "악한"이고 "자신만을 자애롭게 사랑했다"는 (사람의) 글을 쓰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스트라호프야말로 도스토옙스키네 두 형제가 <시대>의 폐간으로 인해 처했던 끔직한 상황의 증인이다. 바로 그 자신이 쓴 졸렬한 글(「운명적 문제」) 때문에 잡지가 폐간되지 않았던가. 스트라호프가 그런 정체불명의 글을 쓰지만 않았다면 잡지는 계속 간행되어 이익을 남겼을 것이고, 미하일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의 형)가 사망한 뒤 남편의 어깨 위에 잡지 빚이 몽땅 넘어오는 그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가 그 잡지로 떠맡은 빚을 갚느라 남은 평생을 그토록 괴롭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스트라호프야말로 남편이 살아 있었을 때뿐만 아니라, 이제 밝혀졌듯이 그가 죽은 뒤에도 그에게는 악의 화신이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다.

안나는 이처럼 분노에 찬 어조로 "스트라호프는 남편에게 사후에까지 악의 화신이었다"고 말했다.

인간의 내면에는 추잡함과 고상함이 공존할 수 있다

그러면서 안나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도스토옙스키)가 어떻게 살았는지 시시콜콜 알면서 그에 대해 악한이었다고, 자기 자신만을 자애롭게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은 스트라호프로서는 지독하게 염치없는 짓"이라고 했다. 안나의 설명은 이렇게 이어진다.

"남편과 14년을 함께 살았던 내 입장에서는 그가 한없이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입증할 의무가 있다. 그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만 선량했던 건 아니었다. 불행을 겪고 실패나 재앙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는 그들 모두에게 선의를 베풀었다. (…) 얼마나 많은 노인들을 그가 양로원에 모셨던가,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그가 얼마나 애썼던가, 얼마나 많은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구해주었던가! 또 낯선 사람들이 들고 온 문서를 얼마나 많이 읽고 수정해주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비밀스러운 일에 대해 고백을 했고 또, 그가 조언을 해주었던가. 그는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시간도 노력도 돈도 아끼지 않았다. 돈이 없을 땐 어음에 서명을 해주었고, 때로는 그것 때문에 우리 가족이 해를 입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는 때때로 그가 왜 그리도 한없이 착하기만 한지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선행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고 나서는 나도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나의 말년을 우울하게 했던 이 불운한 편지 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스트라호프가 왜 이러한 편지를 쓰게 되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직업적 질투심'이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 일은 문단에서 비일비재하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도스토옙스키)가 솔직하고 신랄했기 때문에 스트라호프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도(이 부분에 관해서는 그 자신도 언급을 하고 있다) 모르며, 그래서 망인이 되었을지라도 복수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었다. (…) 스트라호프의 편지에 나온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내 생의 이 괴로웠던 일화를 마무리하겠다. "인간의 내면에는 갖가지 추잡함과 고상함이 공존할 수 있다."

노년의 안나가 이 문제를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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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로보예 도스토옙스키 자연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는 자라이스크 역사 박물관이 들어 있는 자라이스크 크렘린성 내부. 러시아에서 가장 작은 크렘린이다.

다로보예 도스토옙스키 자연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는 자라이스크 역사 박물관이 들어 있는 자라이스크 크렘린성 내부. 러시아에서 가장 작은 크렘린이다.

 

스트라호프는 추악한 신학생
- 도스토옙스키는 알고 있었다

그러면 도스토옙스키는 살아생전에 스트라호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심리 분석의 대가인 도스토옙스키가 스트라호프의 본심을 꿰뚫어 보지 못했을까? 도스토옙스키도 실은 스트라호프의 태도를 의심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죽기 7년 전인 1874년 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트라호프가 요즘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서, "그는 추악한 신학생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는 내 인생에서 나를 한 번 버렸었고, 그러니까 <시대>가 실패했을 때 말이오. 『죄와 벌』이 성공한 후에야 돌아왔소"라고 썼다. 도스토옙스키의 편지에서 보면, 스트라호프는 유명 인사와 가깝게 지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부류의 인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도스토옙스키의 전기를 쓴 것도 그러한 일종의 허영심 때문이었을 것 같다. 스트라호프는 톨스토이와 가깝게 지냄으로써 어디 가서나 톨스토이와 가까운 인물로 환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했지만, 대인 관계를 오로지 자신의 이해관계로만 계산하여 저울질하는 그런 흔한 인물 중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스트라호프가 그 편지를 통해 톨스토이에게 아첨을 하려는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내용은 도스토옙스키의 첫 번째 전기를 쓴 사람으로서는 너무 이중적이다.

안나, 도스토옙스키를 회고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받다

톨스토이 옆모습 그림.

톨스토이 옆모습 그림.

톨스토이 옆모습 그림.

스트라호프 편지 사건은 안나의 말년에 일어난 일이지만, 안나는 도스토옙스키 사후 오랫동안 '도스토옙스키를 회고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받았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조금 안다는 사람들이 써놓은 회고담이 언제나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침울하며,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을 힘들어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참을성이라곤 없으며, 모든 사람들과 언쟁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을 어떻게든 모욕하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묘사한 데 대해서도 내친김에 회고록에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모임에서 말을 별로 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는 해외에서 돌아온 이후, 더 정확하게는 1872년부터 호흡기 카타르와 폐기종을 앓았다. 엠스로 휴양을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병은 해마다 더욱 악화되었고, 폐활량은 점점 줄어들었다. 집에 있을 때조차 그는 때때로 숨이 막혀 헐떡이거나 멈출 수 없이 기침을 쏟아냈다. 그 정도로 가슴이 압박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폐의 출혈로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안나는 남편이 계단을 오를 때면 계단마다 멈춰 서서 숨을 헐떡였고, 때로는 자신에게 "빨리 가지 마. 숨을 못 쉬겠어. 꼭 겹겹이 접힌 양모 손수건을 통해 숨을 쉬는 것만 같아"라고 말하곤 했다며, 어떨 때는 3~4층까지 올라가는 데 20~25분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그녀는 도스토옙스키가 모임에 갔을 때 침울한 표정을 보인 진짜 이유는 귀족적이고 고상한 척하는 성격 탓이 아니라 그렇게 기진맥진한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간질뿐만 아니라 치질도 앓고 있었고 그처럼 폐 질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도스토옙스키의 폐 질환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안나는 회고했다. 안나는 큰 행사나 큰 예배에 자신이 언제나 남편과 함께 다닌 이유는 비좁고 숨 막히는 공간에서 남편이 간질 발작을 일으킬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안나는 스트라호프의 편지를 반박하면서 이 편지가 아니었으면 안 썼을지도 모를 이런저런 신상에 관한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았다. 안나의 그 같은 반박과 설명은 결과적으로 도스토옙스키를 이해하는 데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므로 안나의 회고록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들었다고 본다. 도스토옙스키는 생전에 안나를 종종 "나의 수호천사"라고 불렀다. 믿어온 인물이 남편을 극도로 비방한 편지를 남긴 데 대해 안나는 수호천사로서 전쟁을 치르듯 그에 대항하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최후의 임무를 다했던 것이다.

안나, 사망 50년 후 남편 곁에 묻히다

안나의 최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회고록의 마지막 페이지에 편집자가 남긴 메모를 싣는 것이 가장 정확하리라고 생각하여 아래에 그대로 인용한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1917년 여름 남부에서 심한 말라리아에 걸렸다. 그녀는 뻬째르부르그로 돌아오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녀의 몸은 질병과 궁핍으로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보기 드문 용기로 고통을 견뎌냈다. 그녀를 치료했던 의사 꼬브리기나는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를 회상하면서 "자기 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그녀는 놀라운 정신력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녀는 지칠 줄 모르는 활력과 폭넓고 예리한 지성,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을 향한 부단한 관심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그녀 자체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깊은 관심을 갖도록 했다. 그녀는 모든 일에 나이에 걸맞지 않은 열정과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노파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여간해선 볼 수 없는 완전무결한 성격을 지녔다. 또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고 증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1918년 6월 9일에 숨을 거두었고, 그곳에 있는 아우뜨스꼬예 묘지에 묻혔다. 사망 50주년이 되는 1968년이 되어서야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져 알렉산드르 네프스끼 수도원에 있는 남편의 묘로 이장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남부는 캅카스 지방이다. 안나가 병에 걸린 1917년은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300년간 제정 러시아를 지배해온 로마노프 왕조(1613~1917)가 무너진 해이다. 1917년부터 1922년까지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군과 제정 러시아 재건 세력인 백군과의 내전은 적군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국내적으로 혼란이 극심해 안나는 아들 표도르와도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안나의 사인은 급성 장염이었다. 향년 7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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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_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푸시킨 등의 초상화와 러시아 명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_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1872년 페로프 작.

좌_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푸시킨 등의 초상화와 러시아 명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_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1872년 페로프 작.

 

도스토옙스키의 후손들

아버지의 전기를 쓰기도 한 딸 류보피(1869~1926)는 1913년부터 해외에 거주했는데 1926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어려서부터 말을 좋아했던 아들 표도르(1871~1922)는 말 사육 전문가로 살다가 류보피보다 먼저 1922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이름이 같았던 도스토옙스키의 아들 표도르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하나는 일찍 죽고 안드레이란 아들만 남았다. 그러니까 안드레이는 도스토옙스키의 하나뿐인 친손자다. 안드레이는 산림 관리 기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탱크 부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라야루사, 세미팔라틴스크(현재의 카자흐스탄 세메이)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개설에 관여했다. 1968년에 안드레이는 그의 할아버지 도스토옙스키가 100년도 더 전에 강제군 복무를 했던 세미팔라틴스크 시의 250주년 기념식에 초청을 받아 그곳에 갔다. 그 3년 후인 1971년 도스토옙스키가 첫 부인 마리야와 결혼해 2년 반을 살았던 통나무집이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그 전에 사망해 개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세메이 박물관의 자료는 설명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이 발행한 도스토옙스키 가이드북에는 도스토옙스키 후손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후손은 그리 많지 않다. 세미팔라틴스크(세메이)까지 갔던 손자 안드레이는 아들 드미트리와 딸 타치아나를 두었고, 드미트리는 외아들 알렉세이를 두었다. 외아들로만 대를 이었으니 후손이 많을 리 없다. 드미트리의 외아들 알렉세이가 2003년에 세메이에서 열린 도스토옙스키 국제 컨퍼런스에 다녀갔다는 기록이 가이드북에 실려 있다. 알렉세이가 자녀를 몇이나 두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적어도 아들이 하나 있는 것은 확실하다. 드미트리가 아들 알렉세이, 손자 표도르와 찍은 도스토옙스키 후손 3대의 사진이 가이드북에 나와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직계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아들 표도르 이후 5대손 표도르까지 독자(獨子)로만 5대가 이어지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9년 05월호

2019년 05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