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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 기행 ⑭

도스토옙스키, 위기 상황에서 운명의 처녀 속기사를 만나다

On June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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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국립 레닌도서관 앞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모스크바 국립 레닌도서관 앞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그렇게 해는 바뀌어 1866년이 되었다. 그가 비스바덴에서 쓰기 시작한 『죄와 벌』은 그해 1월부터 <러시아 통보>에 실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2월호, 4월호 등에 계속해 실렸다. 이때 <러시아 통보>에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제1부와 제2부도 실리고 있었다. '전쟁과 평화'는 후에 붙여진 이름이며 처음의 제목은 '1805년'이었다. 두 작가의 대작이 이렇게 같은 출판물에 실렸으나 두 사람이 생전에 직접 대면할 기회는 없었다.

단 한 번, 두 작가가 만날 뻔한 일은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878년,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 솔로비요프의 철학 강의에 두 사람이 함께 참석했으나 얼굴을 서로 몰랐기 때문에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을 잘 아는 비평가 스트라호프가 톨스토이를 안내했는데, 톨스토이가 아무에게도 소개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해 스트라호프는 도스토옙스키를 보고도 애매한 태도로 그냥 지나쳤다. 도스토옙스키는 생전에 톨스토이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이에 관한 기록은 두 번째 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그녀의 회고록에 남겨놓았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남편 사후 톨스토이를 직접 만난 일이 있다. 그 이야기도 기회가 되면 이 지면에 소개할 예정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의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어느 날 문득 스첼로프스키와의 계약서가 생각났다. "아차,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큰일이구나!" 출판업자 스첼로프스키에게 이해 11월 1일까지 보내기로 약속했던 새 소설을 쓸 수 있는 날짜가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스첼로프스키에게 보낼 소설로 3년 전 수슬로바와 유럽 여행 중 착상했던 『도박꾼』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머릿속에만 있었을 뿐이었다.

원고 마감에 쫓겨 처음 고용한 속기사

도스토옙스키가 어린 시절 살던 모스크바 인근 다로보예 영지의 집.

도스토옙스키가 어린 시절 살던 모스크바 인근 다로보예 영지의 집.

도스토옙스키가 어린 시절 살던 모스크바 인근 다로보예 영지의 집.

당황한 도스토옙스키는 이 문제를 친구들과 의논했다. 밀류코프, 마이코프, 돌고모스치예프 등 세 친구는 도스토옙스키에게 자신들이 도스토옙스키의 구상에 따라 한 부분씩을 쓰고 이것을 그가 정리해 마무리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제안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고 불명예스러운 것이라며 거부했다.

그러자 밀류코프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속기 선생 올힌을 생각해내고, 속기사의 도움을 받아 구술을 해서라도 소설을 기한 내에 완성하라고 설득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1866년 10월 4일 올힌 선생에게 속기를 배우고 있던 20세의 여학생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드키나가 도스토옙스키의 아파트를 찾아가게 된다. 이때 도스토옙스키는 45세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했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훗날 그녀의 회고록에서 도스토옙스키를 그의 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처음 언뜻 보았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아주 늙어 보였다. 하지만 말을 하기 시작하자 금방 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가 서른다섯에서 일곱 사이이지 그 이상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간 정도의 키에 몸을 곧추 세우고 있었고, 약간 성긴 곳도 있는 밝은 밤색 머리칼은 포마드를 잔뜩 발라 세심하게 정돈을 해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그의 눈 때문이었다. 두 눈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한쪽 눈은 갈색인데, 다른 쪽은 눈동자가 눈 전체로 확대되어 홍채가 보이지 않았다. 이 이중적인 눈 때문에 도스토옙스키는 어딘지 수수께끼 같은 느낌이 풍겼다. 도스토옙스키의 얼굴은 창백하고 병적이었다. 그 얼굴이 내게는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졌는데, 아마도 내가 예전에 그의 초상화들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도스토옙스키는 책상에 앉았다가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가 하면서 담배를 피웠다. 그는 궐련을 자주 끄고 새것으로 갈아 피우곤 했다. 그는 내게도 담배를 권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예의상 안 피우시는 거겠죠?" 그가 말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을뿐더러 여성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고 서둘러 말했다.대화는 중간중간 끊어졌다. 게다가 도스토옙스키는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로 넘어갔다. 그의 모습은 생기가 없었고 마치 병자 같았다. 그는 입을 떼자마자 자기가 간질을 앓고 있으며 최근에 발작을 했다고 말했는데, 이런 솔직함에 나는 무척 놀랐다."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한 나날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최호정 옮김, 그린비, 2003)

위의 인용문 중 '홍채가 보이지 않았다'는 대목과 관련해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아놓았다.

"그것은 그가 간질 발작을 일으켰을 때 넘어지면서 어떤 날카로운 물체에 부딪혀 오른쪽 눈을 크게 다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융게 교수에게 치료를 받고, 경련 완화제인 아트로핀 한 방울을 눈에 넣으라는 처방을 받았다. 이 때문에 동공이 그렇게 확대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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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티켓 판매소에 도스토옙스키 포스터 등이 붙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티켓 판매소에 도스토옙스키 포스터 등이 붙어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사진과 그가 쓰던 촛대(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도스토옙스키의 사진과 그가 쓰던 촛대(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도스토옙스키의 사진과 그가 쓰던 촛대(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점의 도스토옙스키 부부 전기(왼쪽이 안나의 전기).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점의 도스토옙스키 부부 전기(왼쪽이 안나의 전기).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점의 도스토옙스키 부부 전기(왼쪽이 안나의 전기).

 

얼마나 살고 싶었던지-사형장의 추억

안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자기와 처음 만난 이날, 자신이 죽음 직전까지 갔던 과거 사형장에서의 쓰라린 기억까지 들려주었다며 이렇게 회고했다.

"세묘노프시끼 광장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동지들 틈에 서서 형 집행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던 기억이 나오. 살아 있을 시간이 이제 겨우 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몇 분이 내게는 몇 년, 몇 십 년처럼 느껴졌소. '내가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 있을 수 있다니! 그런 느낌이었소. 우리는 모두 수의를 입고 있었고 셋씩 나뉘어 서 있었는데, 나는 셋째 줄에 서 있었소. 첫 번째 줄의 세 사람은 기둥에 묶여 있었소. 2~3분 뒤면 두 줄이 처형될 것이고 그다음에 우리 차례가 올 것이었소. 얼마나 살고 싶었던지, 오 주여! 생명이 얼마나 귀하게 여겨지던지, 얼마든지 선하고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을 텐데! 지나간 일들이, 늘 좋았다고 할 수 없었던 그 시간들이 모두 다 떠올랐소. 모든 것을 새로 경험하고 오래도록 살 수만 있다면…… 하고 간절히 원했소. 그런데 갑자기 형 집행 중지 신호가 들려오는 것 아니겠소. 나는 마음을 다잡았소. 동지들을 기둥에서 풀어주고, 다시 데려와서는 새로운 선고를 낭독하더군요. 나는 4년 노역형을 선고받았지요. 그렇게 행복했던 날은 다시 없었을 거요! 엘렉셰예프 보루에 있던, 내가 수감된 독방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오. 내게 선사된 생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소.! 그 뒤 작별 인사를 하라고 형을 들여보내 주더군. 그러고는 그리스도 탄생 전야에 멀리 유형에 처해졌소. 내가 선고를 받던 날 죽은 형에게 보냈던 편지를 얼마 전에 조카가 내게 돌려줬지요. 그걸 보관하고 있다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도스토옙스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섬뜩한 느낌이 들어 온몸에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너무 놀랐던 것은 바로 그가 내 앞에서, 오늘 난생처음 만난 여자아이 앞에서 그렇게 솔직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겉보기에는 내성적이고 엄숙해 보이는 이 사람이 내게 자신의 전 생애를 그처럼 세세하게, 그처럼 솔직하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태도로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한 나날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최호정 옮김, 그린비, 2003)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장의 그 장면을 '사형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라면서 후일 그의 작품 『백치』 속에 한 대목으로 삽입하였다.

그는 1849년 12월, 형장에서 살아 돌아온 직후 형 미하일에게 "더 나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다짐하는 편지를 썼는데, 단지 감옥의 검열을 의식하여 그처럼 쓴 것은 아니었다. 진실로 그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며 오래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일들을 언젠가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온갖 흉악범들이 들끓는 수용소에서 그는 범죄자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들의 심리를 분석했다. 수용소에서는 편지 쓰기는 물론 글쓰기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모든 경험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했다.

사형장에서 생명을 건진 후 삶의 의지를 불태운 것이 그 후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그가 좌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후 나온 그의 불후의 명작들은 유형 생활을 비롯한 쓰라린 경험들이 밑거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꿈

도스토옙스키는 11월 1일까지 대형 판본 인쇄용지로 7장 이상 분량의 소설을 써야 했다. 당시 대형 판본 인쇄용지 1장은 책의 쪽수로는 약 15.5쪽에 해당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스첼로프스키와의 계약 조건이었다.

안나는 속기 일을 시작한 둘째 날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아직 새 소설의 플롯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상태라는 얘기를 들었고, 그가 스첼로프스키라는 출판업자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술은 대개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진행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30여 분씩 세 차례 정도 구술했고, 중간중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자신이 구술하고 있는 『도박꾼』의 주인공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의 여러 감정과 인상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안나에게 1849년 페트라스키 독서 모임 사건으로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8개월간 수감돼 있을 때 벽을 사이에 두고 다른 수감자들과 어떻게 수신호로 소식을 나눴는지도 이야기했고,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만난 범죄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어느 날엔 죽은 첫 부인 마리야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많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안나에게 했는데 모두 슬프고 불행한 이야기였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러면서 "나를 덮친 모든 불운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행복한 새 삶을 시작하는 꿈을 꾸고 있다"고 했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은 연민을 느꼈다.

안나는 일을 마치면 속기한 것을 집으로 가져가 글로 정리해 이튿날 가져왔다. 날이 갈수록 일에 익숙해지면서 스피드가 붙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안나가 작성한 원고가 판본 몇 장 분량인지 계산해보며 기뻐했다. 안나 또한 진행 속도로 보아 소설을 기한 내에 써낼 수 있을 것 같아 기뻤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집필을 돕고 있다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10월 4일 시작된 구술은 10월 29일 끝났다. 26일 만에 대형 판본 인쇄용지 7장에 이르는 약 4만 단어의 소설을 쓴 것이다. 소설 원고는 30일과 31일 정서되었고, 약속된 마감일인 11월 1일 원고를 넘기기만 하면 모든 게 잘 마무리될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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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지하철 도스토옙스키 역 통로, 도스토옙스키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모스크바 지하철 도스토옙스키 역 통로, 도스토옙스키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끝까지 야비한 술수를 부린 출판업자

그런데 소설 원고를 보내기로 약속한 날이 다가오자 도스토옙스키의 마음 한편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스첼로프스키가 위약금을 뜯어내기 위해 무슨 핑계를 대면서 원고의 수령을 거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나는 그가 걱정하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아와 그녀 어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아는 변호사에게 그럴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안나 어머니가 아는 그 변호사는 원고를 공증인에게 넘기든지, 아니면 스첼로프스키가 사는 지역의 경찰서장 등에게 맡기고 그의 인수증을 받아놓으라고 조언했다. 도스토옙스키도 그 나름대로 초등학교 동창생의 형인 세계적인 판사 프레이만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도 똑같은 조언을 해주었다.

마침내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우려했던 대로 스첼로프스키는 술수를 썼다. 이 교활한 자는 그날 원고를 받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했다. 날짜를 넘기도록 하기 위한 얄팍한 술책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집으로 원고를 주러 갔을 때 하인은 그가 지방으로 떠났으며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말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출판사 사무실로 찾아가 원고를 사무실 책임자에게 주려 했지만, 그는 그에 관해 사장에게 위임받은 바가 없다면서 접수를 단호히 거부했다. 공증인에게는 한 발 늦게 도착했고, 온 종일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던 도스토옙스키는 결국 밤 10시가 되어서야 원고를 스첼로프스키가 살던 N지구의 경찰서에 맡기고 인수증을 받을 수 있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시베리아 문학기행』의 저자 이정식 작가와 함께하는 러시아 문학 기행'이 8월 24일부터 31일까지 7박8일의 일정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일원에서 실시된다. 자세한 내용은 <우먼센스>2018.07 297쪽 참조.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카자흐스탄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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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마당의 도스토옙스키(오른쪽)와 발리하노프 동상.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마당의 도스토옙스키(오른쪽)와 발리하노프 동상.

 

도스토옙스키가 5년 반 살았던 시베리아의 벽지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은 러시아 내외에 7곳이 있다. 세계적인 문호로 불리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소설가를 기리는 박물관의 숫자로는 유례가 드물 것이다. 러시아에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라야루사, 다로보예, 옴스크, 쿠즈네츠크 등 6곳에 있고, 카자흐스탄의 러시아 국경과 인접한 세메이에 한 곳이 있다.

세메이의 옛 이름은 세미팔라친스크. 시베리아의 벽촌 마을이었다. 카자흐스탄이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후 세메이로 이름이 바뀌었다. 세메이에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이 있는 이유는 과거 도스토옙스키가 옴스크에서 4년간의 유형 생활을 마친 후 이곳에 사병으로 배치되어 강제 군 복무로 5년 반을 지낸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결혼도 했다. 지금의 인구는 27만 명가량이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살던 당시의 인구는 5천 명 정도였다.

세메이(세미팔라친스크)를 향하여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의 도스토옙스키 부모 초상화 등 전시물.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의 도스토옙스키 부모 초상화 등 전시물.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의 도스토옙스키 부모 초상화 등 전시물.

나는 세메이에 가기 위해 2018년 5월 3일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이며 이 나라의 가장 큰 도시인 알마티에 도착해 이튿날 북쪽 도시 외스케멘으로 떠나는 국내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세메이에도 공항이 있었으나 두 달 전 폐쇄되어 항공편이 있는 세메이 인근 도시 외스케멘까지 가서 차량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택한 것이다.

알마티 공항에서 비행기에 탑승해 밖을 보니 풍경이 근사했다. 5월 초순임에도 눈 덮인 천산산맥의 하얀 설봉들이 공항 저편에 병풍처럼 줄지어 서 있는 아름다운 광경이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비행기는 오전 9시 조금 지나 이륙했다. 외스케멘까지는 1,100km, 비행시간은 1시간 20분가량 걸린다고 되어 있다. 비행기 속도는 대략 시속 900km이다. 내가 탄 비행기는 의자가 좌우 3석씩으로 큰 비행기는 아니지만, 이보다 작은 비행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고 했다. 비행기는 북쪽으로 향했다. 오른편 창으로 천산산맥의 설봉들이 내려다보였다. 왼편에는 푸른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이 여행에 알마티에 사는 동포 진재정 씨와 동행했다.

외스케멘에 도착해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세메이까지 가기 위해 대절한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외스케멘에서 세메이까지 거리는 220km. 자동차로 3시간 거리다. 운전기사는 러시아계 같았는데 무척 나이가 많아 보였다.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여 70대 중반도 더 되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1963년생 즉 55세라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늙어 보이는 것은 시베리아의 거친 날씨 탓이 아닌지 모르겠다.

세메이로 가는 길은 포장길로 넓디넓은 평원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지역은 서시베리아 대평원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가는 도중 집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풀을 뜯고 있는 소나 말은 가끔 눈에 띄었다. 20여 분의 식사 시간을 포함해 약 3시간 반 가는 동안 마을은 두 곳쯤 본 것 같다. 음식을 먹고 차도 마실 수 있는 식당이 있는 곳은 도중에 한 군데뿐이었다. 출발한 지 1시간 반쯤 되는 중간 지점에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가 고기가 들어간 '베스바르마'라는 음식으로 간단히 점심을 했다. 우리의 수제비 같은 음식이다. 식당에서 다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메이로 다가가면서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길 옆 나지막한 언덕에 '세메이'라는 도시 표지가 보였다. 거의 다 온 모양이었다. 조금 더 가니 '옴스크까지 757km'라는 이정표도 보였다. 도스토옙스키가 유형 생활을 한 흔적을 찾아 옴스크에 갔던 적이 있어서인지 표지만으로도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도시 초입의 또 다른 이정표에는 알마티까지 1,109km라고 적혀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군 생활을 지겨워했다. 장교(공병 소위)까지 했던 사람이 형벌로 사병 근무를 해야 하는 처지이니 늘 훈련과 검열로 이어지는 군 생활이 오죽 답답하고 힘들었겠는가? 그나마 혹독한 유형 생활을 한 다음이었으므로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20대 초반에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군 복무를 마친 후 작가 생활을 시작했었다.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의 이르티시강

도시로 들어갈수록 쇠락한 구소련의 도시라는 인상이 들었다. 비가 내리는 날씨 탓도 있겠지만 가동을 멈춘 공장의 뻘겋게 녹슨 철 구조물, 오래된 잿빛 건물들, 울퉁불퉁 파인 도로, 1시간가량 내린 비로 인해 도로 여기저기에 생긴 크고 작은 물웅덩이 등이 이 도시의 어려운 재정 형편을 짐작케 했다.

세메이에서 150km가량 떨어진 곳에 구소련의 비밀 핵 실험장이 있었다. 구소련 해체 때까지 주민들은 새까맣게 몰랐다고 한다. 핵 실험장은 1949년 건설되어 1991년 카자흐스탄 독립 전까지 유지되었는데, 지하 핵실험을 포함해 총 750회의 핵실험이 있었다. 핵실험장 인근 마을에서는 지금도 기형아 출산율이나 백혈병 등의 발병률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높다고 한다. 방사능 후유증일 것이다. 그러한 주변 환경이 세메이의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로 들어간 후 조금 지나니 커다란 다리가 나타났다. 이르티시강 위에 세워진 다리다. 강폭이 제법 넓었고 물살도 빨랐다. 이르티시강은 도스토옙스키가 쓴 유형 생활에 대한 수기 형식의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옴스크의 이르티시 강변은 그가 자주 노동을 하러 나가는 장소였다. 족쇄를 찬 채였다. 그때마다 그는 강 건너 초원에 사는 유목민들이 누리는 자유를 동경하곤 했다. 이르티시강은 전장 4,200km에 이르는 긴 강이다. 몽골 알타이에서 발원하여 중국과 카자흐스탄 북부, 러시아 서시베리아의 옴스크, 토볼스크를 지나 오비강과 합류하여 북극해로 들어간다. 도스토옙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형지인 옴스크로 올 때 토볼스크에서 며칠을 지냈고, 이곳에 있을 때 데카브리스트 부인 폰비지나로부터 표지에 10루블짜리 지폐가 숨겨진 성경을 받았다. 그리고 옴스크와 세미팔라친스크에서 약 10년간 유형과 군 생활을 이어갔다. 이르티시강과는 참으로 질긴 인연이 있었다.
이르티시강 위에는 인접하여 두 개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옛 다리요, 다른 하나는 새로 놓은 다리라고 했다. 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갔으나 비 오는 날씨 탓인지 도시의 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후 2시 반쯤 예약한 세미팔라친스크 호텔에 도착했다. 이 호텔은 한때 이 도시의 대표적인 호텔이었다고 하는데, 엘리베이터는 성인 4명 정도가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구형 모델이었다. 객실도 크지 않았다. 모든 게 구소련 시절의 설비 그대로인 듯했다.

짐을 객실에 내려놓고 곧바로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으로 갔다. 3시쯤 도착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옴스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등에 가봤기 때문에 그중 가장 작은 도시인 세메이의 박물관에 대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세메이 박물관은 규모도 다른 곳에 비해 작지 않았고 전시물도 비교적 충실했다.

알마티 공항에서 보이는 눈 덮인 천산산맥.

알마티 공항에서 보이는 눈 덮인 천산산맥.

알마티 공항에서 보이는 눈 덮인 천산산맥.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문관 앞에서 필자 이정식.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문관 앞에서 필자 이정식.

세메이 도스토옙스키 박문관 앞에서 필자 이정식.

특색 있는 문학 박물관

이리나 솔로비요바 부관장이 나를 안내했다. 전시물은 다른 곳처럼 사진과 서적 위주였지만, 소설에 들어 있던 삽화, 유형수의 족쇄 등을 전시해놓은 것 외에 출구 쪽 벽면에 피, 땀, 눈물, 관계 등 테마별로 대형 벽화를 그려놓은 것이 특이했다. 고난에 찼던 도스토옙스키의 세계를 추상적으로 그린 것이라고 했다. 1976년 당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작가 게오르기 코즈리친의 작품이다. 그리고 더욱 특징적인 것은 도스토옙스키와 이곳에서 교류했던 젊은 카자흐인 학자 초간 발리하노프(1835~1865)의 흉상과 동상을 박물관 안과 밖에 도스토옙스키의 그것과 나란히 세워놓은 것이다.

발리하노프는 칭기즈칸의 후손인 카자흐스탄의 민족 영웅 아블라이 칸의 4대손으로 서방세계에 카자흐스탄 지역을 가장 먼저 알린 역사학자요, 인문·지리학자였다. 그는 1854년 2월 옴스크를 방문했을 때, 수용소에서 갓 석방된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알게 된 후 세미팔라친스크에서도 도스토옙스키를 만났다. 두 사람은 열네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학과 예술, 역사 등에 대해 이야기 상대가 되어 편지도 교환하는 등 가깝게 지냈다. 발리하노프는 아쉽게도 3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에는 발리하노프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다. 그는 교과서에도 이름이 등장하는 카자흐스탄의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다. 알마티에 러시아 소설가 고골 거리도 있다는 것을 덧붙여둔다. 세메이의 도스토옙스키 문학 박물관 앞 도로의 이름은 도스토옙스키 도로였다.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8년 07월호

2018년 07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