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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에게 듣는 아슬아슬했던 삶

충격! 마광수 자살

성 윤리와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며 곡절 많은 삶을 살았던 마광수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지난 9월 5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향년 66세. 소수의 열광과 다수의 외면을 받으며 해직과 소송, 문단의 왕따를 두루 겪었던 그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On October 19, 2017


지난 9월 5일, 마광수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자택에서 부엌 베란다 방범창에 스카프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함께 거주하는 가사도우미가 운동을 하기 위해 배드민턴 채를 가지고 외출한 사이 자살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 교수는 같은 아파트 다른 층에 살고 있는 이부 누나 조 모 씨에 의해 최초 발견됐으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진 상태였다. 유서에는 유산을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넘기고, 시신 처리를 그 가족에게 맡긴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1년 소설 <즐거운 사라>가 외설 시비에 휘말리며 외상성 우울증으로 휴직과 복직을 반복하던 마 교수는 2년 전 함께 살던 모친이 사망한 직후부터 입원을 권유받았을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을 앓아왔다고 한다. 집 앞에 있는 한강변 산책을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지인들에게 자주 신세 한탄을 해왔다고도 전해진다.

또 마 교수는 숨지기 직전 지인에게 "집으로 와달라"고 전화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순천향대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았다. 분위기는 엄숙하고 차분했다. 문학계 인사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몇몇 제자들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대화를 이어갈 뿐이었다. 이부 누나 조 씨와 조카 한 씨가 자리를 지켰는데, 누나 조 씨의 침통한 모습은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자택에 직접 가보니

마 교수는 생전에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줄곧 혼자였다고 한다. 같은 아파트 다른 층에는 이부 누나와 조카가 살고 있다.

마 교수는 생전에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줄곧 혼자였다고 한다. 같은 아파트 다른 층에는 이부 누나와 조카가 살고 있다.

마 교수는 생전에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줄곧 혼자였다고 한다. 같은 아파트 다른 층에는 이부 누나와 조카가 살고 있다.

마 교수의 발인 후 동부이촌동 자택을 찾았다. 이부 누나 조 씨와 조카 한 씨가 마 교수와 같은 아파트 다른 층에 살고 있었다. 마침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한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눈빛에선 외삼촌을 잃은 조카의 착잡한 심경이 느껴졌지만, 애써 밝은 얼굴을 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조카 한 씨는 "외삼촌의 죽음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언론의 관심이 부담스럽다"라고 말했다. 혹여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평생을 문학에 바쳐온 외삼촌의 업적에 해가 될까봐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마 교수의 누나 조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속의 법적 절차와 저작권 문제의 법률 자문을 도와주는 법무법인 화우 측 변호사를 통해 "갑작스러운 동생의 자살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 가족이 언론에 언급되는 것 자체가 싫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또 조 씨의 의사에 따라 마 교수의 책은 더 이상 출간되지 않을 전망이다.

자택 인근 주민에 따르면 마 교수는 평소 산책을 즐겨 했다. 최근에는 급격히 병세가 악화돼 많이 야위어 보였지만 거의 매일같이 산책을 했다고. 주민은 "마 교수는 평소 말수가 적었다. 여러 번 마주쳤지만 눈인사만 할 뿐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집에서 상주하는 도우미와 함께 자주 한강 산책을 나가곤 했는데,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마 교수가 혹시 잘못될까봐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귀띔했다. 현재 도우미는 이부 누나 조 씨의 집에서 생활하는 중이다.

<행복 철학> <마광수의 인문학 비틀기>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 등 마 교수의 책 13권을 발행한 출판사 '책읽는귀족'의 조선우 대표는 마 교수를 이렇게 기억했다.

"책 표지를 검정색으로 하자고 했을 때 펄쩍 뛸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했던 분이었어요. 3일 전까지만 해도 새 책 집필에 의욕을 보였는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살을 선택했을까 싶어 더 슬퍼집니다. 마 교수님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셨고, 누나와 조카를 끔찍이 사랑했던 분입니다."

조 대표의 말에 따르면 마 교수는 최근까지 대담 형식의 신간을 준비 중이었다. 조 대표가 질문하고 마 교수가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조 대표는 본격적인 집필 작업을 앞두고 자살을 선택한 마 교수를 안타까워했다.

"마 교수님 죽음의 이유가 생활고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 마 교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여유 있는 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았죠. <즐거운 사라>로 외설 시비에 시달린 이후부터 우울 증세가 있으셨다고 해요. 지금도 그때의 트라우마를 지우지 못하고 계셨죠. 책 한 권을 출간할 때마다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는데…' 하며 걱정하셨어요."

마 교수의 죽음 이후 언론과 평단, 문단은 그가 살아온 인생과 그가 남긴 작품에 집중했다. 혹자는 '거장'이라 표현했고, 또 어떤 이들은 '기준'과 '잣대'를 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 교수가 거장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는 문학을 사랑하는 거장으로 남아 있다.

 

예술과 외설 사이, <즐거운 사라>

마 교수의 비운은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던 1992년 시작됐다. 대학교수와 제자인 여대생 간의 성관계를 그린 소설 <즐거운 사라>(서울문화사)로 외설 시비에 시달렸고, 결국 음란물 제작과 배포 혐의로 1992년 10월 강의실에서 체포 구속됐다.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1993년 연세대로부터 직위 해제됐다. 1998년 김대중 정부에 의해 사면·복권돼 연세대에 복직했지만 이후에도 그는 동료 교수들의 따돌림으로 우울증을 앓았다. 문단에서도 철저히 왕따 신세였다.

<즐거운 사라>는 성 경험을 통해 정체성을 찾는 여대생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로 내용 중 여대생이 자신의 스승인 대학교수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문제가 돼 보수적 언론과 문인들, 대학교수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마 교수는 주인공 '사라'를 통해 한국 사회의 성에 대한 위선을 꼬집고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인 성을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문장 자체도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외설적인 표현을 고급스럽게 표현했고, 주인공의 감정과 상황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함으로써 필력을 입증했다. 외면받았던 소설, <즐거운 사라>를 따라가다 보면 몇몇 문장에서 내면의 고백을 엿볼 수 있다.

마 교수는 '사라'를 외로운 인물로 그렸다. 평소 고독한 예술가의 길을 걸었던 마 교수의 심경이 드러난 대목. 남 보기엔 이른 나이에 대학교수가 된 잘나가는 예술가지만 실상은 외롭고 고독하다는 걸 의미한다. 주인공을 미술학도로 설정한 것 역시 고등학교 시절 미술학과와 국문학과를 고민할 정도로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실제 모습을 투영했다고 볼 수 있다.

<즐거운 사라>에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1990년대 초반,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절도 많다. 이를테면 어머니의 성을 따르지 못하는 시대상을 비판하는 구절, 여학생이 겉으로만이라도 야해질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의식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구절 등이다. 마 교수는 남성 우월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인공을 여성으로 설정했고, '사라'를 신여성으로 표현하고자 '미니스커트'와 '매니큐어'를 도구화했다. 무엇보다 여성의 시각에서 성행위 묘사를해 여성의 성의식 전환을 꾀하고자 했다. 마 교수는 책 속에서 남성에 의한 섹스가 아닌 능동적인 섹스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주목했고, 결과적으론 그런 문장들이 '솔직한 본능을 드러낸 야한 작가'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냈다.

마 교수는 생전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성 해방의 기수'로 불려지는 것에 대해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자신은 성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라 성에 대한 논의의 개방을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문학 가치관에 대해선 흔들림이 없었다.

"제가 주장했던 건 성 개방이 아니에요. 성에 관한 논의의 개방이었죠. 나는 한 번도 성을 해방시키자고 말한 적이 없어요. 제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저를 '성 해방론자'라고 말하는 거예요. 제 소설에 대해 문학적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비판하면 그것은 달게 받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독자들 스스로 판단하도록 맡겨두어야지요. 우리 문화계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양성, 특히 창조적 다양성을 회복하는 일일 것입니다."(<우먼센스> 과거 인터뷰 중)

1995년 대법원에서 음란물 확정 판결을 받은 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금서' 상태인 <즐거운 사라>. 중고 거래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 보니 1991년에 출간된 초판본 중고가는 적게는 10만원에서 많게는 25만원 가까이 치솟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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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책

마 교수는 지난 40년 동안 약 100권에 가까운 책을 썼다. 1989년에는 <권태> <가자, 장미 여관으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펴냈다. <가자, 장미여관으로>는 연극으로 재탄생하기도 했고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관심을 모으더니 <즐거운 사라>를 출간했다. <즐거운 사라>가 논란이 되자 자신의 의도를 밝히는 <사라를 위한 변명>을 펴냈지만, 대중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광마일기> <자궁 속으로> <남자도 이혼을 꿈꾼다> 등을 펴냈고, 2000년대에 들어와선 인문학에 관심을 둔 <인간에 대하여> <인문학 비틀기> 등을 출간하기도 했다. 올해 1월에는 지난 40년을 총결산한 자선 시집 <마광수 시선>을 집필했고, 사망 이후에 마지막 유작 <추억마저 지우랴>가 나왔다.

마광수의 그림

그는 출감 후 대학에서 직위 해제를 당해 펜과 강단을 잃고 집에서 쉬면서 답답하고 우울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그림들을 모아 1994년 1월, 첫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외설 시비, 정신적 고통 심했다

<즐거운 사라>의 외설 시비로 구속된 후 그의 서울구치소 생활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실제로 2개월 동안의 감옥살이 중에 위장이 나빠지고 아픈 데가 많아졌다고 한다. 무엇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그는 과거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고통을 털어놓곤 했다.

"서울구치소 독방에 수감됐는데,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컸습니다. 앞으로도 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나니까 상실감이 큽니다. 학교에서 쫓겨나다시피 했거든요. 집에서 혼자 술 마시는 버릇이 생겼고, 요즘엔 울화병이 생겨 담배가 하루 4갑으로 늘었습니다."(<우먼센스> 과거 인터뷰 중)

극도의 상실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를 견디게 해준 건 그림 그리기였다. 1994년 1월엔 자신이 그린 그림 60여 점을 공개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두고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댈지 걱정입니다. '외도'한다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문인들이 시와 소설의 장르 구분 없이 겸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은데, 우리 사회는 남들보다 좀 먼저 가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요. 남들보다 5년 먼저 앞서갔다는 것이 제 잘못이라면 잘못이지요. 남들보다 먼저 성과 욕망의 문제를 말했던 것이 이런 결과로 돌아온 것 같아요."(<우먼센스> 과거 인터뷰 중)

이런저런 고초를 당한 후에도 마 교수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고집이었다. 40살이 되던 해 인터뷰에서 그는 스스로를 '색(色)에 굶주린 상태'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자기가 쓰는 글의 내용이 과장적으로 에로틱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실제로 안 되면 상상으로라도 충족시켜야 하는 게 사랑이고, 성욕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제자들이 본 마광수

마 교수에게 수업을 들었던 제자들은 그를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으로 기억했다.

한 학생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화 하나를 공개했다. 마 교수가 수업 시간에 갑자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한 여학생이 자기도 피워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하지!"라고 했다는 것. 수업 시간에 교수와 여제자가 맞담배를 피웠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200명이 앉은 대강당에서 둘의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가면서 공간을 채우는 모습이 경이로웠다는 설명이었다.

또 다른 제자는 "주로 교양 과목을 맡아서 강의하셨는데, 매번 정원이 초과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개인의 성적 고민을 털어놓기도 할 정도로 솔직하고 화끈한 수업이었다. 문학과 성, 그리고 삶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제기해주셨다"고 기억했다.


TIMELINE


●1951 출생

1·4후퇴 당시 피난 중에 태어났다. 종군 사진작가였던 아버지는 6·25전쟁 중 사망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에 정착했으며, 1966년 대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69 연세대학교 입학
미술대학과 인문계 국문학과 사이에서 고민하다 1969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수석으로 입학해 재학 중 학과 내에 연극부 창설을 주도했다. 연세문학회, 교지 기자, 교내 방송국 PD 등으로 활동했다. 1973년 수석 졸업했다.

●1975 국문학 강사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면서 국문학과 강사가 되고, 이후 1978년까지 연세대, 한양대, 강원대 등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1977 문단 데뷔
<현대문학>에 '배꼽에' 등 6편의 시를 발표해 박두진 시인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1983 윤동주 논문
'윤동주 연구' 논문으로 연세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윤동주 박사 1호가 됐다. 마 교수는 윤동주 시에 나타난 상징적인 표현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연구했으며, 상징적 표현과 관련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객관적으로 윤동주 시의 본체를 파악했다.

●1984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마 교수는 조교수로 재직 중일 때부터 문학의 지나친 교훈성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풍자했다.

●1985 결혼
10년째 열애 중이던 한 살 연하의 연극배우 김방옥과 결혼했다. 김방옥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0년대 후반 한국연극학회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9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출간
장편소설 <권태>로 소설계에 데뷔한 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출간, 한국사에 성담론을 불러일으키면서 스타 작가가 됐다. 하지만 언론의 혹평을 받았고, 대학에서 강의가 취소되는 시련을 겪었다.

●1990 <즐거운 사라> 여성지 연재 / 이혼
<즐거운 사라>는 2월부터 7월까지 6개월 동안 월간지 <여성자신>에 연재됐던 소설로 이듬해인 1991년 7월 서울문화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결혼 5년 만인 1990년 이혼했다. 이혼 당시 마 교수는 "우리 부부간에 이혼이란 사건은 상당 기간의 별거 기간을 사이에 두었기 때문에 극적인 의미도 없고, 그에 따른 후유증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1992 구속
<즐거운 사라>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구속됐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소설 <즐거운 사라>는 성관계를 노골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해 성욕을 자극한다"며 총 17개 부분을 적시했다.

●1993 직위 해제
연세대로부터 직위 해제됐다. 1998년 김대중 정부에 의해 사면·복권돼 연세대에 복직했지만 2000년에는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

●2005 연세대 국문과 정교수 임용
과거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 후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연세대 국문과 정교수로 복직한 2005년에 책 4권 (<광마일기> <로라> <사라를 위한 변명> <권태>)를 연이어 펴내며 재기에 나섰다.

●2016 정년퇴임
지난해 정년퇴임식에서 마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정년퇴임을 맞으니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고 한스럽다.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학교에서 잘리고, 한참 후 겨우 복직했더니 곧바로 동료 교수들의 따돌림으로 우울증을 얻어 휴직한 것, 그 뒤 줄곧 국문과의 왕따 교수로 지낸 것, 위선으로 뭉친 지식인, 작가 등 사이에서 고통받은 것이 너무나 억울해지는 요즘이다. 그냥 한숨만 나온다."

●2017 자살
자살하기 전까지 집필 활동을 계속했으며, 올해 1월에는 등단 40년을 맞아 시선집 <마광수 시선>을 펴냈다.


CREDIT INFO

에디터
이예지
사진
하지영, 서울문화사 DB, 일요신문사 DB
2017년 10월호

2017년 10월호

에디터
이예지
사진
하지영, 서울문화사 DB, 일요신문사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