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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와 겨울 바이칼 탐방 여행’을 위한 사전 브리핑 1

낭만 깃든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On October 04, 2016

  • <우먼센스>에서는 2017년 2월 10일~17일까지 7박8일간 실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가는 얼음왕국 바이칼 탐방여행’을 앞두고 이번 10월호부터 5회에 걸쳐 지면을 통한 여행 사전 브리핑을 싣는다. 12월 하순경에는 <우먼센스> 강당에서 자세한 여행 설명회도 가질 계획이다. 지면 사전 브리핑의 글과 사진은 이정식 <우먼센스> 발행인이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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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역.

블라디보스토크역.

“지구의 크기를 직접 몸으로 느껴보려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보라”는 말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총길이는 9,288km. 양쪽 종착역을 두 번 왕복하면 지구를 한 바퀴(지구 둘레는 약 40,000km) 도는 셈이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 여행은 지구 위에 남아 있는 최후의 모험”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모험은 그렇게 위험한 모험은 아니다. 낭만이 깃든 모험이며 긴 사색의 시간이 주어지는 호젓한 여정이 그 안에 있다.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4,100km, 기차 안에서 2박3일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출발하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동방 진출의 상징적인 도시다. 지난 9월 초 박근혜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의 한-러 정상회담이 열린 곳도 블라디보스토크다.

통일이 되었거나 남북관계가 좋다면 서울이나 부산에서 기찻길로 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탈 수도 있으련만, 지금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거나 부산이나 동해 쪽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2017년 2월 10일 7박8일의 일정으로 출발하는 <우먼센스> 주최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가는 얼음왕국 바이칼 탐방여행’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것으로 여정을 시작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 호수 인근 동시베리아 중심 도시 이르쿠츠크까지 4,106km를 2박3일(정확하게는 70시간 36분)에 걸쳐 가게 된다. 블라디보스토크가 과거 일제 식민지 시절 연해주 지역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짧은 일정상 그 흔적들을 찾아볼 시간적 여유는 없을 것 같다.

여기에서는 다만,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운동과 관련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몇 가지를 먼저 이야기하려고 한다.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지역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서간도, 북간도 다음으로 조선인이 많이 살던 곳으로 1910년대에는 그 수효가 20만 명 정도였고, 1925년경에는 25만 명 가량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1909년,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권총을 품에 넣고 열차에 몸을 실은 곳이 블라디보스토크이며, 젊은 춘원 이광수(1892~1950)가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가기 위해 상해에서 배를 타고 와 기차로 출발한 곳도 이곳이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에 살던 우리 동포들은 러시아가 적군(볼셰비키 혁명 세력)과 백군(제정러시아 잔당 세력)으로 나뉘어 내전(1918~1922) 중이던 1920년 4월, 백군과 손을 잡은 일본군의 기습으로 이 지역 최대의 한인 집단 거주 지역인 신한촌이 초토화되면서 3백 명 이상이 학살을 당했다. 인근 우수리스크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이었으며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1860~1920) 선생과 많은 지도급 인사들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는 참변을 겪었다(4월 참변).

그런가 하면, 구소련의 스탈린 치하였던 1937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는 무려 18만 명에 달하는 동포들이 어느 날 갑자기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비통한 일을 겪기도 했다.

당시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1931년부터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과 극심한 긴장 관계였는데 한인이 일본인과 구분이 안 된다고 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그해, 한인 전체에 ‘일본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씌워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추방했던 것이다. 이때도 많은 한인 지도자들이 일본 간첩이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연해주 지방에는 1860년대부터 가뭄과 기근 등을 피해 주로 함경도 지방에서 한인들이 한 집 두 집 이주해오기 시작했고, 1910년 한일 강제 합병을 전후해서는 독립운동을 위해 조국을 떠나온 사람이 많았는데 러시아 땅도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맨손으로 황무지를 일구고 각종 노동 일, 장사 등으로 겨우 자리를 잡고 사는가 했는데 어느 날 나라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아무런 기약도 없이 추위와 굶주림의 공포 속에서 동물처럼 열차의 화물칸에 실려 낯선 중앙아시아에 내팽개쳐졌던 것이다. 


뤼순감옥에서의 안중근 의사 (1909년).

뤼순감옥에서의 안중근 의사 (1909년).

뤼순감옥에서의 안중근 의사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혼이 숨 쉬는 곳

안중근 의사가 최후의 여정을 시작한 블라디보스토크는 안 의사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에 올랐다. 1916년 이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지금의 노선과 같지만,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으로 떠날 때의 열차 노선은 지금과 달랐다.

출발지는 그때도 블라디보스토크였으나 112km 북쪽의 우수리스크에서 중국 영토로 진입, 쑤이펀허, 하얼빈, 치치하얼, 만저우리 등 만주를 가로질러 시베리아의 치타로 들어가는, 말하자면 지름길 노선이었다. 당시 만주 지역의 철도는 러시아 관할 하에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체포돼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뤼순 감옥에서 쓴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 보면, 당시 거사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 가게 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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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9월, 그때 나는 연추(크라스키노)에 머물고 있었는데, 하루는 마음이 울적하고 초조함을 이길 수 없어 스스로 진정하기 어려워 친구 몇 사람에게,
“나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 하오.”
하였더니
“왜 그러오? 아무런 기약도 없이 졸지에 왜 가려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나도 그 까닭을 모르겠소. 도저히 이곳에 더 머물러 있을 생각이 없어 떠나려는 것이오.”
하였다.
“이제 가면 언제 오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무심중에,
“다시 안 돌아오겠소.”
하자, 그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고, 나도 역시 순간적으로 그런 대답을 했을 뿐이다.
서로 작별하고 보로실로프에 이르러 기선에 올라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니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올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 신문을 보았더니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것이 참말이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남몰래 ‘소원하던 일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하며 기뻐하였다. <안응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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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 모형(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 모형(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 모형(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가 연추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09년 10월 19일. 도착 직후 이토가 만주 방면을 시찰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안 의사는 이튿날 최재형이 사장으로 있던 동포 신문사 대동공보사에서 이토의 만주 시찰을 확인한 후 우덕순 동지와 이토를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다음 날인 21일 열차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다.

안 의사는 22일 하얼빈에 도착, 26일 오전 9시 15분 마침내 하얼빈 역에서 열차에서 내려 사열 중이던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저격, 처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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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혁명광장.

블라디보스토크 혁명광장.

춘원 이광수가 본 100년 전 블라디보스토크항과 신한촌

1937년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기까지 가장 큰 한인 마을이었던 신한촌이 있던 지역에 지금 과거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1999년에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세워놓은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만이 이곳의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이 신한촌의 모습을 짧게나마 글로 남긴 이가 춘원 이광수다.

이광수는 1914년 1월 초순 상해에서 러시아 선박인 포르타와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3일 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신한촌으로 갔다. 그는 당시 22세의 청년이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와 신한촌의 풍경을 이광수는 후일에 쓴 <그의 자서전>(1936)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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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내린 것은 해무가 자욱한 추운 아침이었다. 쇄빙선이 깨뜨려놓은 얼음 바다로 연해 붕붕 고동을 울리면서 까만 해무 속으로 배가 들어가는 것은 심히 음침하였다.
어디 세상 끝에나 온 것 같았다.
부두에서 썰매를 탔다. 썰매에는 말을 네 필이나 달았다. 큰 말, 작은 말. 이름이 신한촌이라길래 어떠한 덴가 했더니 해삼위 시가를 다 지나 나가서 공동묘지도 다 지나가서 바윗돌에 굴 붙듯이 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그것이었다. 이를테면 염라국 지나서다. 해삼위 시에서는 이 귀찮은 거린채들을 공동묘지 저쪽으로 한데 몰아서 격리를 시킨 것이었다 (거린채라는 것은 꼬레이츠라는 아라사 말로 조선 사람이라는 말의 조선 사람 사투리다).
아이들과 청년들이 길바닥에서 얼음을 지치고 있다가 내 썰매가 오는 것을 보고는 욱 모여들었다. 그들은 거의 내 앞길을 막았었다. 그리고는 매우 적개심 있는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중에 한 청년이 쓱 나서며,
“웬 사람이야?”
하고 거의 반말지거리로 물었다. 여기는 모두 함경도의 육진 사투리다.
나는 공손하게 내가 상해에서 온다는 말을 하고 주인 들 집을 구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 양복은 어디서 지어 입은 것이야?”
“모자가 일본 모잔데.”
“행리(여행가방)도 일본 것이고.”
“분명 조선 사람인가.”
청년들은 내가 들어라 하는 듯이 이런 소리들을 하였다.

27세 때의 이광수(1919).

27세 때의 이광수(1919).

27세 때의 이광수(1919).

블라디보스토크역 플랫폼.

블라디보스토크역 플랫폼.

블라디보스토크역 플랫폼.

‘밀정’으로 몰려 죽을 뻔한 춘원 이광수

가장 큰 한인 집단 거주 지역이었던 신한촌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공동묘지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달동네였다.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동포 신문인 <권업신보>를 내고 있던 권업회 회원들이 달려왔다. 김립, 김하구, 윤해 등이었다.

그들은 이광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 그를 알고 있었고 상해 지역 독립운동의 지도자급 인사인 신규식(예관, 1879~1922) 선생이 이 지역의 거물인 월송 이종호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갖고 있어 무사할 수 있었다. 이광수는 권업회 회원들의 안내로 이종호를 만나며, 여기에서 약 열흘간 머무는 동안 이동녕과 홍범도, 엄인섭, 오주혁, 정재관 등과도 알게 된다(엄인섭은 안중근 의사와 의형제를 맺었던 사람이지만 후에 일본의 밀정으로 밝혀진 인물이다).

소개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에는 밀정 혐의를 받으면 그대로 살해되어 바다에 버려지는 살벌한 시대였다.

올해(2016년) 추석을 앞두고 개봉된 영화 <밀정>에서도 의열단원 하나가 밀정으로 밝혀지자마자 다른 단원들에게 곧바로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일제 치하, 수많은 밀정들로 인해 동포끼리의 상호 불신은 대단히 심각하였다.

이광수가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여러 사람이 밀정 혐의를 받아 살해되어 얼어붙은 바다의 얼음 구멍에 수장되었다고 이곳 사람들이 말해주었다. 이광수는 자신도 자칫 그런 신세가 될 뻔했다는 섬뜩한 얘기도 들었다.

이광수는 신한촌에서 열흘가량 머문 뒤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중국 길림성 무릉에 가서 안중근 의사의 바로 아랫동생인 안정근의 집에 한 달가량 머물면서 전신 불구가 된 독립운동가 추정 이갑(1877~1917)을 돕다가 1914년 2월 다시 기차를 타고 하얼빈을 거쳐 시베리아의 치타로 가 반년가량 머물게 된다. 이때 인근의 바이칼 호수 주변을 둘러보았으며 그때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려 19년 후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이 <유정>이다. 이광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여비의 부족으로 인해 결국은 미국행을 포기하고 그해 8월 조선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손기정 선수가 탔던 시베리아 횡단열차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를 보며 보름에 걸쳐 베를린까지 갔으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손기정기념재단이 2015년 3월 공개한 책자 형식의 당시 대륙횡단열차 티켓은 앞면에 일어로 ‘도쿄-베를린’이라고 적혀 있고, 경유지는 ‘부산-하얼빈-바르샤바’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 부산까지는 배로, 이후 열차를 타고 서울과 신의주를 지나 일본이 세운 만주국을 거쳐 시베리아로 들어가 모스크바와 바르샤바를 통해 베를린으로 들어가는 경로다.

손기정은 도쿄를 출발해 그처럼 하얼빈을 거쳐 소련 치타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갔다. 보름이나 걸리는 여정(旅程)이었다.

손기정 선수는 후일 자서전에서 “1936년 6월 적응 훈련을 하기 위해 올림픽 개최 두 달 앞서 출발했다”며 “보름에 걸쳐 베를린에 도착했더니 일본 대사관 직원이 ‘왜 조선인이 두 사람(손기정과 남승룡)이나 끼었느냐’고 해 눈물이 솟구쳤다”고 말했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 식민지 시절 우리 겨레가 겪은 피맺힌 슬픈 역사를 후손들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남북한은 아직도 일제 식민 지배의 여파인 분단의 아픔 속에 있지만 그래도 한국은 해방 후 70여 년을 지내오면서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번듯한 나라로 성장했다. 그러한 긍지를 갖고, 다음 호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잠시 둘러본 후 본격적인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시작한다.
(다음 호에 계속, 관련기사 p142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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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2017년 2월 10일(금)~17일(금), 7박 8일
상품 가격 295만원
여행 주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체험하고 철로 주변의 눈 덮인 시베리아의 자연환경을 감상하며, 이광수 문학의 배경인 바이칼 호를 찾아 떠나는 인문&힐링 여행
방문 지역 블라디보스토크-이르쿠츠크(횡단열차 탑승 구간), 바이칼 호 알혼 섬, 후지르 마을, 부르한 바위, 하보이곶, 우스찌아르다, 데카브리스트 기념관, 즈나멘스키 수도원 등 이르쿠츠크 시내 일원
특전 횡단열차 전 객실 2인 1실, 이르쿠츠크-인천 직항편으로 귀국 
주최 (주)서울문화사 <우먼센스>
문의 및 신청 바이칼BK투어(주)(02-1661-3585, www.bktour.kr)
✽여행의 세부 일정은 항공기나 현지 사정에 따라 다소 변경될 수 있습니다.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6년 10월호

2016년 10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