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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어라, 혜리

On March 04, 2016 0

혜리는 끼도 많고,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다. 그리고 정도 많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믿고 보는 배우가 된다지만 혜리의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에 대해서는 의문이 드는 것이 먼저였다. ‘과연 얼마나 해낼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작품의 뚜껑이 열렸을 때 말괄량이 소녀 ‘성덕선’에 동화된 혜리를 보고선 무릎을 탁 쳤다. 웃다가 울다가, 기뻤다가 슬펐다가 <응팔>의 중심 역할로 무시할 수 없는 내공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혜리는 드라마가 끝난 지 일주일이나 지났음에도 ‘성덕선’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물음에는 한참 생각했다. 촬영 당시를 떠올리는 순간에는 미소가 번졌고 자신이 소속된 그룹 ‘걸스데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소녀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솔직하고 털털한, 웃음도 눈물도 많은 <응팔> 속 ‘성덕선’과 똑같았다.

“지인들이 ‘아직도 덕선이 같다’고 말해요. 저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응팔>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구나’ 싶어요. 일 년의 절반을 드라마에 쏟아부었고 캐릭터에 푹 빠져 연기한 게 처음이라서 그런가 봐요. 보내고 싶지 않은데 보내야 하는 상황도 싫고요. 그냥 모든 게 다 시원섭섭해요.”

혜리는 <응팔>에 캐스팅됐다는 걸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아이돌 그룹 멤버라는 꼬리표와 그간 출연한 작품의 저조한 흥행 성적이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왜?’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했다.

“저는 가수 출신이고 그동안 흡족할 만한 연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응팔>에 ‘캐스팅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기했어요. 제 연기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어 신원호 감독님이 왜 저를 선택했는지 의문이었죠. 막연히 ‘내게 뭔가 있나 보다’ 생각했어요.(웃음) 사실 지금도 제가 <응팔>의 ‘성덕선’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촬영을 앞두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처음에 든 흥분과 기대는 하루가 다르게 불안과 고민으로 바뀌었다. 촬영 전 꼬박 두 달을 신원호 감독과 보내며 캐릭터의 성격과 에피소드에 대한 분석과 이해에 몰두했다. 혜리는 그렇게 스물세 살 청춘을 불태웠다.

“지금도 대사를 외울 수 있어요. 5회까지의 대본은 너덜거릴 정도죠. 사람들이 저보고 악바리래요.(웃음) 그렇게 두 달을 <응팔>에 매진하니까 어느 순간 제가 ‘성덕선’이 되어 있더라고요. 대사와 상황, 모든 게 그냥 저였다고 할까요? 대본을 보면 ‘덕선이라면 이렇게 하겠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1화의 엔딩 장면을 기억하는가? ‘성보라’(류혜영 분)의 생일 파티 신이었는데, 위로는 똑똑한 언니를, 아래로는 사랑을 듬뿍 받는 남동생을 둔 둘째딸의 서러움이 폭발한 장면이다. 혜리는 그 한 장면으로 연기력에 대한 시청자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상황만 봐도 ‘덕선이’가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연기할 때 실제로 울면 대사 전달이 힘들다고 하는 분도 있었는데 그냥 목 놓아 울어버렸어요. ‘컷!’ 소리와 함께 얼떨떨하며 ‘이 감정이 뭐지? 내가 왜 이렇게 울었지?’ 싶었죠. 감독님이 잘했다고 칭찬해주셔서 ‘큰 고비 하나를 넘겼구나’ 생각하며 안심했어요. 나중에 방송을 보니까 얼굴이 빨갛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못생겼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웃음)”

‘성덕선’의 남편을 찾아가는 과정이 한 가지 재미였던 <응팔>. 시청자는 종영 직전까지 ‘최택’(박보검 분)과 ‘김정환’(류준열 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고, 그녀의 피앙세로 누가 더 적합한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사실 저는 ‘최택’이 제 남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최택’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신경을 쓸까 궁금해서 작가님께 몰래 여쭤봤거든요. 그때부터 조금씩 ‘최택’에 대한 마음을 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혜리의 실제 이상형은 ‘최택’도, ‘김정환’도 아니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남자다우며, 겉으로는 까칠하지만 속내만큼은 부드러운 남자. 혜리가 기다리는 꿈의 이상형이다. “‘택이’와 ‘정환이’가 섞였으면 좋겠어요. 흔히 ‘츤데레’라고 하죠. 틱틱거리는 남자를 좋아해요. 처음 대본 리딩 때 ‘정환이’가 연기하는 걸 보고 엄지를 치켜들었죠. ‘택이’처럼 챙겨줘야 할 것 같은, 모성애를 유발하는 남자와 ‘정환이’처럼 차가운 남자가 반씩 섞인 남자는 어디 없을까요?”

혜리는 ‘성덕선’을 연기하면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고 했다. MBC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 에서 보여준 귀엽고 애교스러운 모습이 전부인 줄만 아는 사람들에게 “저 이런 모습도 있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고. “신원호 감독님이 <진짜 사나이>에서 보인 모습이 실제 제 모습이었는지 눈여겨보셨더라고요. 어리바리하고 눈치도 많이 보고 남을 잘 챙길 줄 안대요. 활발한 성격에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제가 되게 똑똑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요.(웃음) 저도 모르는 제 모습을 드라마에 투영하려고 노력했고, 감독님과 작가님이 이끌어주셔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탄생한 혜리표 ‘성덕선’은 안방극장에 활기찬 웃음과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덕선이’가 웃으면 시청자도 따라 웃고 그녀가 울면 함께 울었다. 1988년을 살았든 살지 않았든 시청자들은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 공감했다. “사실 94년생인 제가 88년도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결국은 사람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사람 간의 정이라든지 사랑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하지 않나요? 나이가 어리다고 공감되지 않은 부분은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당시 유행어를 흉내 내는 부분이 가장 어려웠죠. 저는 그때 그 방송을 본 적이 없거든요.(웃음)”

혜리는 2012년 드라마 <맛있는 인생>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이후 <선암여고 탐정단> <하이드 지킬, 나>를 거쳐 <응팔>을 만났다. 작품의 성공 여부를 떠나 현장에서 몸소 배웠고, 그 경험이 모두 약이 됐다. 가수로서 무대에 올랐을 때의 희열을 연기 현장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건 그녀에게 행운과도 같았다.

“첫 촬영 현장에서 ‘아, 이게 연기구나’ ‘더 잘하고 싶다’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다는 걸 알고 연기의 매력을 알게 됐죠. 두 번째 작품 <선암여고 탐정단>은 정말 애착이 가요. 공주병에 걸린 못된 캐릭터였는데 인물의 감정에 동화되어 연기했죠. <응팔>을 하면서 배운 건 감동을 주는 연기가 무엇인지 알게 된 거예요. 많은 사람에게 추억을 남길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그런 연기를 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그녀는 4편의 작품을 거쳐 오면서 ‘세상에 혼자 하는 일은 없다’는 걸 배웠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환경에서 연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연기는 나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함께 출연하는 배우와의 ‘케미’도 좋아야 하고 감독님과 작가님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따르는 것도 중요하죠. 시간과 성과가 비례하다는 것도 배웠어요. 물론 시청률이나 음원 순위가 저를 힘이 넘치게 하는 기폭제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성적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응팔>이 망했어도 그 안에서 배울 게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많이 성장했다고 느껴요. 연기에 대해서도 조금 더 배운 것 같아 기쁘고요. 영원히 몰랐으면 어쨌을까 싶어요.(웃음)”

실패한 작품에서도 배움을 얻었다고 말하는 혜리. 그건 비단 연기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건 이미 가수 활동을 하면서 알았죠. 컴백 날짜를 정해두고 연습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더 완벽한 무대를 준비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어요. 앞으로는 ‘빨리빨리 시스템’에서 벗어나 완벽할 때까지 연습해서 무대에 오르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걸스데이는 멤버들이 자매처럼 지내기로 유명하다. 소속사에서는 ‘숙소 생활 종료’를 선언했지만 멤버 스스로 함께하기를 선택한 유일무이한 그룹. 다섯 멤버가 한자리에 있어야 비로소 안정감이 생기기 때문이란다. 혼자서 심심한 것보다 둘이서 재미있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주변에서 물어봐요. 멤버들끼리 질투 같은 건 없냐고요. 음… 단언컨대 저는 없어요! 아마 언니들도 없을 거예요.(웃음) 이제는 멤버라기보단 가족 같아요. <응팔>의 쌍문동 이웃처럼 또 다른 가족이오. 표정만 봐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속속들이 아는 관계니까요. 언니들을 만난 게 너무 감사하니까 질투를 느낄 수 없죠.”

<응팔>의 모니터 요원도 걸스데이 멤버들이었다. 각자 한 번씩은 연기 경험이 있는 멤버들이라 혜리의 연기에 대해 조언을 해줄 법도 한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단다. 결방이 결정되면 아쉬워하고, <응팔>을 보기 위해 일찍 퇴근하고, 남편 찾기에 관심을 집중하는 여느 시청자와 다름없었다.

“언니들이 오롯이 시청자였다는 게 정말 기뻐요. 제 연기를 지적해줄 법도 한데 말 한마디 없더라고요. 그만큼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았던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같은 시기에 다른 드라마에 출연한 민아 언니의 작품을 모니터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커요. 늘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었어요.”

걸스데이가 혜리를 움직이는 힘이라면 가족들은 그녀의 버팀목이다. <응팔>의 ‘덕선이’처럼 스튜어디스를 준비 중인 예쁜 여동생과 함께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단란한 가정이다. “뭐니 뭐니 해도 제 버팀목은 가족이에요. 운 좋게 연예인이 됐고, 운 좋게 인기를 얻고 돈도 벌었지만 늘 첫 번째는 가족이었어요. 돈을 버는 이유도 엄마, 아빠에게 좋은 집을 선물하고 싶어서죠. 가족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힘들어도 버틸 수 있어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엄마는 속상해서 눈물을 흘리시죠. 그래도 어떡해요. 이게 제 진심인걸요.”

속마음은 이렇지만 실제로는 살가운 딸이 아니다. <응팔>의 ‘성보라’(류혜영 분) 같은 딸, 부모님에게 표현도 못하는 무뚝뚝한 딸이라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다. 코끝을 찡끗거리며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성보라’ 캐릭터에 많이 공감했어요. 큰딸이라서 자연스럽게 갖는 책임감이라든지,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하는 모습이라든지, 그런 것이 저와 비슷했죠. 차갑게 말하고는 뒤돌아서서 눈물 흘리는 모습도 그렇고요. 이런 말 하고 있으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이 먹고 싶네요. 드라마 촬영하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는데….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갈 거예요. 즐겁게 계획하고 있어요.”

가수에서 연기자로 변신에 성공한 혜리. ‘반짝 스타’가 아닌 누구나 믿고 보는 배우가 되기 위해 걸어야 하는 길 위에 섰다. “자꾸만 보고 싶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사랑스럽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 ‘혜리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맡은 역할에 잘 어울린다’는 말을 계속 듣고 싶어요.”

‘성덕선’ 캐릭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완벽한 이미지 변신이 필요할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연기에 대한 칭찬을 들은 것도 처음이고 캐릭터에 완벽히 몰입한 것도 처음이라 무엇이 정답인지 자신도 헷갈린다고. “기자님께 물어보고 싶어요. 이 캐릭터를 벗어야 해요, 말아야 해요?(웃음) 다음에 어떤 캐릭터를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성덕선’ 캐릭터가 필요한 역할이 있을 테고, 외모부터 성격까지 완벽히 변신해야 하는 역할도 있을 수 있고요. 사실 당분간은 벗어나고 싶지 않지만 작품을 위해서 벗어나야 한다면 벗어나야죠.”

어린아이 같지만 생각은 어른 못지않다. 자신의 생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봐 되풀이해 말하고 찬찬히 설명한다. 그녀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녀의 2016년도 빛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는 데뷔했던 2010년이나 작년이나 늘 같은 마음이었어요. 올해도 그럴 거고 2020년에도 그럴 거예요. 계속 사랑받는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요. 대중의 기억에서 잊히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처럼만 열심히 할래요.” 얼굴도 생각도 마음씨도 예쁜 혜리다.

혜리는 끼도 많고,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다. 그리고 정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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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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