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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진실 6주기

최진실 모친 정옥숙씨 못다 한 이야기

2008년 10월, 딸은 엄마라는 이름을 맡기고는 무심히 떠났다. 이혼의 상처와 사랑하는 동료의 자살, 세상의 수군거림을 그녀는 견디지 못했고 그렇게 세상을 등진 지 6년이 지났다. 2014년 10월 2일,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여전히 딸이 가슴을 파고든다는 정옥숙씨도 함께했다.

On October 28, 2014


대한민국 국민에게 최진실이란 이름 석 자는 여전히 아픈 이름으로 남아 있다. 국민 배우였고, 국민 누나였고, 국민 연인이었다. 브라운관의 그녀는 내내 밝은 모습이었지만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듯 홀연히 떠나버렸다.

세월은 흘러 그녀가 떠난 지도 벌써 6년. 굽이진 비탈길을 지나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양평 갑산공원에 올라 그녀가 영면해 있는 곳을 찾았다. 안개가 걷히고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최진실의 엄마 정옥숙씨는 6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가슴을 파고드는 이름이란다.

“세월이 흐르면 다 잊혀진다는데 자식은 안 그래요. 점점 더 마음이 깊어지고 더 많이 그리워요. 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슴을 파고들어요. 1초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정옥숙씨는 딸을 위해 사온 국화꽃 한 바구니를 건넸다. 그러곤 말없이 비석에 새겨진 딸의 모습을 응시했다. 엄마는 몸이 아프댔다. 딸을 잃은 그날이 올 때면 생살을 찢어내듯 온몸 여기저기가 아프댔다. 딸 앞에 선 엄마는 손에 쥔 손수건으로 눈물을 몇 번 훔쳐내고서야 딸을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한마디 건넸다.

“감사합니다. 5년까지만 하고 그다음부턴 혼자 조용히 딸을 기억하려 했는데 여전히 딸을 사랑해주시고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실이는 후회할 거예요
“딸아, 환희, 준희가 잘 자란 걸 보면 너도 후회할 거야.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너 지금 이 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행복하겠니? 환희, 준희는 공부도 잘하고 너무 예뻐졌어. 네가 살아 있었다면 이 모습 다 지켜봤을 텐데.”

추모식을 마친 뒤 정옥숙 여사는 비석 앞에 다시 섰다.
“6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예쁘죠? 제가 기억하는 진실이는 여전히 참 예뻐요.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고 하죠? 어떻게 잊겠어요. 세월이 가도 가슴속엔 그만큼 그리움도 쌓이는 거겠죠. 1초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어딜 가도 생각나요.

강남 거리를 지나가도 ‘아, 이 거리는 우리 딸이 많이 거닐던 길인데’, 햄버거 집을 가도 ‘우리 딸이 참 좋아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환희도 그래요. ‘여기 엄마랑 많이 갔던 덴데’ ‘여기 앉아 있으면 꼭 우리 엄마 들어올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해요.

조금만 더 앉아 있다 가자고 할 때는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기다린다고 오겠어요? 오지 않으니 마음만이라도 더 기억하는 거죠. 다른 건 다 잊어도 자식은 잊을 수가 없어요.”

아이들에게도 큰 시련이었다. 엄마의 사망 소식이 들렸을 때 아이들은 어렸어도 엄마의 부재를 직감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도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제 할머니를 위로하며 제법 어른스러운 말도 건넸다.

“진실이와 진영이가 그렇게 된 이후 3~4년쯤 되면서부터는 잘 울지 않았어요. 하지만 작년에 아빠까지 그렇게 떠나곤 몇 번을 크게 울더라고요. 하지만 5년째부터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어요. 엄마에 대한 슬픈 생각보다는 좋은 기억만 하려는 것 같아요,”

환희는 건강하게 잘 자라 제주도에 있는 국제학교를 다닌다고 했고, 준희는 똑똑하고 밝게 자라 학교에서 회장을 맡고 있다고 했다. 잘 자라주어 더욱 고마운 아이들이다. 환희는 엄마의 얼굴을 그대로 빼닮았다. 어떻게 보면 삼촌인 최진영하고도 많이 닮았다.

“애들이 커가면서 어쩔 때 보면 진실이랑 똑같고, 어떻게 보면 진영이랑 똑같고, 어떻게 보면 아빠랑 닮았어요. 수시로 놀래요. 보면서도 ‘아, 피는 속일 수가 없구나’ 생각하죠. 환희에게도 ‘너는 어떻게 삼촌하고 똑같니?’ 하고 물어보면 좋아해요.

살도 많이 빠지고 키도 훌쩍 컸어요. 하루가 다르게 부쩍 크는 모습을 보면 문득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싶어요. 엄마 아빠 없이 잘 자라준 아이들이 대견해요.”

정옥숙 여사는 활짝 웃었다. 슬픔이 웃음으로 바뀌기까지는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진실이와 진영이가 있을 땐 환희와 준희가 어떻게 크는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6년 전부터는 아이들의 손짓, 발짓, 하품하는 입과 밝게 웃는 모습까지 다 기억할 수 있게 됐어요. 어쩌면 이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죠. 아이들 덕분에 저도 남은 삶을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고맙다 내 딸아. 사랑해 내 딸 진실이.”


아름다운 우정
최진실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던 동료들도 6주기 추모식을 위해 이곳에 모였다. 최진실 사단이라고 불릴 만큼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던 그들, 바로 개그우먼 이영자와 사업가로 성공한 홍진경, 메이크업 아티스트 조성아 원장이었다.

최근 암 투병을 고백했던 홍진경은 치료를 받고 있는 몸임에도 이곳을 찾아 여전히 식지 않은 우정을 보여주었다. 이영자는 일년에 한 번만 찾아온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금세 비석 앞에서 숙연해졌다.

뒤이어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비석 속에서 웃고 있는 최진실의 모습도, 주변을 둘러싼 국화도, 모인 사람들까지도 모두 지난해와 같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

“진실아, 미안하다. 일 년에 한 번 널 찾는다. 바쁘다는 핑계 대서 미안해.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아졌어. 정말 잘 살고 있어. 고맙다. 이제 네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이영자는 한결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사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두려워. 네가 가고 난 뒤 3~4년간은 네가 없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얼떨떨한 기분이었어. 그땐 무서워서 아니라고 부정만 했는데 사실 네가 너무 그립다. 네가 있다면, 네가 있었다면 우린 지금도 함께 웃고 있을 텐데. 여전히 사랑하고 여전히 그립다.”

추모식은 예배 형식으로 간소하고 조용하게 치러졌다. 홍진경은 찬송가를 부르는 중간에 목이 가늘게 떨리기도 했고 기도할 땐 눈을 꼭 감았다. 추모식을 마친 뒤 다시 모인 그들은 하늘에 있는 친구에게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네 몸은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정신적으로, 그리움으로 함께 해주니까 계속 같이 있는 것 같아. 사람들이 그렇게 널 기억하고 찾아주는 건 함께 있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6년 동안 우리에겐 많은 일이 있었어.

특히 진경이는 너를 잃은 아픔을 이겨냈기 때문에 본인의 아픔도 잘 견디고 있는 것 같아. 앞으로 건강하라고, 라엘이 시집보내고 사위 보고, 손주 볼 때까지 건강할 수 있게 네가 도와줘.”(이영자)

“언니, 언니가 좋은 곳에 있을 거라 믿어. 남은 사람들끼리 어떻게 하면 서로 의지하면서 열심히 살고, 또 여전히 우릴 지켜봐주시는 분들에게도 꿋꿋하고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릴까가 남은 숙제 같아. 환희와 준희, 잘 길러내는 어머니 옆에서 우리들이 돕고 보필하고 서로 의지하면서 예쁘게 살아가는 모습 보여줄게.”(홍진경)

세상을 떠난 지 6년. 그럼에도 최진실은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 팬들에겐 영원히 스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환희의 제주 생활

환희는 강해지고 있다. 자신이 멘토라고 생각했던 닉 부이치치의 말처럼 과거가 자신을 지배할 수 없게 말이다


열네 살이 된 환희는 홀로서기 위해 세상으로 한 발자국을 내미는 중이다. 현재 제주도에 위치한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는 환희는 6년 전보다 부쩍 컸다. 키는 벌써 170cm가 넘었고 얼굴도 잘생겨 학급에서 인기도 좋다.

엄마의 외모를 꼭 닮아 화제가 됐던 환희는 꿈마저 엄마의 뒤를 따라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6년 전 엄마를 잃고, 사랑하는 삼촌과 아빠를 연이어 잃었지만 환희는 웃는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던 환희가 세상을 향해 문을 두드린다.


환희는 EBS <인생수업>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가수 요조와 함께 열흘간의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이번 여정을 통해 비로소 한층 성장했다. 도약을 위해 처음 발을 내밀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저희를 혼내실 때 이런 말을 하세요.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면 저와 동생을 보살펴줄 사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에요. 첫째니까 준희를 데리고 잘 살면서 보살펴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 여행을 결심했어요.”

요조와 함께 미국으로 여행을 떠난 준희는 자신의 삶의 멘토라고 생각하는 닉 부이치치와 만나게 된다. 닉 부이치치는 선천적으로 팔다리 없이 태어났지만 좌절하지 않고 학업, 운동 등에 도전해 많은 장애인과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인물이다.

“팔다리가 저한테는 엄마, 아빠거든요. 엄마, 아빠 없이 사는 거랑 팔다리 없이 사는 거랑 비슷한 것 같아 닉 부이치치한테 찾아가서 어떻게 그 힘든 것을 극복해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그렇게 만난 닉 부이치치와 이야기하는 환희. 그를 향해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부모님의 탓이라고 생각해본 적 있나요?”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엄마가 간호사라 아이를 임신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거든요. 진통제며 약도 먹지 않았고, 커피도 안 먹었어요. 하지만 결과는 비극적이었죠.

당시 의사는 제가 절대 걷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전 걷고, 뛰고, 축구도 하고 수영도 해요. 스쿠버다이빙까지도요. 인생 전체를 불행하게 여길 수도 있고 불행을 기회로 바꿀 수도 있는데 거기엔 시간이 필요하죠.

언젠가 당신이 고통을 이기고 뒤돌아보면 겪었던 일들 덕분에 강해졌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닉은 그렇게 환희의 상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그분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당신은 팔이나 다리를 줄 수도 있을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환희씨가 더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의 과거에 기회를 주세요. 과거가 당신의 미래를 지배할 순 없어요.”


환희는 강해지고 있다. 자신이 멘토라고 생각했던 닉 부이치치의 말처럼 과거가 자신을 지배할 수 없게 말이다.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엄마가 있는 갑산공원을 찾은 환희는 엄마에게 다짐을 전한다.

“열흘의 여행을 잘 버텼어요. 이제는 학교 가서도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공부도 열심히 할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한테 칭찬도 듣고 행복하게 살 거예요. 그리고 모든 걸 다 이겨내고 나중에 커서 엄마처럼 될 거예요. 엄마, 보고싶어요.”

CREDIT INFO

취재
전유리
사진
신빛, ebs<인생수업> 방송화면 캡쳐
2014년 11월호

2014년 11월호

취재
전유리
사진
신빛, ebs<인생수업> 방송화면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