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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그래퍼 강병인

글씨, 예술로 피어나다

캘리그래퍼, 서예가, 디자이너, 작가. 강병인을 지칭하는 말은 이토록 다양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그는 ‘글씨 예술가’로 불리고 싶다고 답했다.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는 예술가, 강병인을 만났다.

On July 09, 2014

단순히 읽고 쓰던 글씨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꽃’에서는 싱그러운 꽃향기가, ‘봄’에서는 나른한 봄의 아지랑이가 느껴진다. ‘아름답게 쓰다’라는 뜻을 지닌 캘리그래피의 본질을 가장 잘, 느낌 있게 표현하는 사람, 바로 강병인의 작품 이야기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작가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캘리그래피를 대중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해온 동시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소위 대한민국 넘버원 캘리그래퍼다.

그의 활동에는 경계가 없다. <엄마가 뿔났다> <대왕세종> <정도전> 같은 각종 드라마와 <의형제> 등 영화 타이틀, 온 국민이 사랑하는 소주 ‘참이슬’의 로고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치며 제각각의 느낌으로 탄생했다. 한글의 뜻과 글꼴의 아름다움을 살린 그의 순수 작품은 대중의 감성을 관통하며 호응을 얻고 있다. 한글을 읽지도 못하는 외국인에게까지 팔린다고 하니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폭넓게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산골 소년, 달콤한 유혹에 붓을 잡다

강병인은 경상남도 합천 산골 오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산으로 강으로 뛰어다니는 게 일상이었고, 소일거리 삼아 이리저리 소를 끌고 다니며 풀을 먹였다. 그런 그가 붓을 잡은 건 고작 열세 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요. 선생님이 서예반에 들어오면 꿀을 실컷 먹게 해주겠다고 해서 처음 시작했어요. 시골이라 학교에서 선생님이 양봉도 했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때였고 시골이라 달콤한 간식도 없으니 꿀의 유혹에 넘어간 거죠. 원래 그림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해서 화가를 꿈꿨는데 서예를 해보니 정말 좋더라고요. 칭찬도 많이 받았고요. 꿀과 칭찬이라는 ‘당근’이 있었기 때문에 즐겁게 했어요.”

이렇듯 우연히 붓과 먹을 친구 삼은 강병인은 중학교 때 ‘영원히 먹과 함께하겠다’는 다짐을 담아 스스로 ‘영묵(永墨)’이라는 호를 짓게 된다. 한창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고 철없이 행동하는 사춘기의 절정인 중학교 시절, 강병인은 이미 평생을 글씨 쓰며 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치 운명처럼.

“교과서에서 추사 김정희의 글을 보고 ‘나도 이 길을 가자’고 결심했어요. 어렸지만 추사의 글을 쭉 보면서 ‘한자로는 내가 따라갈 수 없겠다. 나는 한글 서예의 대가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갖게 된 거죠. 그 꿈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올 수 없었을 거예요. 그 후로는 마냥 글씨 쓰는 게 좋아서 어딜 가든 붓과 함께였고 신기하게 늘 글씨와 인연이 닿았어요. 군대에서는 새벽 1시까지 근무하고 글씨를 쓰기도 했어요. 보직도 기록병이었고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고무신 공장, 가구 공장 등을 전전하며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꿈을 포기할 수도 있는 힘겨운 일상이었지만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꿈을 지키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나 열정 때문이 아니라 글씨를 쓰는 것이 그저 삶의 일부였다는 것이 강병인의 심플한 답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어요. 그저 운명이라고 할밖에. 주변에 서예를 하도록 이끌어주는 멘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좋아서 했으니까. 선배의 소개로 서울에 올라와 우연히 출판사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어서도 책상 한쪽에는 언제든지 글씨를 쓸 수 있도록 붓과 먹이 있었어요.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글씨를 썼죠. 하루하루의 이야기를 글씨로 채워나갔어요.”

취미로 글씨를 쓰며 디자이너로 살아가던 1990년대 초중반, 강병인은 일본 여행을 가서 캘리그래피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길을 다니다 보니 붓글씨로 쓰인 간판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서점, 백화점, 식품점을 가도 다 붓글씨였어요. 그때 처음으로 서예가 상업적으로도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우리나라에서도 방송국에서는 조금씩 쓰고 있더라고요. 대신 그때는 캘리그래퍼의 개념 대신 서예가나 그래픽 디자이너인 방송국 직원이 그때그때 필요한 글씨를 써서 넘기는 식이었어요. 그러다 IMF가 터지고 운영해오던 디자인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천천히 준비해온 이쪽 길을 걷게 된 거예요.”

일본에서 다양한 붓글씨를 보고 온 강병인은 한글 서예전을 다니며 고민했다. 한문은 다양한 서체가 많은데 왜 한글은 궁서체나 판본체밖에 없는지, 구도는 왜 하나같이 다 똑같고 가지런히 예쁘게만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한글도 추사처럼 내용과 글귀에 맞게 글을 쓰면 안 되나’ 하고 생각했다.

강병인의 말에 따르면 추사 김정희는 서예의 뿌리와 정신, 법도를 관통한 후에는 굉장히 자유로운 글씨를 썼다. ‘법을 따랐지만 법 밖에 있는’ 추사의 글을 보면 글귀마다, 내용에 따라 서체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런 이유로 그는 한글의 글꼴을 비틀어보기도 하고, 단어의 뜻에 따라 다르게 느낌을 살린 글씨를 썼다. 책이나 드라마의 제목은 철저히 내용을 분석해 표현했다.

“김희애씨와 김상중씨가 나온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 타이틀을 제가 작업했는데, 사실 정을영 PD는 전체를 발랄한 한글체로 써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내용을 살펴보니 중년 남녀의 불같은 사랑 이야기더라고요. 그래서 여러 가지 예시 중에 ‘여자’를 한문으로 쓴 <내 남자의 女子>를 끼워 넣었어요.

두 한문이 합쳐지면 좋을 호(好) 자도 되니 남녀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에 어울린다고 생각한 거죠. 김수현 작가님이 알아봐주실 거라는 믿음도 있었는데 역시 통했고요. 그 이후로 김수현 작가님의 최근 작품인 <세 번 결혼한 여자>까지 대부분 제가 타이틀을 썼어요. 농담처럼 ‘나도 김수현 사단이다’라고 말해요.(웃음)”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캘리그래퍼로서 업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국민 소주 ‘참이슬’, 개인적으로 의미 있게 생각하는 작품으로는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타이틀을 꼽았다. 7년 전 작품임에도 아직도 많은 사람이 기억할 정도로 대중과 친숙해진 작품이라는 것. 또 강병인의 캘리그래피가 더해져 더 큰 성과를 이루게 된 베스트셀러 <행복한 이기주의자>와 전통 소주 ‘화요’도 기억에 남는 작업이다.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다른 제목으로 발간됐다가 판매가 잘 안 돼 제목을 바꿔 재출간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경우예요. 현재 제목의 글꼴 작업을 제가 한 것이고요. 2006년 발간된 책인데 20만 부 이상 팔렸고 지금도 팔리고 있다니 대단하죠. 광주요의 전통 소주 ‘화요’도 처음에 한문으로 출시됐다가 한글로 바뀌었어요. 한문이 너무 어려워 사람들이 읽지 못한 거죠.

대신 ‘불처럼 일어났다가 점점 평화로워진다’라는 한문의 의미를 살려 글씨를 썼고, 한글로 바뀌어 출시된 후 매출이 올라갔어요. 요즘에는 군 장성들이 ‘화요’를 양주 대신 즐겨 마신다고 하더라고요. 우리의 전통 술과 도자기, 현대적 감성의 디자인과 마케팅이 어우러져 성과를 이룬 좋은 사례라 디자이너로서 의미 있게 평가해요.”

이처럼 전통 서예의 틀을 벗어난 강병인의 파격적인 행보에 기존 서예가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했다. 예로부터 ‘서예’라 함은 전통과 법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조금은 폐쇄적인 예술 분야가 아니던가.

“기존 서예가들의 반응은 우려와 비판이 섞여 있었어요. 심하게 말하는 분들은 ‘한글 서예를 무너뜨리고 있다’고도 했고, ‘저게 뭐하는 짓이냐’는 막말도 했어요. 어떤 분야든 아무리 가치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기존의 틀을 깨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 당대 예술가들의 몫인데 계속 전통에만 가두려고 하는 게 저는 답답했고요.

그리고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죠. ‘봄, 꽃, 춤, 숲 등 내 순수 작품을 통해 한글의 새로운 꼴과 조형적 가치, 아름다움도 보게 될 거다’라는 걸요. 어떻게 보면 오기였어요. 한글을 자꾸 못났다고 하니까.”

결국 강병인의 도전은 통했고, 200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에는 캘리그래피 열풍이 시작된다. 방송가, 충무로, 출판계는 물론 각종 제품 로고에도 유행처럼 캘리그래피가 사용되며 광고 디자인, 마케팅 분야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역할로 자리 잡은 것. 전통 서예를 고집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강병인을 인정하고 그가 걸어온 길을 뒤따르려 하고 있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최고 서예가들이 하는 강좌가 있는데 지난해 그곳에서 정식으로 캘리그래피 수업을 하면서 뿌듯했어요. 그것도 서예가들을 대상으로 말이죠. 그리고 가장 기분 좋은 건, 예전에는 서예가들 사이에서 한문 서예를 해야 더 가치 있고 인정받는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다들 ‘한글, 한글’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전에는 한글 서예는 부녀자들의 취미생활 정도로 취급하고 등한시했는데 역전된 거죠. 한편으론 ‘내가 그 길을 앞서 가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해요. 다른 분들이 일찌감치 한글의 가치를 깨닫고 많은 작업을 했다면 제가 이만큼 주목받지 못했을 테니까요.(웃음)”

그러면서 강병인은 서예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한발 앞서 안고 있다.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게 여겨지고 있는 서예를 재미있게 가르쳐서 알려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 캘리그래피의 기본은 서예이고 우리나라 전통 서예의 명맥이 이어져야 캘리그래피와 서예, 모두 좋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서예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진정한 캘리그래퍼의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서예라는 것이 단박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많은 어린이들이 서예에 재미를 느끼고 시작하는 게 중요하죠. 제가 잠깐의 경험으로 평생 글씨를 쓰고 있듯, 어떤 아이가 재능을 타고났을지 모르니 경험을 하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현재 서예 교육은 전통과 법도를 너무 따지고 어렵게 가르치다 보니 재미가 없어요.

법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일단 흥미를 불러일으킨 후 법도를 가르쳐도 늦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문화체육부 명예교사로 임명된 후 자청해서 초등학교에 가서 캘리그래피 수업을 열고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잖아요. 앞으로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낼 생각이에요.”

업계 최고의 캘리그래퍼라는 평가와 함께 순수 예술 작가로서도 호평을 받고 있는 강병인. 상업과 예술을 오가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지키고 있는 비결과 작품 철학을 물었다.

“특별한 비결보다는 경험이 자산인 것 같아요. 시골에서 살면서 온갖 자연을 경험한 것, 공부만 하지 않고 공돌이 생활도 하고 늦은 나이에 공부도 해본 것, 모두 작품 활동에 원천이 됐죠. 그리고 저는 24시간 끊임없이 뭔가를 생각해요. 쉬지 않고. 때론 대화를 하면서도 혼자 다른 세상에 갖다 오기도 하죠.(웃음)

작품 철학이라…. 제 작품의 특징이라면 늘 그 안에 자연과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이 울고 웃고 춤추고, 자연은 꽃이 피고요. 그 속에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는 소리도 담아내려고 노력해요.”

강병인의 미래는 어떨까? 그는 추사 김정희의 명언인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라는 말을 인용했다.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아야 글씨에 문자의 향기가 나고 책의 기운이 풍긴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끊임없이 배움에 정진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쓴 글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 생각하면 막 쓸 수 없어요. 하지만 누가 처음부터 잘 쓸 수 있겠어요. 저도 똑같아요. 예전에 쓴 거 보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고 그래요.(웃음) 하지만 전 다 오픈하죠. 그것도 제가 살아온 과거이고 아직 공부를 하는 중이니까 부끄러울 것도 없으니까요.

잘못 썼다고 해서 뭐가 문제가 될 것이며, 부족하면 좀 어때요. 제가 제 일에 자신감을 갖는 부분이 그거예요. 아직 공부하는 중이라 두려울 게 없다는 거. 오히려 누가 부족하다고 말하면 더 즐거워요. 공부할 게 생기는 거잖아요.”

자타 공인 최고라고 인정받고 있는 그는 아직도 배울게 많아 기쁘단다. 강병인의 미래는 한글의 미래다.

2011 강병인 캘리그라피 개인전 <봄날 오후 글꽃 하나 피었네>에 전시되었던 작품, ‘봄날_긴 그리움’.

깊은 산의 이미지를 담은 작품 ‘숲’(2009)(왼쪽)
강병인의 글씨 ‘봄’을 철물 제작가 이근세가 입체화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오른쪽)

CREDIT INFO

취재
이현경
사진
김승환, 강병인 제공
2014년 07월호

2014년 07월호

취재
이현경
사진
김승환, 강병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