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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의 여자’ 김경희씨 40년 인생 풀 스토리

재벌가 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공주처럼 자란 여주인공은 꽃다운 스무 살 나이에 운명의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가로, 무려 서른여덟 살 연상에 이미 가정까지 있는 상황. 아침 드라마 줄거리가 아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 스토리의 여주인공은 김경희씨. 기업가는 바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On July 04, 2014

고 정주영 회장의 숨겨진 여인으로 살아온 김경희(62세)씨가 40년여 만에 처음으로 털어놓은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었다. 두 사람은 1973년 처음 만나 딸 둘을 낳았지만 그 존재는 30년 가까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러다가 정 회장이 타계한 2001년 김씨가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고, 잠잠해질 무렵인 2006년 ‘유산상속조정신청’으로 다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김경희씨는 고등학교 졸업 전 영국과 러시아로 발레 유학을 준비하던 중 재미 삼아 본 탤런트 시험에 합격,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1973년 어느 날, 사교 모임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급 자동차 한 대가 김씨 앞에 서더니 한 남자가 내려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과의 첫 만남이다. 그때 그녀는 그의 나이도, 부인과 자녀가 있다는 사실도,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큰 기업가가 될 사람이라는 것도 몰랐다.

이후 정 회장은 밥을 사준다는 핑계로 자주 연락을 해왔고 김씨도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몇 번의 만남 후 정 회장은 김씨 어머니에게 결혼 승낙을 받아낸다. 하지만 출장 등의 핑계로 결혼식은 차일피일 미뤄진다. 대신 정 회장은 김씨를 데리고 자신의 부모님 산소를 찾아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김씨 어머니 임모씨는 나중에야 자신의 딸이 ‘세컨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김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TV를 통해 아빠(정 회장)가 부인과 자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이미 늦어 그런 사실을 알고도 돌이킬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연기자 생활을 반대한 정 회장의 뜻에 따라 모 여대로 학적을 옮긴 김씨는 대학 졸업 후 대학원 과정 중에 미국으로 떠난다. 현대그룹이 번창하고 정 회장이 더욱 바빠지면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우울해 하자 어머니가 “미국으로 가면 남들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며 이민을 권한 것이다.

미국에 간 김씨는 정 회장과 만난 지 6년째 되는 1979년 첫딸 그레이스 정을 낳는다. 정 회장은 자신과 쏙 빼닮은 그레이스를 보고 흐뭇해했다고 한다. 2년 뒤인 1981년에는 둘째 딸 엘리자베스 정이 태어난다. 첫딸을 낳은 이후 정 회장은 김씨에게 매달 1천 달러씩 송금해줬다. 자식을 키우며 살기에는 적은 돈이었다. 김씨는 당시를 “어머니가 먹여 살렸다”고 회상하며 “정 회장은 내가 우리 어머니 돈으로 풍족하게 사는 것도 못 참아 했다”고 말했다.

그 후 김씨는 자격증을 취득해 부동산 중개업자로 살아간다. 아이들은 똑똑했다. 주위에선 영재학교를 보내야 한다고 했지만 정 회장은 “아이들은 평범하게 길러야 한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아이들이 커가면서도 정 회장과 때때로 만났다. 정 회장이 김씨에게 전화해 약속 장소를 알려주면 그곳으로 찾아가 만나거나, 정 회장이 미국으로 올 때면 김씨 집에 들르는 식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정 회장과 김씨의 관계에 터닝 포인트가 되는 1992년 대통령선거가 시작된다. 김씨는 벼르던 아이들 호적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고, 대선 출마를 결심한 정 회장은 “대통령만 되면 네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해주겠다”고 김씨를 회유했다.

김씨가 계속 다그치자 정 회장은 “기다리면 될 텐데 왜 그렇게 괴롭히냐? 사업이 중요하지 네가 중요해?”라고 역정을 냈고, 이후 김씨를 피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당시 아빠가 호적 문제 때문에 골치 아팠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대선이 끝난 후에도 통 만날 수 없었다. 정 회장의 변호사가 둘 사이를 막는 듯했다. 김씨는 “변호사를 통해 만나자는 말을 넣어도 변호사는 ‘정주영 회장이 많이 아프다’는 말로 만남을 훼방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어쩌면 둘 사이의 일이 그때부터 가족들 귀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고도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김씨는 정 회장이 “ 경희야, 경희야!” 하고 간절하게 외치는 꿈을 꿨다. 불길해 알아보니 정 회장이 병원에 실려가 중태라는 소식이 들려왔고, 얼마 후인 2001년 3월 21일 정 회장은 영면에 들었다.

김경희씨와 정주영 회장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의 어린 시절 모습.


정 회장이 타계하자 김씨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머릿속이 온통 아이들을 정 회장 호적에 올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김씨는 주위에 도움을 청해 변호사를 고용하고 친자확인소송을 준비한다. 김씨는 “소송을 준비하는 도중 현대 측이 변호사를 보내 나에게 얼마를 원하는지 물었다”며 “액수에 상관없이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두 딸을 호적에 올리는 것”이라고 뜻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김씨는 두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갔고, 현대 측에서는 정 회장의 아들들과 부인 변중석(작고)씨가 나왔다.

여섯 명의 피를 뽑아 친자 확인 과정을 거쳐 99.9% 친자가 맞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날로 두 딸은 정주영 회장의 딸들로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유산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김씨는 두 번째 소송을 진행한다. ‘상속재산분할협의계약의변경’에 대한 조정신청. 그때쯤 상대방 변호사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고 한다. 앞으로는 ‘가족 같은 대우’를 해주겠다며 합의를 하자는 것. 김씨가 가장 바라던 조건이었다.

김씨는 현대 측의 제안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다시는 소송을 하지 않겠다는 서류에 서명했다. 그 서류에는 몇 가지 조항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정주영 회장의 제사에 현대 측이 날짜를 미리 통보하고 김씨와 두 딸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김씨는 소송 포기 대가로 40억원을 더 받았다.

‘가족 같은 대우’를 합의하고 처음 돌아온 정주영 회장의 기일, 변호사는 날짜를 알려줬다. 미국에 사는 두 딸도 아빠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정 회장의 자택을 찾은 두 딸을 보안 요원이 문 앞에서 가로막았고, 어찌어찌해서 겨우 집 안으로 들어가보니 벌써 제사는 다 끝나 있었다. 그 후 직원이 나와 두 딸에게 수위 방으로 들어가라고 해서 가보니 그곳에 제사상이 따로 차려져 있었고, 그곳에 인사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둘째 딸은 집으로 돌아와 김씨 앞에서 밤새도록 울었고 현대가 사람들에 대해 “Devil(악마)”이라고 외치다 혼절해 병원에 실려갔다. 그 후 두 딸은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는다.

김씨는 유산 상속을 통해 56억원, 두 번째 소송에서 40억원을 받았다. 1백억원에 달하는 큰돈이다. 하지만 김씨가 이 돈을 받기 전 그녀의 재산은 이미 7백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김씨의 어머니인 임씨가 큰 부자인 데다 어머니가 사둔 땅값이 올라 그만큼의 재산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 회장의 유산 약 1백억원, 이전 재산 7백억, 도합 8백억원의 돈을 가졌던 김씨는 현재 빈털터리가 되었다. 반평생 정주영 회장의 그늘 아래 숨어 산, ‘세상 물정 모르는’ 여인에게 큰돈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사기꾼들이 접근했다. 김씨의 지인들은 “김씨는 사람을 너무 잘 믿는 것이 탈이다. 사기꾼이라고 상종하지 말라고 해도, 돈 좀 꿔달라는 말에 어떻게든 빌려준다. 그러다 이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김씨의 재산은 온데간데없이 거액의 빚만 쌓여 있다.

“이제 합의는 없다. 소송이 어떻게 되든 끝까지 해볼 것이다.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김씨는 세 번째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두 번째 소송에서 합의한 내용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합의는 무효라는 것이 김씨의 주장이다. 김씨는 “제삿날 찾아가면 직원들조차 나를 무시한다. 평생 무시당하는 팔자인가 보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이 다 무시해도 아빠만은 그렇지 않았는데…. 우리 딸들은 그래도 반은 정주영 회장 피가 섞였는데 왜 그렇게 벌레 보듯이 하는지….”

김씨는 유언장을 꼭 보고 싶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의 유언장에 대해선 언론에서도 수없이 많은 추측성 기사가 나왔다. “정주영 회장이 속일 사람이 아니다. 아빠가 ‘아무려면 내 새끼 살 길도 마련해놓지 않겠어요? 변호사와 상의해 어머니(김씨의 어머니)와 경희, 아이들까지 배려해놓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김씨는 미국에 온 정주영 회장과 짧은 시간 만날 때도 아이들이 어떻게 학교에 다니는지, 어떤 친구들을 만나는지까지 체크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렇게 꼼꼼한 사람이 딸들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회장님의 유언장을 보고 싶은 건 아빠가 나에게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란 것을, 회장님은 결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정주영 회장이 김경희씨에게 보낸 손편지.

아래는 젊은 시절의 김경희씨.


“내가 바보라 당하는 겁니다”

김경희씨는 말끝마다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 스토리를 듣고 있노라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김씨에게 의문점을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그녀와의 인터뷰 중 그 부분만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아빠’ 등 정주영 회장에 대한 김씨의 호칭은 그대로 썼다.

정주영 회장과 만난 1973년, 정 회장은 만 57세고 김경희씨는 이제 갓 스물이었다. 상식적으로 이런 만남이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에는 그렇게 나이가 많은지 몰랐다. 실례라고 생각돼 묻지도 않았다. 여자 마음이 그렇다. 남자가 좋다고 하면서 자꾸 따라다니고 잘해주는데 그 남자가 싫지 않으면 마음이 가게 돼 있다.”

본인은 그렇다 치고 어머니까지 결혼을 허락하신 부분도 의아하다. “그 사람 기가 엄청 셌다. 그 기에 눌린 것도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정 회장이 결혼 허락을 구하면서 ‘밥은 굶기지 않겠다’라고 한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한다. 허황되거나 꾸밈이 없는 말이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눈이 초롱초롱한 게 마음에 든다고도 했다.”

(나중에 김씨의 어머니 임씨를 만났을 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다음은 임씨 어머니의 대답이다. “나이는 물어보지도 않고 조금 차이가 있겠지 생각했다.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도 몰랐다. 머리도 새까맣고 키도 크고 젊어 보여서 신랑감으로 저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무조건 그레이스 아빠가 좋더라고. 눈에 백태가 꼈는지, 하늘의 인연인지. 애가 좋다고 하니까 시집 보낸 거다.”)

사람들은 김경희씨가 ‘돈 보고 정 회장을 만난 것 아니겠느냐’고 의심할 게 빤하다. “돈 보고 만난 것이 아니다. 우리 집도 엄청난 부자라 돈은 많았다. 그 사람과 만날 때 차를 직접 운전해서 날 데리러 왔는데, 사실 그때 속으로 ‘차가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사람 재산에 대해 들은 것도 자동차 공장을 갖고 있다는 말이 전부였다.”

결혼 후 정 회장의 경제적 지원도 생각보다 적다는 생각이 든다. “(정 회장이) 지독하게 검소했다. 워낙 검소해서 어머니 돈도 못 쓰게 했다. 구두도 바닥에 산 날짜를 적어두고 10년을 채워야 버렸다. 옷도 재킷 안에 구매 날짜를 수놓아서 10년을 입고 버렸다. 어느 날은 구두가 하도 후줄근해서 제발 사라고 했다가 엄청 혼났다.”

소송이 끝난 후에도 유산에 대해 계속 문제 제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아빠 재산이 10조원 이상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때였다. 하지만 두 딸이 유산 상속을 받을 때 아빠 재산을 8백억원, 부채 1백30억원가량으로 계산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현대가 얼마나 큰 회사인데. 또 사전 상속을 받은 자식들은 상속분을 미리 받았다고 계산하고 분배해야 하는데 분배 과정이 일률적으로 이뤄졌다.”

어쨌든 2차 소송 후 40억원을 더 받고 합의했으면 끝난 것 아닌가? “내가 소송을 포기한 이유는 ‘가족 같은 대우’를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난 돈보다 똑바로 살고 싶었던 사람이다. 만약 끝까지 소송을 했다면 40억원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지만 가족이란 말에 합의한 것이다. 하지만 가족은 없었다. 철저히 무시당했다. 반이라도 아빠 피가 섞인 동생이, 망해서 차에서 자고 있다는데 단칸방이라도 마련해줬다면 난 소송할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8백억원대에 이르렀다는 그 많던 재산은 다 어떻게 된 건가? “크게 사업을 벌였는데 사기꾼들이 몰려와 사기를 많이 당했다. 한번은 건물 5채를 수리하도록 맡겼는데 1년 만에 물 새고 난리가 났다. 다시 수리를 해야 해서 돈이 이중 삼중으로 들었다. 좋은 땅이라고 해서 산 땅은 오히려 값이 내려갔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빚이 쌓이고, 이 빚을 감당 못하게 돼 한 번에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갔다.”

또다시 소송을 걸면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면 되냐’고 물어볼 듯하다. “얼마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날 속였다.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속지 않을 것이다. 되든 안 되든 끝까지 소송을 해볼 생각이다.”

굳이 책까지 출판한 이유는 무엇인가? “저들(현대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정 회장과 내가) 오다가다 만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렇게 스쳐갔던 여인들하고는 다르다. 그런 착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의 사랑 정주영>이라는 책을 냈다. 난 한 사람만 보고 산 사람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일본, 미국 등 전 세계에서 출판할 거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나쁜 면은 고치도록 하고 싶은데 비서들이 막아서 현대가에 말을 할 수도 없다. 돈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니란 것을 보여주고 싶다. 애들도 보게 만화로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은 둘째가 딸이라서 아쉬워했다고 했는데 만약 아들이었다면 달라졌을까.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듯하다. 만약 (정 회장 생전에) 호적에 올리려면 본가로 아이를 보내야 했다. 아빠 나이가 또 많잖은가. 당시 변중석 여사도 아팠다. 보내도 유모에게서 키워질 것이 뻔했다. 돈보다는 애들이 어렸을 때 사랑을 받아야 하니까 내가 키우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 것이 후회가 되지는 않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그때 보냈어야 하나…. 그런 후회도 들지 왜 안 들겠나. 그때 애들 보내고, 나도 재혼하고 그랬으면 그게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간혹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CREDIT INFO

기획
이현경
취재
김태현(<일요신문> 기자)
사진제공
<일요신문>
2014년 07월호

2014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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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경
취재
김태현(<일요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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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