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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묘역에 잠든 고 채명신 장군 부인 문정인 여사

군인의 아내로 살아온 60년 인생 고백

현충원 설립 사상 처음 장군의 신분으로 사병묘역에 안장되어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된 고 채명신 장군. 진정한 전우애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채장군의 부인 문정인 여사와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 고인을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인 데다, 결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기사화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삼고초려 끝에 잠깐의 시간을 얻어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문정인 여사를 만날 수 있었다.

On January 24, 2014


어떻게 전쟁을 할까 싶을 정도로 집에서는 순한 남편
“남편이 떠났다는 게 아직도 실감나지 않아요. 지금도 옆자리에 남편이 있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게 되고. 문득문득 생각이 많이 나네요. 마지막까지 남편이 혼자 남겨질 내 걱정을 참 많이 했어요. 당신이 가고 나면 내가 혹시라도 충격을 받을 까봐 아이들에게도 항상 엄마 잘 챙기라는 부탁을 하고 떠났죠.”

볕이 잘 드는 거실에 앉아 먼저 떠난 남편을 회상하는 문정인(84세) 여사. 우리가 알고 있는 채명신 장군은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을 지냈고, 장군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사병묘역에 안장된 그 누구보다 용맹한 군인이다. 그러나 문정인 여사에게 채명신 장군은 군인이기보다 순하고 평범한 남편의 모습이 먼저다. 아내의 의견을 잘 들어주고 항상 긍정의 화답으로 고개를 끄덕여주던 남편. 큰소리 내는 법이 거의 없던 남편이었다.

“남편이 집에서는 워낙 순한 분이라 오죽하면 제가 ‘당신 이렇게 사람이 유해서 전쟁터에서는 어떻게 전쟁을 해요?’라고 물어본 적도 있다니까. 그랬더니 남편이 허허 웃으면서 ‘밖에서, 특히 전쟁터에서는 180도 달라지지’라고 대답하더라고요. 군대에서 굶은 경험도 있고 해서 그런지 음식 투정을 한 번도 하는 법이 없었죠. 뭐든 맛있게 잘 드셨어요.”

아내 앞에서는 순한 남편이었지만, 자녀들에게는 엄한 아버지였다. 특히 음식 투정과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에 대해 엄격했다. 전쟁터에서 일주일 넘게 굶은 적도 있었던 채명신 장군은 음식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자녀들이 어릴 적부터 음식의 소중함을 잘 알도록 가르쳤다. 또한 자녀들에게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는데 사병들에게도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그만큼 사병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

“아버지가 워낙 사병들만 챙기니까 둘째 딸이 어릴 적에 늘 ‘아버지는 내가 좋아, 군인 아저씨가 좋아?’라고 물었어요. 그러면 남편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어서 대답을 회피하거나 갑자기 화제를 돌려 딴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그냥 딸 앞에서는 네가 더 좋다고 말해주면 어때서. 그러다 나중에는 ‘너랑 군인 아저씨랑 둘 다 똑같이 좋지’라고 답하더라고. 사병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남달랐어요.”

장군묘역이 아닌 사병묘역에 잠든 영원한 군인, 채명신 장군
지난 11월 25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 채명신 장군은 “나를 파월 장병이 있는 묘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생전에도 현충원을 방문할 때면 입버릇처럼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장군의 뜻을 가족들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결국 고인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 고인이 원하는 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고인이 소망했음에도 장군의 신분으로 사병묘역에 안장되기까지는 쉽지 않은 절차가 필요했다. 채명신 장군이 별세하기 전 가족들이 현충원에 찾아가 그 뜻을 전했지만 현충원에서는 군인과 군무원의 묘역을 장군묘역, 장교묘역, 사병묘역으로 구분한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13조)’을 근거로 들어 난색을 표했다. 지금껏 장성 출신이 사병묘역에 안장된 예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남편이 돌아가시기 3일 전에 남편의 뜻을 담은 편지를 써서 청와대에 보냈습니다. 고맙게도 남편의 뜻이 받아들여졌고 그렇게 원하던 사병묘역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죠.”

일반 사병의 묘지 크기는 3.3m²(1평)로 봉분도 없고 단출한 비석이 하나 세워진다. 이에 비해 장군 묘지는 26.4m²(8평)로 사병 묘지의 8배에 달한다. 채명신 장군이 묻힌 곳은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있는 2번 사병묘역으로 이미 자리가 꽉 찼지만, 입구 쪽의 남은 공간을 활용해 채명신 장군의 묘지를 만들었다. 베트남 참전용사 9백71명이 잠들어 있는 곳. 고인이 평소에도 자주 찾던 그곳에서 이제 동료 병사들과 영원히 함께 쉬게 된 것이다.

“처음에 아이들이 반대한 이유는 사병묘역에는 내 자리가 없을까 봐 그랬어요. 아버지 혼자만 가는 줄 알고. 다행히도 알고 보니 사병묘역에도 20년 이상 함께 산 부부는 옆에 같이 묻힐 수 있더라고요. 아이들이 그제야 안심했어요. 그런데 사람 욕심이라는 게 있잖아. 막상 장군묘역을 보니까 넓고 아주 좋더라고. 그래서 속으로 ‘아이구, 이걸 보지 말 걸 그랬다’ 하고 생각했죠. 그래도 남편이 많은 분들한테 넘치는 사랑을 받아서 서운하거나 그런 건 전혀 없어요. 오히려 고맙죠. 얼마 전 내가 남편 보러 갔을 때도 모르는 어떤 분이 남편 묘지에 꽃을 한 송이 놓고 가시더라고. 정말 훌륭한 분이라고 하면서. 얼마나 고맙고 또 고마웠는지….”

장군의 특전을 마다하고 전장에서 생사를 함께했던 병사들 옆에 조용히 누운 채명신 장군. 육군장으로 치른 그의 영결식에는 많은 이들이 참석해 화제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베트남전 당시 위문공연을 갔다가 인연이 된 가수 패티김이 조가를 불러준 것 또한 잊을 수 없다. 자청해서 월남 위문공연을 온 패티김과의 만남이 지금까지 이어져 패티김은 채명신 장군과 문정인 여사의 금혼식 축가를 불러주는 등 돈독한 우정을 나눠왔다.

남편의 유골을 받게 되는 건 아닌지 마음 졸이며 살아온 장군의 아내
육사 5기 출신인 채 장군은 육군 5사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39세이던 1965년 주월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1969년까지 3년 8개월 동안 베트남의 밀림에서 한국군을 지휘했다.

“남편이 월남에 있을 때 대통령이 우리 가족을 월남으로 보내줬어요. 1968년 1월 구정 공세 때라 사이공에서 포탄이 막 날아오고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거든요. 공항이 폐쇄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남편은 아이들과 내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고 바로 군복으로 갈아입더니 그냥 전장으로 떠나더라고. 우리한테 잘 있으라는 소리도 안 하고. 나는 아이들 데리고 침대 밑으로 피신해야 했는데 말이야. 서운하기도 하고 위험한 전쟁터로 나가는 남편이 걱정돼서 겁이 나기도 하고.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더라고요. 천생 군인이죠.”

총알이 빗발치듯 퍼붓는 위험천만한 전쟁터로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아내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채명신 장군이 월남에 가 있는 동안에는 ‘내가 언젠가 이 사람의 유골을 받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항상 안고 살며 하루도 편안한 밤을 보낸 적이 없다고 한다. 남편의 안전을 걱정하며 동시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던 상황. 행여나 입 밖으로 소리 내면 그 불안함이 현실이 될까 봐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모태신앙이에요. 나야 남편만큼 열심히 믿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독교를 믿고 있으니 그저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남편과 모든 군인들이 무사하길 빌었죠. 아마 모든 군인의 부인들이 나 같은 심정일 겁니다. 그저 살아 있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 말이죠.”

군인의 아내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수월한 삶은 아니었다고 이야기하는 문정인 여사. 신혼 시절에는 남편의 군복무지를 따라 다니며 생활하는 것이 낯설기도 했지만 문정인 여사의 성격 자체가 비교적 환경에 잘 순응하는 편이라 그런 대로 적응하며 살 수 있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오히려 산과 들이 있는 전방에서 생활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한다. 하루 종일 개구리도 잡고 산에 올라가서 아이들과 뛰어놀며 자연을 마음껏 즐겼다.

“그러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친정어머니가 아이들을 많이 돌봐주셨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서울과 전방을 왔다 갔다 하며 생활하고. 혼자 떨어져 있는 남편도 얼마나 아이들이 보고 싶었겠어요. 그래도 티 한 번 안 내요. 표현은 잘 못하는데 속정이 깊은 사람이었어요.”

돌아가신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항상 친정어머니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빤한 군인 월급, 아이 셋을 건사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월급으로 생활하면서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친정어머니가 항상 강조한 말은 “군인은 돈 버는 직업이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돈이 필요하면 당신한테 이야기하라고 하셨어요. 군인인 남편한테는 돈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거였죠. 어려울 때 생활비를 조금씩 보태주시면서 ‘남편한테 돈 이야기하면 남편은 돈의 노예가 되고, 그러면 부패한 사람이 된다’고 하셨죠. 어머니가 여장부이기도 하셨고 참 현명한 분이셨지. 남편이 항상 어디를 가든 자기는 장모를 존경한다고 말할 정도로 둘 사이가 좋았어요.”

채명신 장군과 문정인 여사가 처음 만난 것은 그녀 고향의 지인을 통해서이다. 북한에서 월남해 영덕에 주둔하고 있던 채명신 장군(당시 대령)을 아는 이로부터 소개받은 것. 처음 만났을 때부터 군복 입은 스타일이 워낙 멋있어서 ‘이렇게 군복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호감이 갔다. 물론 첫눈에 반해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펼친 이는 채명신 장군이었다. 지금도 단아하고 고운 외모를 간직하고 있는 문정인 여사는 당시 이화여대 홈커밍 퀸이었을 정도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이었다.

“남편은 전형적인 군인이에요. 신혼 시절 전방에서 생활할 때 다정한 편이라 서운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를 특별히 배려해준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젊은 시절에는 둘이 함께할 시간이 정말 없었죠, 남편이 워낙 바빴으니까. 젊은 날에 둘이서 무엇을 같이 했나 생각해보니 서부영화를 몇 번 같이 본 적이 있어요. 남편이 존 웨인 나오는 서부영화를 좋아했거든요. 누가 군인 아니랄까 봐 영화도 서부영화를 좋아했지요.”

그 누구보다 용맹하고 행복한 군인이었던 남편
전쟁터에서는 그 누구보다 용맹스러운 모습으로 이름을 떨친 채명신 장군. 김일성의 오른팔이었던 길원팔 노동당 제2비서를 생포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백골병단으로 활동하던 중 인제에서 길원팔을 생포한 것이다. 비록 적으로 만났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총명한 군인이라고 생각해 전향을 권유했다. 하지만 길원팔은 김일성이 자신에게 준 권총으로 자결하고 싶다고 말했고, 채명신 장군은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결국 길원팔은 자결을 했고, 그가 북한에서 데려온 10대 남녀 아이를 채명신 장군이 맡게 되었다. 길원팔의 마지막 당부가 그 아이들을 남한으로 데려가 보살펴달라는 것이었다. 그중 여자아이는 전쟁통에 숨지고 남자아이는 채명신 장군이 자신의 동생으로 삼아 대학 공부까지 마칠 수 있도록 돌봐주었고, 훗날 대학 교수가 되었을 정도로 훌륭하게 자랐다.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채명신 장군의 가족과 다름없던 그는 나흘 내내 채명신 장군의 빈소를 지키며 무척이나 슬퍼했다고 한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소신 있는 태도로도 유명했던 채명신 장군은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에 반대해 그해 중장으로 예편하게 된다. 그 후에는 스웨덴·그리스·브라질 대사를 지냈다. 군복을 벗고 나서야 부부가 함께 지낼 수 있는 여유가 조금 생겨 해외여행도 가고 음악회에도 함께 다녔다. 채명신 장군은 50년 가까이 당뇨병을 앓았는데 합병증이 하나도 없었을 정도로 정성스럽게 내조했던 문정인 여사. 매일 아침 6시 30분이면 어김없이 혈당을 체크하고 현미와 건강식 위주로 식단을 손수 챙겼다. 채명신 장군 또한 워낙 절제된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문정인 여사의 말을 잘 들었다고 한다. 문정인 여사가 옆에서 과일을 먹고 있으면 몇 개 정도는 먹을 법도 한데 당뇨병에 좋지 않은 과일은 거의 손대는 법이 없었단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하루 종일 서재에서 책을 보는 거였다고 회상하는 문정인 여사. 햇볕이 좋은 날에는 손잡고 동네 산책을 하며 날씨 이야기도 하고 손자손녀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소소한 일상이 지금 생각해보니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남편은 참 행복한 군인이었어요. 많은 분들의 관심과 사랑, 존경을 받았으니 행복하게 돌아가셨죠. 마지막에 남편이 한 말이 생각나요. ‘당신과 나는 한 몸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하셨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하지 않아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문정인 여사는 지금도 남편이 행복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전우들 옆에 함께 누웠으니 평온한 마음으로 지친 몸을 쉬고 있을 것이다. ‘부부의 사랑은 주름살 속에 산다’고 했던가. 60여 년의 세월을 함께했음에도 아직 남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문정인 여사의 발걸음이 자주 현충원으로 향하는 이유다.

육사 5기 출신인 채 장군은 육군 5사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39세이던 1965년 주월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1969년까지 3년 8개월 동안 베트남의 밀림에서 한국군을 지휘했다.

문정인 여사는 남편이 생전 가장 좋아했던 것은 하루 종일 서재에서 책을 보는 거였다고 회상했다.

고 채명신 장군은 베트남전 참전용사 9백71명이 잠들어 있는 사병묘역에 안치됐다. 고인이 평소에도 자주 찾던 그곳에서 이제 동료 병사들과 영원히 함께 쉬게 된 것이다

CREDIT INFO

취재
이충섭, 박현구
사진
최항석
2014년 01월호

2014년 01월호

취재
이충섭, 박현구
사진
최항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