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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돌’의 유쾌한 반란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됐다. 늙은이 앞에 흔히 붙는 ‘고리타분한’과 ‘뒷방’이라는 수식어도 앞으론 금지다. 젊은이들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유럽 배낭여행에 어르신들이 몸을 실었다. 평균 연령 76세 할배들의 유쾌한 반란.

On September 26, 2013

“일섭이가 70이 넘었나?” - 신구
“아이고, 벌써 그렇게 됐어?” - 이순재
“그럼 맨날 애들이유?” - 신구
“형, 나 만으로 69세.” - 백일섭
“잠깐이야.” - 신구

tvN <꽃보다 할배> 열풍이 심상치 않다. 방송 전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방송이 시작되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많았다’. 이순재(80세), 신구(79세), 박근형(74세), 백일섭(70세) 등 할배들의 배낭여행기를 다룬 이 프로그램은 첫 회부터 4.5%라는 케이블 사상 유례없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할배붐’을 일으키고 있다. 젊은 스타가 아닌 할배들의 여행기는 신선하고 참신했다. 게다가 그냥 할배가 아니다. ‘국민 할배’다. 이제 <꽃보다 남자>의 꽃미남이나 <신사의 품격>의 꽃중년을 운운하는 시대는 지났다. 바야흐로 꽃할배 시대다.
<꽃보다 할배>의 폭발적 인기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데서 나왔다. <해피선데이-1박2일>을 연출했던 나영석 PD가 CJ E&M으로 옮기면서 첫선을 보인 이 프로그램은 예능에서 발상을 바꾼 아이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하고 있다. 사실 무대를 유럽으로 옮기고 출연진을 ‘할배’로 바꿨을 뿐, 콘셉트 자체는 <1박2일>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 차이가 완전히 색다른 예능을 만들어냈다.
“배낭여행은 청춘의 낭만이잖아요. 하지만 어르신들에게는 배낭여행이 모험이 될 것 같았어요. 이런 모험기가 색다른 재미를 줄 것 같아 기획하게 됐죠.”
할배들의 짐꾼으로 이서진(42세)을 섭외한 건 ‘신의 한 수’였다. 어렵고 부담스러운 어르신들을 모실 만한 적임자였다. 기본적으로 어른 공경이 몸에 배어 있고 무엇보다 통역이 되니 섭외 대상 0순위인 건 당연지사다. 결과적으로 짐꾼, 통역사, 심부름꾼, 가이드 등 1인 4역을 해결한 셈이 됐다. 여행 후 4kg이 빠졌다는 후문이다. 이에 대해 나 PD는 “이서진씨를 캐스팅할 때 걸그룹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고 속여서 미안하게 됐다”면서 “두 번째 여행을 다녀오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이서진은 “올해는 많이 바쁠 것 같다”며 응수. 하지만 실제로는 <꽃보다 할배> 2탄 출연을 진지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보통 예능에 ‘설정’이 있다지만 <꽃보다 할배>는 다르다. ‘배낭여행’이라는 틀만 있고, 상황 그대로를 카메라에 담아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행히 4인방의 캐릭터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각자의 생활 방식으로 살아온 이들이기에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담으면 그 자체로 캐릭터가 됐다.

할배들의 4인 4색 무한 매력

꽃할배의 맏형 이순재는 ‘직진 순재’로 불린다. 매사 적극적이어서 늘 앞만 보고 간다. ‘하나라도 더 보자’는 경험주의자이기도 하다. 걸음 속도는 가히 경보 수준. 카메라맨도, 막내 백일섭도 그의 속도를 맞추기가 고통스러웠을 정도다. 열흘간의 여행을 다녀온 후 사흘 동안 누워만 있었다고 하니, 그가 여행을 즐기는 스타일이 얼마나 과격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는 예상치 못한 답변으로 좌중을 초토화하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제작진의 스카이다이빙 제안에 “관을 3개 짜놓던가”라고 말하거나 번지점프 이야기에 “송장 치울 일 있냐”고 버럭하는 식. 또한 “배낭여행은 6·25 때 쌀자루를 메본 이후 처음”이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내는 스타일이다. 꽃할배의 둘째 신구는 ‘구야 형’으로 통한다. ‘구야 형’은 박근형과 백일섭이 신구를 부르는 호칭으로, ‘구 형’이 버릇없게 느껴질 것 같다는 이유로 ‘구야 형’으로 통일했다. 그는 일상이 매너고, 생활이 배려다. 관절염으로 뒤처진 막내 백일섭을 챙기고, 직진 본능의 맏형이 무안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의사를 표현한다. “천천히 좀 가”가 아니라 “같이 가자”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런 매너 덕분에 그는 할배 4인방 중 가장 많은 여성 팬을 보유하고 있다. 꽃할배의 셋째 박근형은 ‘젠틀 근형’이다. 4인방에서 ‘비주얼’을 담당하는 로맨틱한 할배다. 어디를 가든 항상 아내와 통화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아끼지 않는다. 주 전공은 분쟁 중재. 항상 떼를 쓰는 백일섭과 형님들 사이에서 조율하느라 진땀을 빼고, 어느 타이밍에서 왜 삐칠지 귀신같이 눈치채 조정에 들어간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은 남들과 다른 음주 포인트. 술을 권하면 일단 거절부터 하고, 술자리가 끝날 때 발동이 걸리는 식이다. 백일섭이 “아주 이상한 형님”이라고 할 정도로 술자리에서만큼은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는 스타일이다. 꽃할배의 막내 ‘백심통’ 백일섭은 가장 문제적 인물이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그대로 드러낸다. ‘장조림 하이킥’이 대표적인 예다. 장조림 무게에 체력이 고갈되자 장조림통을 지하철역 바닥에 내동댕이친 사건이다. 자존심이 세서 대신 들어주겠다는 호의도 거절한다. 내 짐은 내가 든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지만, 관절염 탓에 5분 이상 걷는 것이 힘들다. 그래서 강한 체력의 형들과 트러블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그를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뒤끝이 없고 순수하며 탁월한 예능감 때문. “유 트라이 아워 레스토랑?”을 “요 밑에가 맛있게 한다고요?”라고 받아치는 순발력이나 파리의 분수 물이 바람에 날리자 “에비앙이 막 날아온다”고 표현하는 센스는 네 할배 중 최고다.
이처럼 평소 예능에서 소비되지 않은 네 원로 배우들의 진솔한 모습은 놀랍도록 신선하고, 가공되지 않은 웃음을 준다. 밖에서는 하나같이 ‘어르신’으로 대우받는 60~70대의 할아버지들이 나이로 서열을 따지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박근형이 70세 백일섭을 “섭이”라고 부르고(도대체 누가 방송에서 백일섭의 이름을 이렇게 부를 수 있겠나), 막내라는 이유로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이들이 알고 지낸 지 50년이 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근엄한 할아버지들의 반전 매력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드라마 속에서 가부장적인 ‘대발이 아버지’ 이순재는 현실에서는 아내의 말 한마디에 양말, 속옷, 수건을 척척 나른다. 냉혈한 기업 회장을 주로 연기한 박근형은 손주 얘기에 무장 해제되는 평범한 ‘손주 바보’ 할아버지다. 먼 타국으로 떠나는 남편을 위해 아내들이 정성껏 준비한 멸치볶음과 고추장볶음, 깻잎, 장조림 등의 반찬은 프로그램에 감동을 더한다. 프랑스 파리의 어느 유명 요리를 보여준다 해도 밥상의 따뜻함은 담지 못했을 터다. 백일섭은 장조림 하이킥 사건(아내가 열심히 싸준 장조림이 무겁다며 귀찮아한 것)을 두고 “여행하는 동안 계속 후회했다. 승호 엄마, 미안허이”라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연기나 설정이 아니다. ‘리얼’이다. 할아버지들의 내밀한 속내를 본 게 얼마만인가. 부채질을 하면서 동네 골목길을 지키고 이따금 따뜻한 잔소리로 하굣길을 맞아주던 어르신들의 살 냄새가 점점 맡기 힘들어지는 요즘, 그래서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이 더 반갑고 의미 있는 건지 모르겠다. 꽃보다 아름다운 할배, 할매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신구(둘째 형)
나이 79세, 1936년 8월 13일생
대표작 <네 멋대로 해라> <고맙습니다> <사랑과 전쟁> <백년의 유산> 등
대표 이미지 얼굴만 봐도 마음이 짠한 아버지, ‘게맛’을 아는 할아버지, 이혼 전문 상담가
but 꽃보다 할배에서는 귀요미 담당. 살인 미소로 다수의 여성 팬 보유. 20~30대 여성 시청자들이 신구 할배를 보고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짓는 기현상 발생. 인자함 뒤에 숨겨둔 엉뚱함으로 맏형과 티격태격하는 할배 넘버 투.
여행 필수 아이템 소주(캐리어에 소주 10팩을 숨겨온 소주홀릭. 막내 백일섭과 사이좋게 나눠 마셨다는 후문)

박근형(셋째 형)
나이 74세, 1940년 6월 7일생
대표작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형제의 강> <추적자> 등
대표 이미지 돈 많은 재벌 아버지, 카리스마 넘치고 야망 가득한 정치인
but 꽃보다 할배에서는 꽃할배 분위기 메이커. 할배 서열 3위지만 외모 서열은 1위. <꽃할배>에서 MC 역할도 맡고 있음.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면 어김없이 투입돼 상황을 정리함. 미래의 MC 꿈나무.
여행 필수 아이템 스프레이 선크림(“한손으로 눈을 가리고 뿌리는 게 포인트”라며 직접 이순재에게 시범을 보이는 세심한 매력을 선보임. 역시 센스 만점)

백일섭(막내)
나이 70세, 1944년 6월 10일생
대표작 <아들과 딸> <굿모닝 영동> <솔약국집 아들들> <엄마가 뿔났다> 등
대표 이미지 피로해소제 ‘우루사’의 전속 모델, 능력은 없지만 정이 많은 아버지
but 꽃보다 할배에서는 꽃할배 떼쟁이 막내. 짜증을 쉽게 내지만 뒤끝이 없음. 발군의 예능감도 보임. 평소 59세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실제 나이가 밝혀져 손해가 막심하다고 호소.
여행 필수 아이템 애교(떼쓰고 진상 부려도 애교 한 방이면 끝. 막내이기에 가능한 일)

" 예능에 ‘설정’이 있다지만 <꽃보다 할배>는 다르다.
‘배낭여행’이라는 틀만 있고, 상황 그대로를 카메라에 담아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행히 4인방의 캐릭터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각자의 생활 방식으로 살아온
이들이기에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담으면 그 자체로 캐릭터가 됐다"

CREDIT INFO

취재
정은혜
사진
tvN 제공
2013년 08월호

2013년 08월호

취재
정은혜
사진
tvN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