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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푼 기억

On January 12, 2018 0

슬퍼서 술을 푼 게 아니라, 술을 퍼서 참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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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사품에 주의하세요
    큰맘 먹고 산 가방이 하나 있었다. 이른바 ‘탬버린 백’이라고 불리던 반달 모양 숄더백. 그 당시 20대 초반 여성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들고 다닐 만큼 유행한 아이템이었다.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 애지중지 모셔온 어느 날, 친구들과 새해 첫 불금을 맞이하기로 약속했다. 한바탕 맛집 투어를 마친 뒤 노래방으로 들어섰고, 이미 꽤 많은 양의 술을 들이켜서 흥은 오를 대로 오른 터였다. 온갖 몸부림과 비명을 일삼은 지 3시간. 대규모 콘서트라도 마친 듯 피곤함이 밀려와 집에 도착하자마자 금방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간신히 눈을 떠보니, 맙소사. 나의 아름다운 ‘탬버린’이 온데간데없는 게 아닌가. 대신 베개 근처에는 노오란 빛깔의 진짜 탬버린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쩐지 자는 내내 어디선가 찰랑대는 소리가 나더라니. 다행히 가방을 되찾기는 했지만 영원히 그 노래방은 다시 갈 수 없었다. - 서OO(22세)

  • 미친 사랑의 노래
    이별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친한 친구에게서 자신의 새 남자친구를 소개해주겠다는 전화가 왔다. 그가 워낙 괜찮은 데다 지인도 많은 것 같으니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줘’ 작전을 시도하자는 얘기였다. 명동의 어느 술집에서 만난 나와 친구, 그리고 친구의 남자친구이자 내게 구세주가 되어줄 그는 어색함도 잊은 채 한참을 웃고 마시며 떠들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서서히 취기가 오르더니 불현듯 눈앞이 깜깜해져 기억을 잃고 말았다. 이틀 내내 친구는 욕이 가득 쓰인 문자 메시지를 보냈고, 기억의 조각을 찾고 나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한 나머지 갑자기 전 남자친구 이야기를 꺼내더니만,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게릴라 공연을 개최한 것이다. 다른 손님들의 따가운 눈총에도 기어코 여러 곡을 완창해내는 나를 보며 구세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도저히 어울릴 만한 남자가 없네.” - 이OO(28세)

  • 나 잡아봐라
    하는 일마다 유난히 잘 풀려 술도 ‘술술’ 들어갈 것만 같던 어느 날. 이렇게 바로 집에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동네 친구를 불러내 간단히 치맥을 즐기기로 했다. 양동이만큼 거대한 통에 든 맥주를 두 번이나 주문해 마셨는데도 들뜬 기분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바로 옆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매화가 그려진 분홍빛 술병까지 연달아 비웠다. 그러나 ‘마지막 딱 한 잔’, 바로 그 말이 재앙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얼큰하게 취한 뒤 필름이 끊겨버린 귀갓길은 분노에 찬 동생의 증언으로나마 어렴풋이 마주할 수 있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위험을 감지한 동생이 마중을 나왔는데, 가게 앞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대뜸 ‘집이야’라는 답장이 왔다. 온 길을 되돌아갔으나 아무도 없었고, 전화를 걸어 물으니 아직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황당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이후 ‘지금 주차장’ ‘가게 안쪽 자리야’ ‘현관 앞에 있어’ 등 수시로 축지법을 선보인 끝에 마침내 방 안에 쓰러져 잠든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고. 그로부터 한 달쯤, 나는 동생이 필요한 물건과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말하는 즉시 사다 바치면서 매일매일 머리를 조아렸다. - 박OO(26세)

  • 권선징악(勸善懲惡)
    평소 술을 즐기는 편이다. 물론 주변 친구들 또한 사랑해 마지않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날은 마침 시간이 맞아 친구와 둘만의 조촐한 술자리를 갖기로 했다. 테킬라를 홀짝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무려 1리터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해치워버렸다. 당연히 나와 친구 모두 이미 만취한 상태였고 계산서에는 무수한 숫자들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술김에 ‘그냥 도망칠까’라는 생각까지 들던 찰나, 이를 눈치챈 직원이 문 앞을 지키고 우리를 막아섰다. 결국 주머니까지 털어 계산을 마쳤지만 이제 집에 갈 택시비가 없다는 게 문제. 넘어지고 기어가길 반복하며 1시간 만에 집에 도착한 후 무릎이 너무 아파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오늘 아침 내가 꺼내 입은 건 분명 긴 청바지이건만 두 눈에 비친 무릎은 찢어진 구멍 사이로 훤히 드러나 있었다. 심지어 벌겋게 무릎이 달아올라 미세한 온기마저 느껴졌다. 아, 정말 아끼는 청바지였는데. 오늘은 속상하니까 한잔해야겠다. - 김OO(29세)

  • 저기, 속옷 벗겨졌어요
    한창 클럽에 빠져 살던 때였다. 일주일에 서너 번 핫하다는 클럽은 전부 찾아다니며 열심히 흔들고, 마시고, 놀았다. 그 당시 속이 비치는 ‘시스루’ 패션이 인기라 종잇장처럼 얇디얇은 니트 원피스를 입고 어김없이 새로 알아낸 클럽에 들어섰다. 날씨가 추워 몸이 풀려야 하니 한 잔, 아직 흥이 안 오르니까 두 잔, 이제 좀 신나기 시작했으니 세 잔. 그렇게 갖은 이유를 들면서 보드카, 테킬라 등 가지각색 술을 실컷 들이켰다. 한껏 취해 뜨거운 밤을 만끽하고는 다음 날 아침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향했다.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로 비틀비틀 걸음을 재촉하는데, 한 아주머니가 어깨를 톡톡 치더니 조심스레 가슴을 가리켰다. “저기 아가씨, 속옷 벗겨졌어요.” 깜짝 놀라 근처 카페 화장실로 향했고, 거울을 보자 옷 속 끈이 풀린 브래지어가 가까스로 제 사명을 다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간담이 서늘했던 그때 아슬아슬한 실루엣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 김OO(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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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서 술을 푼 게 아니라, 술을 퍼서 참 슬프다.

Credit Info

EDITOR
PARK SO HYUN
ILLUSTRATOR
GANBI

2018년 01월호

이달의 목차
EDITOR
PARK SO HYUN
ILLUSTRATOR
GAN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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