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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말아요 그대

On December 28, 2017 0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아무 의미도 없는 일에 집착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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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소녀 감성에 취해 ‘현대시의 이해’ 강의를 신청한 게 화근이었다. 옆자리 국문과 복학생 오빠와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은 뒤 조별 과제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이때 진작 도망가야 했는데. 조금 친근해진 그는 ‘감수성이 풍부해 불면증이 있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새벽마다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늘한 기운을 느껴 한동안 모든 연락을 무시했고, 일부러 수업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강의실로 향했다. 서서히 평온을 되찾을 무렵, 아뿔싸. 실수로 친구에게 걸어야 할 전화를 그에게 해버리고 말았다. 황급히 종료 버튼을 눌렀지만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틀린 적이 없는지. “학생,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가 다녀갔어.” 자취방에 들어서는 나를 향해 관리인 아주머니는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존재하지 않는 남자친구의 인상착의는 틀림없이 그 오빠였고, 머지않아 이사를 감행해야 했다. 몇 년 후 그가 등단했음을 알리는 캠퍼스 내 현수막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역시, 저 정도 감성은 되어야 등단할 수 있는 건가.’
    _ 손OO(28세)

  • 둘도 없는 절친이던 그녀와 나는 함께한 시간만큼 두터운 우정을 나누었다. 당시 내게는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또한 친구의 간단한 안부 정도는 물을 만큼 가까워 몇 차례 셋이서 만남을 갖기도 했다. 그게 시발점이었을까. 아니,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그녀를 좀처럼 챙겨주지 못한 잘못이 컸다. “남자친구랑 있어?” “오늘은 어디 가?” “이따 뭐 먹기로 했어?” 매일 아침부터 친구는 갖은 질문 공세를 퍼부어댔을 뿐 아니라 나의 비밀 블로그까지 알아내 사생활을 하나하나 캐물었다. 레즈비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쯤 그녀의 집착 대상은 내가 아닌 ‘남자친구’임을 알게 되었다. 휴대전화 안에는 나와 남자친구의 사진이 가득했고 그와 가본 곳, 그와 먹은 메뉴를 물은 건 전부 먼 훗날 상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착이 연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_ 김OO(25세)

  • 처음엔 그저 좋았다.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회사는 운명처럼 느껴졌고, 출퇴근을 같이 하자며 집 앞까지 나를 데리러 온 모습도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매일매일 이러한 일상이 반복되자 부모님의 눈치가 이어졌다.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나의 한마디에 남자친구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덜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논리였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야근해? 또 같이 못 가? 친구는 왜 만나?” 심지어 일을 그만두고 자신과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까지. 참다 못해 이별을 통보한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무려 36통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하나같이 오타가 난무한 말들뿐이었다.
    _ 윤OO(28세)

  • 일찌감치 징조는 나타났다. 그가 어디서 누구와 뭘 하는지 늘 궁금했고, 연락이 잘 닿지 않으면 몹시도 애가 탔다. 불안감은 점점 자라 거대한 크기의 의심이 되었다. 여느 날처럼 애틋한 시간을 보낸 뒤, 남자친구는 옆에 누워 곤히 잠자고 있었다. 문득 가만히 놓인 그의 휴대전화가 눈에 띄었다. 유난히 답장이 늦던 며칠 전 하루가 아무래도 수상한 터였다. 카드 사용 내역이 적힌 문자 메시지를 전부 뒤져봤지만 의심할 만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결국 개운치 않은 기분과 밀려오는 죄책감만이 내 온몸을 사로잡았다.
    _ 신OO(28세)

  • 사랑하니까 괜찮은 줄 알았다. 종종 내 휴대전화를 살피던 남자친구를 보면서 어쩐지 불쾌한 마음이 든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를 정말 사랑하나 봐’라는 자기 합리화에 의해 이는 금세 당연한 절차이자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거래처 직원과 나눈 ‘맛점’이라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 한 통에 그의 분노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다른 남자의 맛있는 점심 식사를 바랐다는 이유로 거리 한가운데 서서 내게 욕설을 퍼붓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_ 박OO(28세)

  • 돌이켜보면 그의 취향은 ‘옛것’이 대부분이었다. 새 옷보다는 쾨쾨한 냄새가 나는 구제를 좋아했고, 빈티지한 인테리어의 커피숍에 자주 들렀다. 그렇다고 사상까지 먼 옛날 조선 시대를 지향할 줄이야. 무릎 위로 올라오는 하의는 무조건 금지, 술은 맥주 두 잔 이내,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는 반드시 여자 옆에 앉을 것. 이 밖에도 고지식하고 편협한 규칙을 줄곧 내세우던 그는 전화와 문자 메시지를 통해 쉴 새 없이 내 실행 여부를 확인했다. 남녀 평등과 인권을 깨닫게 해준 뜻깊은 경험에 감사 인사를 전한다.
    _ 박OO(24세)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아무 의미도 없는 일에 집착하지 마세요.

Credit Info

EDITOR
PARK SO HYUN
ILLUST
GANBI

2017년 12월호

이달의 목차
EDITOR
PARK SO HYUN
ILLUST
GAN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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