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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사라진것들

On December 14, 2015 0

얼마전까지 분명히 존재했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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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카 테이프

사람들이 주로 소비하는 음악의 형태는 이제 디지털 음원인 것 같다. 그나마 CD는 컴퓨터로라도 들을 수 있다지만 다른 매체는 플레이어조차 보기 힘들어진다. 테이프 플레이어는 자동차에서조차 점점 드물어졌는데, 한때는 저렴하고 휴대하기 편한 카세트테이프가 각광받던 시절도 있었다. 

음반을 사서 들을 뿐 아니라 직접 만든 컴필레이션을 듣고 선물하기도 했고, 번화가에는 반드시 최신 가요 해적판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가 있었다. 

리어카에서 틀어놓는 노래, 해적판 테이프에 들어가는 노래를 보면 최신 히트곡을 알 수 있어서 ‘길보드 차트’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강남역 지오다노가 타워 레코드였던 시절 타워 레코드 옆과 뒷골목엔 해적판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가 가득했다. 

그때 제작자들은 불법 해적판 테이프 때문에 음반이 팔리지 않는다고 분개했지만, 그래도 김건모 3집이 2백80만 장 팔리던 시절이었다. 요즘 음원 다운로드 수입은? 리어카가 있던 시절은 사람들이 음악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쓰고,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으로 먹고살던 때일 수도 있겠다. _이원열(뮤지션 ’원트릭포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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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원미디어 세계문학총서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자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은 왠지 보기 싫어졌다. 을유문화사, 범우사, 민음사, 문예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중 몇 권을 띄엄띄엄 읽던 1998년, 강변 CGV 테크노마트 개관 기념 영화제에 갔다가 고려원미디어의 세계문학총서를 발견했다. 

도대체 왜 테크노마트 같은 곳에서 고려원미디어 책을 떨이로 팔았는지 모르겠지만 가격이 그야말로 문학적이었다. 단돈 3천원. 하긴, 정가가 3천8백원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무리한 확장 투자로 1997년에 부도가 난 것이었다. 

고려원미디어는 당시로는 획기적이게도 ‘고려원 페이퍼백’이란 이름으로 책을 얇고 작게 만들었다. ‘192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에서 시도된 값싸고 휴대하기 좋은 형태의 출판물’이란 힙스터적 설명까지 곁들이며 말이다. 

이 책에 대해서만큼은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 힘들다는 궁색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군소리 없이 고려원미디어 세계문학총서를 통해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에는 없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올더스 헉슬리, 장 주네, 프란츠 카프카의 어둡고 음흉한 세계에 입문했다. 그때부터 나는 순수함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는데 내 사정을 전혀 모르는지 고려원미디어의 책은 지하철 매대에서조차 사라져버렸다. 

젠장, 그때 느낌 있는 소규모 서점만 있었어도, 아니 감성적인 인스타그램만 있었어도, 아니 힙스터만 있었어도…. _나지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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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임의 FM영화음악

최초로 전파에 음성을 담아 허공에 쏘아 올린 사람은 캐나다의 레지날드 페든슨이다. 페든슨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위치한 기지국에서 무선 음성 송신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그가 인류를 대표해 전파에 실어 보낸 첫 번째 문장은 ‘그곳에 눈이 내리고 있다면 나에게 전보를 보내달라’는 부탁이었다. MBC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은 1992년 11월 처음 전파를 탔다. 영화 잡지가 부록으로 껴주는 스타들의 브로마이드 힘으로 팔리던 시절. 

그녀의 방송은 국내에서 영화가 대중에게 소비되던 방식을 슬며시 바꿔갔다. 달 표면에 발자국을 찍듯 숨은 걸작을 독특한 시선으로 발견해낸 정성일, 영화에서 ‘연예 오락’을 떼어내고도 이야기할 것이 많음을 알려준 박찬욱 등 프로그램에 나온 고정 게스트만 봐도 그랬다. 무엇보다 정은임의 목소리에는 자신의 일을 애정으로 대하는 사람의 온기가 있었다. 

미국 배우 리버 피닉스의 죽음을 알리던 순간이 그랬고, 타워 크레인 위에서 외롭게 죽어간 노동자를 애도하던 순간이 그랬다. 우리가 전파에 실어 보낼 수 있는 건 정보나 소식 이전에 세상을 대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의 방송을 통해 보여주었다. 2004년 8월.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을 기억하는 이들이 팟캐스트에 그녀의 목소리가 머물 곳을 새로 마련한 건 그 온기에 대한 답변일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음성은 ‘그곳에 눈이 내리고 있다면 알려달라’고 했던 최초의 목소리와 함께 지금도 어딘가의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을지 모른다. _고재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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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스

1996년 어느 날, 나는 긴장을 애써 감추며 종로2가 하디스의 문을 열었다. 덕후끼가 다분한 남자 2명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17세, 둘은 19세로, 우리는 PC 통신 천리안의 한 음악 동호회에서 만났다. 게시판에서 수다를 떨다 덜컥 밴드를 결성한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하디스를 첫 회동의 장소로 정했다.

하디스는 매장이 많지도 않았고 비싸다는 말을 들어서 막연하게 ‘어른들’이나 출입하는 곳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그곳을 택했다. 안 그래도 두 살이나 어린데 맥도날드나 롯데리아를 대면 얕보일 것 같아서였다. 나는 하디스라면 백번도 넘게 와봤다는 듯 당당하게, 가장 특이한 버거를 주문했다. 버거는 너무 기름져 입에 물자마자 ‘윽’ 소리가 나왔지만, 곧바로 ‘으음~’ 하며 대종상급 연기를 펼쳤다. 잔뜩 긴장한 것도 이유였겠지만, 여하간 그날 맛없게 먹은 탓에 수년간 하디스 간판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스물한 살 때인가 무심코 갔다가 깜짝 놀랐다. 너무 맛있는 거다. ‘그땐 이 맛을 왜 몰랐지? 정말로 이게 어른의 맛인가?’라고도 생각했다. ‘이젠 자주 와야지! 여기만 와야지!’ 불과 얼마 후 하디스는 망해버렸다. 내 인생에 하디스는 그렇게 두 번, 강렬하게 왔다 갔다. 

맛을 몰랐던 10대, 맛을 막 알기 시작한 20대에 한 번씩. 이제는 칼로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30대가 됐는데 정작 하디스가 사라지고 없다니, 통탄할 일이다. 파파이스만은 꼭 지켜야지. 지켜냅시다, 여러분! _미캉(웹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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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텍나다

수능을 막 마치고 “예술 영화를 챙겨 보겠다”는 각오를 하던 2004년 12월, 노동석 감독이 연출한 <마이 제너레이션>을 보러 갔다. 앞날이 창창할 것만 같던 시절에 본 영화가 음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일까. 그날은 하이퍼텍나다에서 처음 영화를 본 날로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낮고 가까운 스크린에 나열과 다열만 있던 좌석 하나하나에 붙어 있던 명사들의 이름은, 멀티플렉스 시스템이 극장 경험의 전부였던 열아홉 고등학생에게는 더없이 그럴듯한 극장의 조건 같았다. 

바깥으로 보이던 쭉 뻗은 나무와 항아리들은 예고편 같았고, 시커먼 커튼이 기계음과 함께 풍경을 막으면 이 영화를 정복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런 마음으로 ‘나다’에서 <망종>을,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를, <케스>를,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을 보았다. 

<친절한 금자씨>에 열광하던 시절 하이퍼텍나다에서 열리는 GV를 보러 가는 나를 감싸던 기대는 아직도 선연히 떠오른다. 일찌감치 혜화역에 도착해 이음책방에서 책을 사들고 하이퍼텍나다로 영화를 보러 가는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아직도 혜화역에 가면 저절로 1번 출구 쪽을 찾는 이가 나뿐일까? _문동명(영화평론가)
 

※ 기사의 전체 내용은 2015년 12월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얼마전까지 분명히 존재했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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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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