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색 아크릴 물감이 만들어내는 동양화 정원이 있다. 김선형 작가의 작업실에서 만난 기분 좋은 푸른색의 향연.
푸른색을 만나다
깊은 새벽 동트기 전과 낮에서 밤으로 향하는 하늘의 색은 어떤 색이라고 불러야 할까. 김선형 작가는 이 경계의 색을 푸른색이라고 부른다. 경계의 시간은 무척 짧기에 오랫동안 눈으로 감상할 수 없다. 마음에 담아두어야 한다. 김선형 작가는 마음에 담아둔 이 푸른색으로 자연을 그린다. 그에게 자연이란 그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다. 길가에 핀 꽃이기도 하고, 숲속 오솔길이기도 하다. 집 앞에서 만나는 길고양이도 그의 캔버스 속 주인공이 된다. 20년 전 우연히 본 하늘의 색에 푹 빠진 후로 지금까지 푸른색 물감으로 작업을 해왔다. 그렇게 김선형 작가의 ‘가든 블루’ 연작이 시작되었고, 이 시리즈는 다양한 소재와 스타일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그동안 줄곧 바깥에서 동양화를 바라보는 급진적인 시각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 1988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하고 그 후로 활발한 전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선형 작가. 파란색을 뜻하는 BLUE는 영어권에서는 우울함을 뜻하지만 우리에게 푸른색이나 쪽색은 희망을 의미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푸른 에너지가 가득한 그의 작업실을 마크 테토가 찾았다.
물감 같은 것은 남의 것을 빌려다 쓰지만 그 안에 담긴 나의 모습은
온전히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M 작가님 안녕하세요! 푸른색 기운이 가득한 작업실이 정말 멋지네요.
멀리까지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여기는 제가 오랫동안 사용한 작업실입니다. 여기서 주로 책을 읽기도 하고 작업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M 푸른색으로 표현한 자연의 면면들이 정말 멋진 것 같아요. 오랫동안 같은 색깔을 사용하셨지만 다양한 스타일의 드로잉들이 눈에 띄어요.
제 나이가 올해 60으로 그림을 그린 지 벌써 40년이 됐어요. 지난 40년 동안 연습을 한 거죠. 이제까지 그린 것들은 모두 습작처럼 느껴지네요. 앞으로도 아마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게 될 것 같아요.
M 고양이가 그려진 그림들도 새로운 스타일처럼 보입니다. 뭔가 여유가 느껴지는 작품이에요.
제가 지난해 좀 아팠는데, 회복하면서 가볍게 그리기 시작한 것들이에요. 저희 동네에 길고양이들이 많이 살거든요. 그중 한 마리가 저희 집 현관 앞에 자주 놀러 와서 밥을 먹고 가는데, 고개를 들고 저를 쳐다보는 모습이 정말 귀여워요. 저한테 애교도 떨고 그러는 모습이 제 기억에 깊이 남았는지 어느 날부터 그림에 고양이가 나왔어요. 미리 구상을 하고 그린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등장하더라고요.
M 평소에도 주변에서 주제를 찾으시는 편인가요?
예전부터 그림 그릴 때 구상을 하거나 밑그림을 그리는 편은 아니에요. 붓이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리는 편입니다. 제 생각을 마음에 꾹꾹 담았다가 캔버스 앞에서 그 마음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거죠. 사실 마음속에 있는 게 전부가 아닐까 해요. 물론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지만 정말 중요한 건 남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꺼내서 그리는 게 제 목표예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관념적인데 동양화의 특성이기도 해요.
M 그림 그리는 건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초등학교 시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대회가 있었어요. 신라시대에 출토된 금동 허리띠를 그리려고 하는데 금색이 잘 표현되지 않더라고요. 금색을 만들어내려고 고뇌하던 저에게 선생님께서 “크레파스에 금색이 없지? 그런데 왜 저걸 금색으로 봐야 할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색은 달라진다” 하시면서 다른 색으로 표현해보라고 하셨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래서 나름 고민하다가 검정색으로 그렸는데 수상의 기쁨을 맛봤구요. 그런 경험이 제가 미술을 대하는 태도나 자신감에 영향을 준 것 같았어요.
M 그 후에 화가의 꿈을 키운 거예요?
원래는 문학에 관심이 많고 글도 잘 쓰고 싶었고요. 그런데 생각보다 글로 남을 감동시키는 건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렇지만 예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있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미대를 진학하려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미술학원에서 동양화, 서양화, 조각, 디자인 중에 전공을 골라야 한다고 했는데 저는 동양 사람이니까 당연히 동양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웃음).
M 동양화를 전공하셨지만 지금은 동양의 재료가 아닌 것들을 사용하고 계시잖아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저희가 대학을 다닐 때 서양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화두였어요. 저는 동양화도 그 자리에 머물러 예전 것을 답습하기보다는 도전하고 실험해서 진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일 먼저 포기한 게 먹이었어요. 4학년 때부터는 먹을 안 쓰고 아크릴을 사용하면서 재료와 표현에 변화를 주려고 했죠. 그리고 바깥에서 동양화를 바라보겠다고요.
M 아크릴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시게 된 이유는 무엇이에요?
아크릴은 한 번 칠하면 안 지워지는 성질이 마음에 들었어요. 먹은 그림을 완성한 후에 물이 튀면 번지는데 그런 점들이 저하고는 맞지 않더라고요. 수묵화의 단순한 번짐보다 좀 더 진보하고 싶었어요. 아크릴에 물을 섞어서 사용하면 아크릴과 물의 물성 차이가 만들어내는 표현들이 물을 더 물같이 느껴지게 합니다. 그것도 제 마음대로 되진 않고, 환경에 따라서 번지고 마르는 형태가 달라지죠. 자연의 섭리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거예요. 인위적인 재료를 사용하지만, 그림은 인위적이지 않죠.
M 파란색만을 사용하시는 이유도 궁금해요.
20년 전쯤 차가운 겨울날 저녁이었어요. 구례 화엄사라는 절에서 우연히 법고 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산속에서 듣게 되는 북소리는 어떤 마음의 울림 같은 게 있어요. 그런데 그 순간 맞은편 범종각에서 종이 울리고 그 소리에 맞춰 새 한 마리가 하늘로 푸드덕 날아가더라고요. 그때 하늘의 색깔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요즘 주로 사용하는 ‘울트라 마린’ 색처럼 쨍하고 진한 푸른색이었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색이었어요. 지금도 그 순간이 사진처럼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죠. 그때 어떤 계시를 받은 기분이었고요. 그 후에 푸른색으로만 작업을 하게 되더라고요.
M 주로 자연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으신다고 했는데, 작가님에게 자연은 어떤 대상이에요?
자연은 참 신비로운 것 투성이에요. 저는 풀 한 포기가 흙을 뚫고 올라오는 게 신기하고, 조약돌을 보는 것도 너무 재미있고요. 길을 걷다가 보이는 한 알의 조약돌을 봐도 측은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자연은 거기에 그대로 있지만 언제든지 찾아가면 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예요. 그게 자연이 갖고 있는 힘이라고 생각하고, 저는 자연을 만나면서 느꼈던 감정을 캔버스에 표현해요. 그래서 밑그림도 없이 쓱쓱 그리는 것 같아요.
M 작가님의 작품 ‘가든 블루’가 사람들에게 어떤 자연이 되어주길 바라세요?
답답한 시기이잖아요. 모든 것이 급변하고 있지만 나는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고요. 제 그림이 그런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어요. 요즘은 볼 것, 즐길 것들이 너무나 많지만 벽에 걸린 그림 한 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그 안에 자신을 투영해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 여백을 느꼈으면 좋겠고, 그 그림 속에 펼쳐지는 무한한 세계를 경험해보길요.
푸른색 아크릴 물감이 만들어내는 동양화 정원이 있다. 김선형 작가의 작업실에서 만난 기분 좋은 푸른색의 향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