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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지만 고요한 작품으로 꾸민 전재은 작가의 집

On November 08, 2021

흔히 ‘그림은 멀리서 보는 것’이라고 하지만 전재은 작가의 작업 앞에 서면 누구라도 캔버스가 코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전재은 작가의 그림이 주는 따뜻한 위로, 그 중심에는 그가 회상하는 ‘집’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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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집중하지 못했던 회화 작업을 최근에 다시 시작한 전재은 작가. 페인팅은 오너먼트와 또 달라서, 깊은 몰입의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다.

작가 전재은은 ‘천과 바늘, 실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업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부정형의 형태와 거친 질감을 살린 낙서 같은 예술 사조 ‘앵포르멜’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여러 조각을 모아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미술 기법 ‘콜라주’라고도 한다. “낡은 것으로 보이기를 의도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오래 들여야 합니다. 배경을 만들기 위한 밑 작업은 기본이고 여러 번 반복해서 원하는 질감을 내요. 젯소를 두껍게 올리거나 천을 올려 굳히고, 그것을 갈아내고 다시 물감을 덧입히고, 물감을 말린 다음 그 위에 다시 한번 무언가를 얹는 과정의 연속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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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studio>, 235x137cm, Mixed media on canvas, 2020

과거를 말하는 그림

전재은 작가의 작업은 ‘읽기’에서 시작된다. 시인 박준의 예스럽고 맛깔나는 단어, 시인 이제니의 섬세한 감정 표현, 철학가 레베카 솔리의 깊은 통찰이 담긴 문장을 특히 즐겨 읽는다. “장소가 묘사된 문장에 줄을 그어둬요. 특히 부엌, 층계, 복도 등 집의 공간을 묘사한 표현에 매료됩니다. 그런 묘사가 제가 지닌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거든요.” 작업의 두 번째 단계는 쓰기이다. 그는 시집을 읽고 문장을 곱씹은 후, 자신의 기억에 있는 크고 작은 유년의 사건에 관해 글을 쓴다.

작가의 작업실에는 시구인 듯, 또는 단어의 나열인 듯한 메모가 볏대에 붙은 쌀알처럼 늘어서 있다. 너에게 줄 편지/ 작은 스티커/ 핀/. 마른 꽃잎/ 오래된 가죽목걸이 지갑/ 동전 몇닢/ 작고 귀여운 인형/ 사탕/ 비닐포장지 캐러멜/ 자수된 양말 같은 것/ 꽃과 나무인형/ 작은 그림들 이렇게 쓰인 글을 체에 거르듯 정제하면 그에게는 단어가 몇 개 남는다. 그는 이때 남은 단어를 화폭에 그려넣는다.

“누군가 나의 단어를 읽어주었으면 하지만, 동시에 쉽게 읽히고 싶지 않아요. 글씨를 쓰고, 물감으로 덮고, 다시 글씨를 쓰고, 또 지워요. 스스로 축적한 내밀한 시간을 저 스스로 기억해내고 또 슬쩍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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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실과 패브릭으로 만든 오너먼트를 화폭에 고정해두고 한참을 바라보다 마침내 위치를 정하고, 그 위에 다시 드로잉을 하고 바느질 작업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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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은 작가의 집 거실. 거칠고, 우툴두툴하고, 질감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가 전재은의 작업. 그러나 어쩐지 미끈한 도자기 특유의 고요가 느껴진다. 그의 집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작가가 지닌 고유의 분위기가 화폭에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전재은 작가는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아들과 함께 이 집에 9년째 살고 있다.

전재은 작가의 집 거실. 거칠고, 우툴두툴하고, 질감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가 전재은의 작업. 그러나 어쩐지 미끈한 도자기 특유의 고요가 느껴진다. 그의 집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작가가 지닌 고유의 분위기가 화폭에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전재은 작가는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아들과 함께 이 집에 9년째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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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은 작가의 작업실 전경.

전재은 작가의 작업실 전경.

작가, 엄마, 여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작업을 시작해요. 아침부터 집안일을 하면 기력이 소진돼 일에 몰입하기가 힘들더군요(웃음). 여성 작가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고민을 몸으로 체험한 후 터득한 거죠.” 전재은 작가는 여성 작가로서, 삶의 균형을 이루며 나의 작업을 꾸준히 지속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엄마라면 나를 전부 잃어버리는 경험을 한 번씩 하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엄마로서의 현실을 살다가, 어느 순간 작가가 되어 작업에 몰입하는 일은 꽤 힘들었어요. 그림은 마음을 다해서 집중해야 하는 과정이거든요.” 올해로 쉰. 스무 살 대학생 아들을 둔 그는 작가로서 완성된 삶에 다가섰다고 여기는 중이다.

“아이들은 금방 크고, 지나고 보면 그때는 좋은 나날들이었어요. 그 시간을 보내고 이렇게 온 마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니 드디어 자연이 보여요. 작업으로서, 인간으로서 누군가를 일으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고요. 나의 기억을 그려내던 사람에서 한 발짝 나아간 거죠. 그러니 젊은 엄마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괜찮아요. 자기를 믿어야 해요. 내가 하는 일이 다 맞아요. 아이를 키울 때는 아이를 오롯이, 내 삶을 즐길 때는 완전히 빠져들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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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거실에 놓인 기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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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메모들. 작가는 그의 기억이 실제가 아닐 때도 있다고 말한다. 기억이란 나의 심적 처지에 맞게 편집, 수정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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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여기, 우리가 만나는》, 시인 이제니의《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그리하여 흘려 쓴》, 시인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등이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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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하나하나 바느질해 만드는 전재은 작가의 오너먼트.

기억으로 만든 콜라주

그의 집은 빌라의 꼭대기 층이라 박공지붕의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베란다 창은 야트막한 뒷산의 녹음을 향해 있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나무바닥 위에는 오래전 구매한 디자인 의자가 몇 점. 가구는 문이나 서랍이 스르륵 열리는 법 없이 조금 힘을 주어야만 열리는 나무로 만든 것들이다. 거실에는 작가의 취향을 드러내는 기물들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건 독일에서 전시를 할 때 옆자리에서 전시를 했던 젊은 작가 작업이고, 이건 김경화, 이건 김호진 작가의 작품이에요. 이건 우리 엄마가 만드신 왕골 공예품이에요. 이렇게 한땀 한땀 만들기가 어려웠을 텐데, 엄마가 강화도 마을에서 이걸 제일 잘하는 처녀였대요.” 그의 집은 마치 그의 작업처럼 추억과 이야기가 하나하나 덧붙여져 고유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곳. 전재은 작가는 바느질을 하듯, 붓질을 하듯 삶을 채워간다. 그는 작업과 집 안에서 또 한번 성숙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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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기억의 궁전처럼 보이는 작가의 수납장. 어린 시절의 사진이나 장난감은 그가 추억을 환기하는 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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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업은 생활과 가까운 곳으로 연장되기도 한다. 그가 화폭 대신 패브릭과 실로만 작업한 ‘오너먼트 시리즈’는 목도리나 스카프로도 활용할 수 있는 예술이다.

흔히 ‘그림은 멀리서 보는 것’이라고 하지만 전재은 작가의 작업 앞에 서면 누구라도 캔버스가 코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전재은 작가의 그림이 주는 따뜻한 위로, 그 중심에는 그가 회상하는 ‘집’의 기억이 있다.

CREDIT INFO

기획
박민정 기자
사진
김덕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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