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시내의 오래된 근대가옥을 직접 고쳐 살고 있는 사진가 민병헌. 100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작업실에서 마크 테토와 흑백사진의 거장이 조우했다.
36년간 흑백사진만 고집해온 사진작가 민병헌. 롤라이플렉스의 필름 카메라로만 촬영하고 젤라틴 실버 프린트로 직접 인화하는 방식을 고수해온 그의 사진은 콘트라스트가 강하지 않아 모호하고 흐릿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더 시간을 들여 관찰하게 되고, 회색빛 사진들은 볼수록 깊이감이 느껴진다. 오랜 세월 같은 작업 방식을 지켜온 민병헌 작가의 사진 톤은 오직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함이 있고, 사람들은 이를 ‘민병헌 그레이’라고 부른다. 작가의 대표작은 ‘별거 아닌 풍경’, ‘잡초’, ‘숲’, ‘이끼’ 등으로 특별한 사물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닌, 평범한 것들에게 특별한 시선과 감성을 부여한 작업이다. 민병헌 작가의 작품은 경기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금호미술관 등 국내 미술관은 물론이고 파리의 Centre National des Arts Plastique, 휴스턴의 The Museum of Fine Arts 등 유럽과 미국의 박물관들에서 소장하고 있다. 최근작 ‘새’ 시리즈는 프랑스의 사진 전문 출판사 아틀리에 EXB에서 화보로 제작됐고, 서울에서 전시를 통해 관객들에게 선보이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5년 전 훌쩍 군산으로 작업실을 옮긴 민병헌 작가를 마크 테토가 찾았다. 군산을 처음 방문한 마크 테토는 작가가 꾸며놓은 작업실을 보고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같은 골목이어도 해가 어디에 떠있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죠. 아침과 저녁, 여름과 겨울의 분위기가 천차만별이에요. 매일 같은 골목길을 찍다가 깨달았어요. 중요한 건 대상이 아니라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라는 사실을요.

M 작가님 안녕하세요! 군산은 처음 와봤는데 동네가 정겹고 예쁘네요. 그중에서 작가님 집이 정말 멋지고요. 군산이 고향이신가요?
아니에요. 저는 동두천에서 태어나서 줄곧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군산에 온 지는 5년 정도 됐어요.
M 아, 저는 군산에서 이렇게 멋진 곳을 발견하셨길래,
군산은 젊었을 때 한 번인가 여행을 왔던 곳이어서 잘 모르는 곳이에요. 그런데 7년 전인가, 전시를 끝내고 우연히 여행을 왔다가 이 집을 발견한 거예요. 귀신이 나올 것처럼 방치됐던 오래된 집이었지만, 제 눈엔 특별해 보이더라고요. 군산은 어린 시절 뛰놀았던 동네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고, 이 집은 처음엔 아주 공들여 지은 집처럼 보였는데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아 그 아름다움이 많이 가려져 있었어요. 평생을 즉흥적으로 살아왔던 터라, 이 집을 고쳐서 한번 살아보기로 결정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어요.
M 고치는 과정은 어렵지 않으셨어요?
이 집의 가장 큰 매력은 지난 세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마 처음 지어졌던 일본식 가옥 그대로 잘 가꿔져 있었다면 여기로 오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는 이 집이 처음엔 일본식으로 지어졌지만 그 후에 사는 사람이 바뀌면서 변한 것들, 또 서양적인 부분이 섞여 있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제가 샀을 땐 지붕도 뚫려 있고 여기저기 바닥이 삐걱삐걱했는데 최소한으로 고치려고 노력했죠. 전등 같은 것도 원래 있던 것들을 고치고 닦아서 사용 중이에요. 창문에 방범용 창살이 설치되어 있는데 하도 오래돼서 페인트가 다 벗겨지긴 했지만 세월의 때가 묻은 그대로도 보기 좋더라고요. 집을 수리하는 분이 페인트칠을 다시 하자고 했지만 그런 것들은 그냥 두자고 했어요.

제가 하는 작업은 말이 사진일 뿐이지, 엄청 넓은 영역 중에 아주 작은 한 부분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하는 정말 지루한 작업이에요. 매일 연습하듯이 하고 있을 뿐이죠.

M 공간이 바뀌면서 생활도 영향을 받았나요?
저도 잘 몰랐는데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확실히 느꼈어요. 원래 양평에 작업실이 있었는데 음지에 습한 곳이었거든요. 거기서는 하루 종일 사람도 안 만나고 암실에 콕 박혀서 작업만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여기는 하루 종일 해가 잘 들어요.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지고. 제가 원래 사회성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군산에 이사 오고 나서 사람들과 자주 만나게 되더라고요(웃음). 작품도 이전보다는 좀 더 밝은 느낌이 많아진 것 같아요.
M 특이한 게, 보통 작가님 댁에 가면 작품이 많이 걸려 있는데, 작가님 집은 그런 것들이 없네요. 사진작가의 집인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
그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웃음). 그런데 저에게는 작가가 집에 작품을 걸어놓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오랫동안 작업을 해왔지만 제 작품을 볼 때마다 아쉬운 점이 계속 보여서 자랑처럼 걸어둘 수가 없거든요.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런데 그걸 집 안 여기저기에 걸어두면 살 수가 있겠어요?(웃음)
M 그래서 사진기도 안 보이나 봐요(웃음).
저는 사진기도 한 대밖에 안 써요. 제가 사용하는 필름 카메라는 이제 단종된 거예요. 몇 년 전에 같은 기종으로 몇 대 사두었는데. 그마저도 고장이 나서 한 대밖에 사용할 수 없네요. 저는 주로 안개가 끼고 비가 내리는 날 촬영을 해서 카메라가 잘 고장 나는 편이거든요. 그리고 사진작가라고 하면 어디 갈 때마다 사진기를 들고 갈 것 같지만,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 제대로 구경할 수가 없기 때문에 웬만하면 사진기는 안 들고 다녀요. 사진보다 눈으로 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제 눈은 앞에 있는 대상을 어떤 각도로 보면 아름다울까를 생각하고 있죠.
M 사진을 시작하신 계기도 궁금하네요.
어릴 때부터 반항심이 강하고 열등감으로 가득 찬 성격이었는데 사진을 만나고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걸 찾게 되었어요. 저희 집안이 그 지역에서 유명한 수재 집안이었는데 저만 공부를 못 해서 형제들 사이에서 열등감이 심했거든요. 대학교를 다니다 말고 사진을 만나서 그때부터 사진에 매달리게 됐어요. 당시 저희 집이 망했는데 동생에게 선물 받은 카메라가 있었거든요. 그때는 눈에 보이는 건 다 찍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사진을 학교에서 배운 게 아니라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배운 거라 사진을 하면서 또 다른 열등감이 생기더라고요. 사람들이 유학 다녀와서 대접받고 작품 활동을 할 때 저는 아웃사이더였으니까요. 그래서 제 작업에 더 매달리고 파고들게 된 것도 있을 거예요. 암실에서 작업할 때는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없잖아요.
M 그런 어려움을 딛고 지금까지 오신 거군요!
제 성격의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바로 낙천성이에요. 반항심도 많고 열등감에 휩싸여 있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거든요. 저희 집이 어릴 때 굉장히 부유했는데 제가 대학교 입학하고 나서 정말 쫄딱 망했어요. 그때는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세상이 끝날 것만 같았는데, 제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하루하루 버텼거든요.
M 흑백사진만 고집하는 이유도 궁금해요.
제가 가장 즐겁고, 잘할 수 있는 작업이라서 그 방식을 이어가는 거예요. 흑백사진이 최고의 예술이라고 생각해서 고집하는 건 아니고요. 어떤 분이 저를 디지털을 거부하는 사진가라고 한 적도 있는데, 제가 게으르고 부족해서 디지털카메라를 배우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리고 작업을 온전히 제가 컨트롤하고 싶어서 인화도 직접 하는 거고요. 다른 누군가에게 맡겼을 때 제가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수 있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거든요. 제가 촬영한 것을 현상하는 그 즐거움 때문에 지금까지 작업할 수 있었던 거고요. 자랑 같지만, 암실에서 현상을 하다 보면 제가 세상에서 흑백 인화를 제일 잘하는 사람같이 느껴질 때도 있고 그래요(웃음). 그 맛에 작업을 하다가, 또 나중에 결과물을 보면 좌절하기도 하고 그런 거죠.
M 작가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기술보다 사진을 보는 어떤 마음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결국 지나고 보면 내가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가가 남더라고요.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찍지 않은 것을 찾아다니는 게 제일 어리석은 것 같아요.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은 전 세계인이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 작가들이잖아요. 나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가가 되려면 같은 사물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그걸 바라보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지난 세월 동안, 지금까지도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게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하고요. 제 작품은 제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기보다는 제가 찾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M 말씀을 듣고 보니 작가님의 작품이 좀 더 특별하게 느껴지네요. 다음 시리즈도 기대돼요.
다음 전시는 봄에 있을 예정인데 군산으로 이사 오고 나서 남쪽 지역을 여행하면서 촬영한 것들이에요. 아직 공개한 적은 없는데 마크 씨에게 오늘 보여줄게요. 군산까지 만나러 와줘서 고맙고, 다음에 또 놀러 와요.
마크 테토(Mark Tetto)
JTBC 〈비정상회담〉의 훈남 패널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 생활 11년 차, 북촌의 한옥 마을에 거주하며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매일 누리고 있다. 경복궁 명예 수문장을 역임하고, 한국 공예품과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그는 한국을 가장 사랑하는 외국인 중 한 명. 매달 〈리빙센스〉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군산 시내의 오래된 근대가옥을 직접 고쳐 살고 있는 사진가 민병헌. 100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작업실에서 마크 테토와 흑백사진의 거장이 조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