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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안의 용감한 라이프1

나와 떠나는 6시간 30분

On October 2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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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를 빼고는 무엇도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은 ‘코로나19가 좀 잠잠해지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잠정적 보류 상태다. 여행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사라진 어느 맥 빠진 여름밤, 내 심심한 손은 ‘KTX 기차표’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여행도, 캠핑도 열렬히 좋아하지만 여행을 목적 삼아 강원도를 가본 적은 없었다. 그래. 내일은 강릉이다! 즉흥적으로 다음 날 아침 9시 기차표를 끊었다. 돌아오는 기차표도 함께 끊었다. 오후 3시 30분 기차였다. 6시 전에는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야 하니 5시 30분엔 서울역에 도착해야 한다. 하루 안에 돌아올 예정이었으므로 짐은 따로 챙길 것도 없었다.

기대하는 것이 없었는데도 설랬다. 기차역에서 김밥 한 줄과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산 다음 택시를 타고 송정해수욕장으로 갔다. 그늘이 우거진 소나무 숲을 걸으니 금세 해변이 나왔다. 서울역에서 9시 기차를 탔는데 이제 고작 11시 30분. 서울에서의 11시 30분을 생각해보자. 요즈음으로 치면 거의 집에 있을 시간이다. 집 안 정리를 하다가 일을 좀 해볼까 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컨디션이 안 좋은 어떤 날엔 넋 놓고 맞이하기도 하는 11시 30분일 것이다. 완벽하게 낯선 지역에 있다는 것은 시간을 다르게 쓰고 흘러가게 하는 것 같다. 8월의 바닷가엔 응당 피크닉 매트와 타월과 수영복이 있어야 하거늘 급작스러운 강릉행이라 준비하진 못했다. 하지만 없으면 또 없는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고 파도가 철썩이는 타이밍에 맞춰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8월의 햇살이 강력했다. 뒤통수와 목덜미는 타는 것처럼 뜨거웠고 바닷물에 담근 두 다리는 얼얼할 정도로 차가웠다. 위쪽은 뜨거운데 아래쪽은 이렇게 차갑다니! 몸의 감각이 낯설었다. 일상에서 이런 종류의 자극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발바닥으로 모래를 꾹꾹 누르기도 하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표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어보기도 하면서 감탄했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시간을 확인했더니 이제 겨우 3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모래 묻은 발로 자박자박 걸어서 바다가 보이는 해송림 그늘 아래에 천을 깔았다. 누워 있으니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취미로 삼고있는 바느질거리를 꺼내어 천을 한땀 한땀 꿰다가 잠시 졸기까지 했다. 짧게든 길게든 여행을 자꾸 하고 싶은 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의 조합이 선사하는 놀라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김밥 한 줄을 까먹곤 다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햇빛을 많이 받아서인지 혹은 차가웠던 바닷물 탓인지 몸은 노곤노곤한데 정신은 명료했다. 아주 많은 일을 한 것처럼 촘촘하게 흘러간 반나절이었다. 우연히 만난 풍경들은 나를 감탄하게 했고 발톱에 때가 끼도록 모래를 밟는 일은 놀라울 만큼 기분 좋은 행위라는 것도 알았다. 택시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한 것 외엔 누군가와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그 어느 날보다 많은 말을 한 것 같은 이유는 아마도 나 자신과 대화를 많이 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글쓴이_이홍안
오랫동안 패브릭 브랜드의 마케터로 일했으며, 지금은 마케팅 컴퍼니를 운영하며 현재 잘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하고 있다. 일곱 살짜리 아이의 엄마로 여행과 캠핑을 좋아하는 그녀는 지난 해 아이와 단둘이 남미 캠핑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제주에 일년씩 살아보기도 하면서 용감한 일상을 꾸려나가는 중이다.

 

CREDIT INFO

기획
심효진 기자
글, 사진
이홍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