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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임태희 소장과의 시간

공간에 투영한 한지의 미감

On August 06, 2020

지난 7월 종로구 북촌에 문을 연 한지문화산업센터를 산책했다. 자연스럽고 유연한 한지를 닮은 공간을 연출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임태희 소장과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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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문화산업센터는 국내 한지 공방의 정보와 한지의 활용을 보여주는 문화공간이다.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곳. 큰 테이블을 중심으로 자연스러운 동선을 따라 걷다 보면 걸음마다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지의 색상과 질감은 이토록 다양하고, 인화지와 바닥재로도 쓸 수도 있고, 전국 각지의 공방이 이렇게 열심이며, 그러니 좀 더 머물고 가라고!’

주절주절 설명문도, 강요하는 메시지도 없지만 느껴지는 게 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의뢰를 받아 이곳을 연출한 팀은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 넷플릭스에 소개됐던 정관 스님의 공간인 광교의 ‘두수고방’을 비롯해 전북 고창의 ‘상하농원’, 올해 초 을지로에 문을 연 카페 ‘을지다락’ 등, 콘텐츠가 풍부한 공간을 만드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임태희 소장을 만났다.

한지문화산업센터 지하에 있는 한지 소통 공간의 수납장. 공방별 종이를 전시한다.

한지문화산업센터 지하에 있는 한지 소통 공간의 수납장. 공방별 종이를 전시한다.

한지문화산업센터 지하에 있는 한지 소통 공간의 수납장. 공방별 종이를 전시한다.

두수고방도 한지로 인테리어를 했고, 2018 공예트렌드페어에서도 한지 전용관을 담당하셨어요. 한지를 전부터 좋아하셨죠? 한지를 무척 좋아해요. 검박한 미감을 좋아하는 제 취향에 맞는 소재라고 생각하고 늘 애정을 가져왔어요. 한지로 꽃을 만드는 걸 지화라고 하는데, 지화로 조명을 만들어서 천안 뚜쥬루과자점의 천장에 매달기도 했고, 두수고방에 있는 스님 방 마감재도 한지였어요. 공예에도 흥미가 많아서, 짬짬이 한지를 쓰는 방식에 대해 새롭게 시도하고 관심은 늘 있었죠.

한지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가요. 우선 화려하지 않다는 점. 소박하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한지만의 미감이 있어요. 그리고 한지는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소재예요. 바닥에 붙이면 장판이 되고, 벽에 붙이면 벽지가 되죠, 또 오래전부터 책을 만드는 데도 이용했잖아요. 관용적이고 자유로워요. 그리고 한지는 성질이 예민하지가 않아요. 서양의 종이는 접히면 상품성이 떨어져요. 모셔놔야 하고, 구겨지면 게임 끝! 그런데 한지를 파는 인사동에 가서 보면, 한지 뭉치를 접어놔요. 구겨질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너그러움이 얼마나 멋있어요? 딱딱하지 않아서 보관하기 까다롭지 않고, 둘둘 묶어놓아도 될 정도로요. 그리고 한지는 친환경 소재잖아요. 

한지와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입구. 200개의 한지를 컬러 칩처럼 장식한 벽장 앞에 선 임태희 소장.

한지와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입구. 200개의 한지를 컬러 칩처럼 장식한 벽장 앞에 선 임태희 소장.

한지와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입구. 200개의 한지를 컬러 칩처럼 장식한 벽장 앞에 선 임태희 소장.

이곳을 어떤 공간으로 만들고 싶으셨나요. 한국성, 한국적인 느낌을 어떻게 선보여야 할까. 이게 가장 큰 숙제였어요. 제가 담고 싶었던 한국의 느낌은 ‘젊지도, 늙지도 않은’. 과거에서 가져온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살아 있는 존재로 보였으면 했어요. 너무 젊어서 철이 없거나 내공이 약하지 않고, 기품도 있고. 전통과 현대 둘 중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지만 둘 다 있는 한국의 미감. 일단 들어가 볼까, 하는 마음이 드는 공간을 만들자고. 한지를 어려워하지 않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가장 큰 목표였죠. 그러려면 일단 한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게 해야겠다!

소장님의 의도대로, 이곳을 감상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1층 중앙에 있는 큰 테이블을 중심으로 도는 거예요. 한지를 4가지 다른 관점으로 만날 수 있어요. 한지 200장을 컬러 칩처럼 만든 벽장을 지나면서 한지가 이렇게 다양하구나! 감상을 하고 나면 정면에 바닥과 벽, 천장을 모두 한지로 마감한 누마루가 있고요. 중앙의 테이블에서는 인화지나 인테리어용, 서화용 등 쓰임이 다른 한지 종류와 한지로 만든 디자인 아이템들이 놓여 있어요. 한지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면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 보세요. 한지 생산처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모은 곳인데 여기서 모임을 가지거나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단순히 예쁜 가구와 벽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런 의도를 담고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해요.

그다음이 가구와 구조물을 디자인하는 단계겠네요. 이때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나요. 쓰임을 정하지 않는 것. 시시각각 바뀔 수 있어야 해요. 1층의 대형 테이블, 누마루, 지하의 너른 공간 모두요. 저는 1층 중앙의 대형 테이블이 한옥에 있는 한 칸의 방이라고 생각해요. 옛날 우리 한옥은 네모난 방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불을 깔면 침실이 되고, 탁상을 놓으면 서재가 되었잖아요. 개관식때 이 테이블 위에 방명록을 쭉 펼쳐놓기도 했는데, 거대한 작품을 전시할 수도 있고 꽃으로 가득 채워볼 수도 있겠죠. 지하 공간에 배치한 테이블도 다리를 돌려서 빼면 차곡차곡 쌓아서 수납을 할 수 있는 가구예요. 의자만 두고 대규모 강연회를 열기 쉽도록 했어요. 디자이너로서 오래 남는 공간을 만들고 싶지만, 그 안에서는 자유롭게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둬야죠. 이런 관용과 너그러움이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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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과 천장, 바닥을 한지로 마감했다. 지우산, 부채, 인화지 등을 통해 한지의 다양한 활용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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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인화지에 인쇄한 흑백사진들.

저도 자연 안에 속한 사람이잖아요. 저만의 질서가 있지만 그 안에서 변화해야 한다, 똑같은 삶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해요. 매일 공간을 만들고 일을 하지만, 프로젝트마다 새롭기 위해 애를 써요.

지하 1층 한쪽엔 한지 연구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지하 1층 한쪽엔 한지 연구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지하 1층 한쪽엔 한지 연구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한지나 한옥의 방 한 칸에 담긴 너그러움! 일맥상통하네요. 한국성에 대한 고민을 언제부터 하셨나요. 제가 일본에서 건축 공부를 했는데, 그곳에서 오히려 ‘일본과 어떻게 달라야 하나’를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일본은 우리보다 국제사회에 먼저 자신들을 알리고, 일본 스타일을 구축해왔죠. 일본과 동양적 미감에 대해서 다양하게 배웠지만 동시에 나는 어떤 걸 만들어야 하지? 하는 생각이 숙명 혹은 콤플렉스처럼 따라다녔어요. 동양의 문화에 대한 경험과 관심을 넓혀오다가 깨달은 한국의 여러 가지 장점 중 하나가 관용, 너그러움이에요. 일본은 사회문화적으로 매뉴얼이 철저하고 엄격한데, 우린 ‘그래도 돼, 괜찮아’ 하는 정서가 있어요. 도(道)가 깊고 더 큰 마음이죠.

한국성을 지금의 주거 공간에 담는다면 어떤 시도를 해볼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 가능하게 해주는, 관용과 너그러움이 있는 게 한국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한옥을 보면 그 근방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나무를 가져다 기둥 4개를 세워서 한 칸을 만들어요. 우리는 자연이 만들어준 방 한 칸의 용도와 규격을 한정하지 않았어요. 주거 공간을 꾸밀 땐 한 번에 집 전체를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방 한 칸, 아니면 부엌이든, 범위를 줄여서 시작해보세요. 한 평이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관대한 공간이 있으면 돼요. 그다음엔 어떤 스타일에 집중하기보다는 ‘그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를 생각하면 쉬워요. 시간의 밀도를 높이기 위한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해요. 그러고 나면 한국적이든 아니든, 원하는 스타일을 더 다양하고 자유롭게 찾아갈 수 있을 거예요.

매번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디자이너로서 어디서 영감을 받으시나요. 최근 꾸준히 영감을 받은 게 있어요. 자연이에요. 저한테 이전까지 자연은 가끔 멀리 여행을 가서 멀찍이 바라보기만 하는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3년 전 사무실을 양재동으로 이전했는데 창밖이 온통 나무들인 거예요. 그렇게 나무들을 매일 보다 알게 됐어요. 자연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구나! 어쩜, 하루도 같지 않아요.

한지로 제작한 문구류, 스티커, 패턴 벽지 등을 보면 한지의 현대적 쓰임새가 무궁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지로 제작한 문구류, 스티커, 패턴 벽지 등을 보면 한지의 현대적 쓰임새가 무궁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지로 제작한 문구류, 스티커, 패턴 벽지 등을 보면 한지의 현대적 쓰임새가 무궁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정관 스님의 사찰 음식을 만드는 공간, 두수고방 프로젝트를 하면서요. 사찰에서는 각각의 사찰마다 대대로 내려오는 조리법으로 제철 채소를 요리해요. 그래서 스님들은 제철, 절기에 대해 엄격하죠. 우리는 사계절을 생각하는데 12절기, 많게는 24절기를 고려해요. 24절기면 2주마다 그때그때 햇빛과 바람이 달라서 맛있는 채소와 과일 맛이 바뀐다는 거잖아요.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답고 소중하다’라고 자연이 알려주는 것 같아요. 채소뿐 아니라 나무들도 그래요. 벚꽃, 진달래가 어느새 피고 지니까, 언제나 그 순간을 즐기고 만끽해야 한다는 것. 그러고 보니 한국의 자연은 참 부지런하고 바빠요.

자연에서 받은 영감이 소장님의 인테리어 작업에도 영향을 끼쳤나요. 자연은 하루하루 다르지만 또 질서가 있어요. 사계절을 살지, 갑자기 오계절이 되지 않는 것처럼 주기를 가지고 순환하죠. 저도 자연 안에 속한 사람이잖아요. 저만의 질서가 있지만 그 안에서 변화해야 한다, 똑같은 삶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해요. 매일 공간을 만들고 일을 하지만, 프로젝트마다 새롭기 위해 애를 써요. 그 과정을 통해 디자이너로서 성장하고, 제가 존재한다는 걸 깨닫기도 해요. 그런데 저의 프로젝트를 보고 어떤 분은 “어쩜 다 달라, 그럼에도 네가 다 보여”라고 하세요. 전 둘 다 좋아요.

이곳과 더불어 추천하고 싶은 소장님의 다른 프로젝트가 있을까요. 올해 문을 연 을지로의 카페 ‘을지다락’은 또 다른 한국성을 다룬 프로젝트였어요. 을지로 3가와 4가 사이 금속 제작소가 즐비한 골목의 카페예요. 큰 공장에서는 못 해내는 여러 가지 작업들로 산업화를 뒷받침한 을지로의 작업 공간들을 소재로 한 곳이죠. 원자재가 가공되는 과정, 이를 위해 손톱이 까매지도록 일을 하시는 분들, 노동의 신성함을 곳곳에 담으려 했어요. 카페를 찾는 젊은 세대들은 다른 감각으로 그곳을 느끼겠지만, 보여주고 싶은 부분이었어요.

‘그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가 중요하다고 하셨죠. 소장님은 요즘 어떤 시간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다도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요즘 다도는 저의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에요. 계절에 어울리는 차를 마시고 피어난 꽃을 옆에 두고 음미하는데, 어지러운 하루를 보내고 난 뒤 맞이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에요.

지난 7월 종로구 북촌에 문을 연 한지문화산업센터를 산책했다. 자연스럽고 유연한 한지를 닮은 공간을 연출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임태희 소장과의 시간.

CREDIT INFO

기획
김의미 기자
사진
이지아
장소협조
한지문화산업센터(02-741-6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