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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인류' 빈센트가 사는 법 12

빈센트의 연말인사

On December 26, 2019

“추억이 밥 먹여주냐?” 이런 흔한 말이 있지만, 나는 추억이 밥 먹여줄 때를 안다. 이를테면 부부 관계가 탐탁지 않을 때 아내가 책상 위에 붙여둔 연애 시절의 사진 한 장을 바라본다. 극장 앞 셀프 스티커 사진 코너에서 그날의 데이트를 기리며 찍은 사진이다. 남자는 찍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여자는 찍은 사진을 잊지 않고 잘 붙여놨다. 그 사진을 보며 우리도 연애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런 순간이 추억이 밥 먹여줄 때다. ‘쓸모인류’ 빈센트와 나눈 마지막 이야기를 전한다. ‘지금을 기억하세요. 기록하는 인간은 행복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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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의 가회동 한옥 대문은 초록색이다. 빨간색 포인트를 몇 군데 장식하면, 그대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낼 것이다. 빈센트는 집의 군데군데에 삶을 즐겁게 만드는 장치들을 두었다.

지인의 연락처부터 짤막한 메모까지 그의 벽은 어디고 메모로 가득하다.

지인의 연락처부터 짤막한 메모까지 그의 벽은 어디고 메모로 가득하다.

지인의 연락처부터 짤막한 메모까지 그의 벽은 어디고 메모로 가득하다.

빈센트의 집엔 방명록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린 어른이 사는 가장 큰 집.” 무슨 메모일까? 빈센트의 집을 방문한 지인이 남긴 글이다. 빈센트의 집에는 방명록이란 게 있다. 결혼식이나 행사장에 가면 축의금을 내면서 이름을 적는 방명록이란 게 있는데, 바로 그런 방명록이다. 빈센트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이들에게 그날의 가벼운 소회를 적고 가라고 한다. 사람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날 받은 느낌을 간단한 글로 혹은 그림으로 남긴다. 빈센트의 방명록은 삶의 족적(足跡, 발자취)이다. 이 족적을 두고 엉뚱한 상상력을 가동한다. 먼저, 발자국이 중요했던 시기는 수렵시대일 것 같다. 먹잇감이 될 야생동물의 발자국을 따라 사냥의 경로를 탐색했을 것이다. 동물의 발자국은 생존과 관련된다. 둘째, 범죄자를 잡을 때 지문 외에 족적 감식으로 강력사건을 해결하곤 했다. ‘셜록 홈즈’ 시리즈 중 《바스커빌 가문의 사냥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시신 옆에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을 보았소? 남자 발자국이었소, 아니면 여자의…?” “홈즈 씨, 그것은 엄청나게 큰 개의 발자국이었습니다.” 발자국은 ‘사건’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큰 사람이 떠났을 때 그가 남긴 성과를 기리며 무슨 무슨 족적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떠난 자에겐 발자국이 없다. 말 그대로 남은 자가 먼저 떠난 자의 궤적을 기억하는 것이다. 부족한 머리로 여러 상상력을 가동해보니, ‘족적’은 평범한 일상이 아니다. 꼬리를 물어, 나는 빈센트의 방명록에서 셜록 홈즈의 발자국을 생각한다. 반복되는 일상은 지루하다. 그래서 오늘은 뭔가 기이한 ‘사건’이 벌어지면 좋겠다는 태도를 본다. 평범한 집에 방명록을 두는 사례가 드무니, 이런 내 추측은 제법 논리적이다. 잠시 빈센트의 방명록을 훑어본다. 집을 방문한 사람들의 흔적이 다양하다. 무엇보다 다들 이 집에서 재밌게 보냈구나, 그런 게 느껴진다. 또 빈센트는 매일 재밌게 살고 있구나, 그보다 재밌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구나, 하며 생각에 잠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나이가 들수록 삶의 속도가 빠르다고 느끼는 이유를 ‘회상효과’로 설명했다. 〈김정운의 클로즈업〉이라는 칼럼에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이유’라는 글을 읽었다. “기억 속에 저장된 내용이 많으면 그 삶의 시기가 길게 느껴지고, 기억할 내용이 적을수록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청소년기까지의 기억은 생생한 데 반해 가장 바쁘게 살았다고 여기는 40~50대의 기억에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이유가 있다. 정신없이 바쁘기는 했지만 별로 의미를 부여할 일이 많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이유? 한마디로 재미없이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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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의 구닥다리 디지털카메라. 10년 넘게 사용 중이다. 어디를 가든 이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어느 골목에서, 또 친구들과 매일의 시간과 장소를 기록한다. 처음 카메라를 샀을 때 저장 공간은 128MB였던 게 지금은 64GB로 늘었다. 그는 64GB만큼의 즐거운 일상을 갖고 사는 셈이다.

빈센트의 구닥다리 디지털카메라. 10년 넘게 사용 중이다. 어디를 가든 이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어느 골목에서, 또 친구들과 매일의 시간과 장소를 기록한다. 처음 카메라를 샀을 때 저장 공간은 128MB였던 게 지금은 64GB로 늘었다. 그는 64GB만큼의 즐거운 일상을 갖고 사는 셈이다.

 

재밌게 사는 시간은 늦게 흐른다
빈센트는 농담처럼 3백 살까지 살 거라고 얘기한다. 재미없이 사는 시간은 빨리 가지만, 재미있으려고 노력하는 시간은 길게 느껴진다. ‘회상효과’로 계산하면, 빈센트의 3백 살 수명론이 허튼 얘기만은 아닌 셈이다. 결국, 얼마를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니까. 빈센트는 십수 년 전부터 집에 방명록을 두었다.  

 

“재미로 시작한 거야. 어, 이날 우리 집에 누가 왔네? 
이런 ‘사건’이 있었네! 한 사람의 삶에는 많은 양의 데이터가 있잖아. 
그것 중 재미나고 기억할 만한 것들을 효율적으로 저장, 검색, 관리하는 방법 중 하나랄까? 
방명록은 방대한 내 인생에 관한 데이터베이스 매니지먼트(Database Management)의 하나야.”

 

데이터베이스 매니지먼트라! 흥미로운 용어였다. 빈센트에겐 인생 정보관리를 위한 여러 도구들이 있다. 방명록이 있고, 메모장과 펜이 늘 곁에 있다. 10년 넘게 사용 중인 구닥다리 휴대용 디지털카메라도 빼놓을 수 없다. 구매 당시 125MB 정도이던 저장 공간은 일상의 사진이 쌓이면서 64GB로 용량이 늘었다. 세월이 흘러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카메라를 들고, 빈센트는 오늘도 여러 일상을 포착한다. 그 오래된 카메라에는 64GB만큼의 삶이 담겼을 것이다. “다람쥐들은 음식을 여기저기 숨기는 버릇이 있잖아. 그러다 보면 맛난 음식을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리곤 해. 반대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까마귀는 다람쥐들이 어디에 음식을 숨겼는지 다 볼 수 있지. 기록이 중요하지만, 그걸 정리하는 일 역시 중요한 법이야. 나는 필요에 따라 여러 저장 도구들을 사용해. 그리고 적당한 시점에 컴퓨터 저장 공간이나 나의 뇌를 통해 삶의 기록들을 재정리하는 습관을 갖고 있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내 인생. 삶을 기록하는 기억 저장장치는 잘 작동하고 있을까? 최근 업그레이드한 휴대폰은 용량이 128GB로 늘었지만, 커가는 네 살 딸을 휴대폰으로 찍고 담는 횟수는 줄었다. 어젯밤에는 말 안 듣고 소란을 키운다고 꿀밤만 한 대 놨으니. 다람쥐 아빠의 인생 저장장치는 에러가 난 셈이다. ‘바로 지금’이라는 그 소중한 기록을 잊고 사는 어른에게, 빈센트가 한마디 했다. “아이가 첫걸음마를 뗐던 순간, 젖병을 뗐던 날, 나만의 춤을 추거나 노래를 따라 하던 그런 날들을 안 남겼어? 아니, 그게 얼마나 멋진 기록인데!” 지금을 애써 기록하려는 인간과 기록조차 하지 않는 이의 삶은 무척 다르다. 딸에게 저지른 나쁜 사건은 애써 잊고, 딸이 만드는 좋은 사건도 그저 그렇게 넘겨버리는 무심한 아빠에게, ‘기록하는 인간’ 빈센트는 이런 말을 했다.

 

“향을 만드는 사람들 있지? 조향사라고 부르나? 
그들에겐 냄새와 향기를 기록하는 게 일이야. 재미난 게 뭔 줄 알아? 
어떤 조향사는 나쁜 냄새들을 정밀하게 기록해서 
그 기록을 바탕으로 좋은 향기를 만들어. 
그 순간이 좋든 나쁘든, 삶을 기록하는 사람은 그 수고로운 
기록을 통해 원하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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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의 기억 저장소. 그는 삶을 기록하는 인간이다. 그가 재미난 얘기를 하나 했다. 다람쥐들은 먹이들을 여기저기 숨겨놓는 습성이 있는데, 너무 여기저기 숨겨놔서 맛난 음식을 못 찾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 인생의 맛난 음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기록하고 정리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빈센트는 이를 데이터베이스 매니지먼트(Database Management, 내 인생 정보관리 하기)라고 불렀다.

빈센트의 기억 저장소. 그는 삶을 기록하는 인간이다. 그가 재미난 얘기를 하나 했다. 다람쥐들은 먹이들을 여기저기 숨겨놓는 습성이 있는데, 너무 여기저기 숨겨놔서 맛난 음식을 못 찾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 인생의 맛난 음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기록하고 정리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빈센트는 이를 데이터베이스 매니지먼트(Database Management, 내 인생 정보관리 하기)라고 불렀다.

 

친구야, 우리는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으려고 했어
내 기억 속 한편에 20대 초반의 내가 서 있다. 용돈이라도 보탤까 해서 어느 백화점에서 물류 아르바이트를 했다. 지하 창고에서 먼지를 마시며 일하다 보면 밤 10시. 그 시간이 되면 백화점에는 폐점을 알리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화려했던 발걸음이 줄어드는 그 시간의 멜로디는 제법 씁쓸했다. 노래는 메리 홉킨(Mary Hopkin)의 ‘Those were the days’. 백화점이란 공간에서 왜 이런 가사를 골랐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삶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어른은 그때의 노랫말 일부를 곱씹어본다. ‘옛날에 선술집이 하나 있었지 / 우린 거기서 한두 잔을 기울이곤 했어 / 우리가 얼마나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나? / 우리가 하려고 했던 거창한 계획들도 / 우리는 그날들이 끝나지 않을 줄 알았지 / 우리는 영원히 노래하고 춤추려 했었지 / 우리는 선택한 인생을 살려고 했고 / 우린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으려고 했었지 / 우린 젊었고 우리의 길에 확신이 있었으니까 / 그런데 세월은 쏜살같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 우리의 빛나던 신념들은 그 세월 속에서 잃어버렸지 / (중략) / 그때가 좋았지 친구야, 그래 그때가 좋았어.’
‘쓸모인류 빈센트가 사는 법’의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곧 연말을 맞이하는 〈리빙센스〉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친구야, 우리가 한 해 동안 얼마나 웃으며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나?”

 

약속들도 잊지 않기 위해 빼곡하게 적어두고 챙긴다.

약속들도 잊지 않기 위해 빼곡하게 적어두고 챙긴다.

약속들도 잊지 않기 위해 빼곡하게 적어두고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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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한도 굳이 잘 보이는 곳에 큼직하게 기록해준다.

유통기한도 굳이 잘 보이는 곳에 큼직하게 기록해준다.

“추억이 밥 먹여주냐?” 이런 흔한 말이 있지만, 나는 추억이 밥 먹여줄 때를 안다. 이를테면 부부 관계가 탐탁지 않을 때 아내가 책상 위에 붙여둔 연애 시절의 사진 한 장을 바라본다. 극장 앞 셀프 스티커 사진 코너에서 그날의 데이트를 기리며 찍은 사진이다. 남자는 찍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여자는 찍은 사진을 잊지 않고 잘 붙여놨다. 그 사진을 보며 우리도 연애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런 순간이 추억이 밥 먹여줄 때다. ‘쓸모인류’ 빈센트와 나눈 마지막 이야기를 전한다. ‘지금을 기억하세요. 기록하는 인간은 행복하답니다.’

CREDIT INFO

기획
정미경 기자
강승민
사진
이지아(스튜디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