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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정 기자의 ‛한 잔’

가을엔 술맛 나는 영화 한 편

On September 29, 2017

가을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그 영화에선, 술맛이 난다.

3 / 10
이터널 선샤인, 2004

이터널 선샤인, 2004

  • 이터널 선샤인, 2004이터널 선샤인, 2004
  • 물랑 루즈, 2001물랑 루즈, 2001
  • 비포 선라이즈, 1995비포 선라이즈, 1995
  • 엘리노어 릭비 : 그 남자 그 여자, 2014엘리노어 릭비 : 그 남자 그 여자, 2014
1 그랜드 압생트 스페셜 에디션. 2 봄베이 사파이어 진

1 그랜드 압생트 스페셜 에디션. 2 봄베이 사파이어 진

1 그랜드 압생트 스페셜 에디션. 2 봄베이 사파이어 진

에디터의 근황부터 전한다. 출근길에 오른발을 조금 삐끗한 것 같은데 골절상이란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봐야 이미 부러진 건 부러진 것이고, 부러진 뼈를 붙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시간뿐이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긍정적인 앉은뱅이가 되는 수밖에. 의사는 담담하게 전치 두 달의 깁스와 절대 안정 처방을 내렸다.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벗어나기 위해 엉거주춤 몸을 돌릴 무렵, 또 하나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술은 먹지 말고요.” 아, 잔인한 가을. 단지 잠시 발을 헛디뎠을 뿐인데 인간의 삶이 처절해지기가 이리도 쉽다니! 허망하고 허망해라. 소설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처럼 창가에 앉아 처량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어느 날, 코끝에 가을의 찬 기운이 닿았다. 계절이 변하는 바람이었다. 한 잔 하고 싶지만 몇 주간은 이별해야만 한다. 님에게 닿을 수 없다면 보기라도 해야겠다. ‘그래, 간접 경험을 해보자’ 하곤 가을과 술, 2가지 키워드에 꼭 맞는 영화들을 골랐다.

기분을 밝히기 위해 <이터널 선샤인> <물랑 루즈>를 봤다. 두 영화에 나오는 술의 컬러, 남녀의 연애 감정이 모두 쨍쨍한 점이 마음을 끌었다. 은근하지 못한 것들은 귀여워서,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터널 선샤인>의 클레멘타인은 자신의 커피를 받자마자, 종업원 몰래 가방에서 미니어처 병에 담긴 푸른색 봄베이 사파이어를 꺼내 커피에 섞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눈이 마주친다. 그 눈맞춤은 곧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질 남녀의 처음이 된다. <물랑 루즈>에 등장하는 에메랄드 컬러의 압생트도 주인공 남녀의 만남을 대놓고 주선한다. 가난한 작가 지망생인 크리스티앙이 파리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처음으로 압생트를 마신 밤. 숫기 없던 그는 돌연 물랑 루즈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절세미인 샤틴은 압생트에 들어 있다는 ‘초록 요정’만큼이나 그의 혼을 쏙 빼놓는다.

현실에서 그렇듯, 영화 속에서도 ‘술’은 단순히 연애 감정만 부추기는 매개체가 아니다. <비포 선라이즈>와 <엘리노어 릭비 : 그 남자 그 여자>는 감정 저 끝에 뭔가를 파묻기도, 헤쳐내기도 하는 술의 역할을 맛깔스럽게 드러낸다. 두 영화에는 모두 와인이 등장하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 <비포 선라이즈>에는 날이 밝을 때까지 딱 하룻밤 함께할 수 있는 젊은 남녀가 등장한다. 밤이 새도록 이어지는 그들의 수다는 끊길 줄 모르고, 남자는 여자를 위해 낯선 도시의 바에서 외상으로 와인을 구한다. 둘은 와인 한 병을 나누어 마시고,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며 감정을 세월에 묻는다. 기차역에서 기약 없는 것을 기약하는 마지막 말들이 어찌나 먹먹하던지. <엘리노어 릭비 : 그 남자 그 여자>에는 결혼이 준 상처를 딛고 일어나기 위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엘리노어가 등장한다. 그녀의 엄마로 분한 이자펠 위페르는 시종일관 와인이 찰랑이는 잔을 손에 들고 있다. 취기 때문인지, 그간 딸과 주고받지 못했던 솔직한 감정들을 나눈다. 상처받는 공간이자 동시에 치유의 공간인 집. 그곳에서의 와인으로 말미암아 엘리노어는 그동안 꽁꽁 숨겨둔 감정을 다 풀어낸다. 자신의 삶을 찾아 다시 세상으로 나서는 그녀에겐 그게 힘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감정에 빠져들 때마다 에디터는 조금씩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술이 아니라 술로 하여금 일어나는 일들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때로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때로는 힘든 일을 가슴에 묻고, 때로는 섭섭했던 감정을 토로하게 되니까 좋았던 게 아닐까 자문했다. 그것이 정말인지 알아내려면, 어서 뼈를 붙이고 술 한 잔 입에 털어 넣는 수밖에 없겠다.

박민정 기자

박민정 기자

애주가 집안의 장녀이자, 집안 어른들로부터 제대로 술을 배운 성인 여성. 주류 트렌드와 이를 즐기는 방법에 대한 나름의 소신을 독자들과 공유한다.

가을바람이 불면 생각나는 그 영화에선, 술맛이 난다.

CREDIT INFO

기획
박민정 기자
취재협조
에프엘코리아(www.flkorea.co.kr), 바카디(www.bacard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