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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강경

역사의 물길이 굽이치는 비옥한 땅, 충남 논산 강경의 이야기와 사람들을 만났다.

UpdatedOn February 2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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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논산역까지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강경역, 연산역에도 기차가 다닌다.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논산역까지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강경역, 연산역에도 기차가 다닌다.

서울 출발을 기준으로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논산역까지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강경역, 연산역에도 기차가 다닌다.

기차의 속도로 흐르는 풍경을 바라본다. 언 땅이 풀리고 또다시 싹이 움트는 순간에 감탄하면서. 서울 용산역을 출발한 KTX 호남선 열차는 몇 번이고 산, 물, 들을 헤치며 충남 논산역에 다다른다. 계절의 변화, 자연의 은밀한 생명 활동을 목격하는 기쁨은 기차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작은 특권일 것이다. 남쪽으로 1시간 40분 남짓 달렸을 뿐인데 시간을 거슬러 봄을 만난 기분이다.

오늘날 논산에서 여객열차를 취급하는 기차역은 세 곳이다. KTX가 정차하는 논산역, 최고령 급수탑을 거느린 연산역, 호남선 충남 구간의 마지막 역인 강경역. 세 역이 견뎌 낸 녹록지 않은 세월을 견줄 수는 없어도, 강경역을 품은 강경읍의 역사는 유독 애달픈 데가 있다. 한때 충청도에서 가장 번성한 포구와 시장을 거느렸으나 일제 침탈 기지로서 시대의 고통을 온몸으로 통과한 땅. 항거의 상흔과 전쟁의 아픔, 옛 시절의 영화가 공존하는 고장. 강경에서 이른 봄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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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강경에는 전망 좋은 명소가 여럿이다. 미내다리에 올라 강경천을 바라보거나, 임리정과 팔괘정에서 금강을 마주할 때 일상의 시름이 절로 씻긴다. 팔괘정 뒤편 돌산전망대에서는 읍내와 나루의 풍경을 동시에 조망한다. 문의 041-746-8502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강경에는 전망 좋은 명소가 여럿이다. 미내다리에 올라 강경천을 바라보거나, 임리정과 팔괘정에서 금강을 마주할 때 일상의 시름이 절로 씻긴다. 팔괘정 뒤편 돌산전망대에서는 읍내와 나루의 풍경을 동시에 조망한다. 문의 041-746-8502

금강 줄기 따라, 조선 시대 강경을 엿보다

강경천 둔치에 자리한 미내다리는 이 여정의 관문이다. 길이 30미터, 너비 2.8미터, 높이 4.5미터 규모의 아담한 구조물이 조선 시대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제일의 다리였다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상기한다. 다리의 내력을 적어 놓은 은진미교비를 토대로 고증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는데, 마른 들판 위에 우뚝 선 교각이 아무래도 낯설게 느껴진다.

“미내는 금강 지류인 강경천의 옛 이름이에요. 이 다리를 준공했을 때만 해도 여기까지 미내가 들어찼을 거예요.” 김경란 문화관광해설사가 강바람에 옷깃을 여민 채 말을 잇는다. “호남 사람들은 한양에 가기 위해 꼭 이 다리를 거쳐야 했어요. 원래 직선 형태의 평교였는데, 강경 일대 유지들이 기금을 모아 조선 영조 때 무지개 모양의 홍예교로 개축했지요.” 미내다리는 강경이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로 기능했다는 증거이자 사료다. 홍예의 종석에 새긴 호랑이와 용 머리도 예사롭지 않다. “정월대보름에 이 다리를 자신의 나이만큼 오가면 액운을 피하고 소원을 이룬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답니다.” 나이만큼 횟수를 채울 자신은 없었지만 잠시나마 답교놀이의 재미를 맛보기로 했다. 반들반들한 돌바닥을 지르밟는 동안 이 다리를 건넜을 무수한 사람을, 삶과 이야기를 상상한다.

강경 땅의 역사를 짐작하게 하는 또 하나의 명소가 있다. 이름하여 팔괘정. ‘송자’라 칭송받는 유학자 우암 송시열이 세운 정자로, 금강 줄기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올라섰다. 스승인 사계 김장생의 강학 공간인 임리정으로부터 불과 50미터 거리에 위치한다니, 은사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모서리 쪽 창문은 안쪽 창문과 달리 아래에 공간을 살짝 띄워 달았어요. 이 높이만큼 방바닥을 높게 돋워서 바깥 풍경이 더 잘 보이도록 고안한 거예요.” 이어지는 설명에 <택리지> 저자 이중환이 이곳에 체류하며 몸을 추스르고 글을 집필했다던 일화도 떠오른다.

단출한 건물 뒤꼍 대숲에 이르자 글자를 새겨 넣은 커다란 바위를 맞닥뜨린다. 늘 푸른 언덕이라는 의미의 ‘청초안(靑草岸)’, 꿈을 걸어 두었다는 뜻의 ‘몽괘벽(夢挂壁)’은 우암이 손수 각자한 것이다. 삶이 곧 한 시대의 사상이었던 선비의 꼿꼿한 풍모가 글자 하나하나에 서린 듯하다.

골목을 돌고 돌아, 근대의 강경을 경험하다

이제 우리의 타이머는 19세기 말, 강경에 충남 지역 최초로 전기가 공급되던 시점을 가리킨다. “당시만 해도 이곳에 하루 100여 척의 배가 쉴 새 없이 드나들었어요. 유동 인구는 어림잡아 10만 명에 달했다고 해요.” 김 해설사에 따르면 이 시기 강경에는 우체국과 은행 등 주요 기관이 앞다퉈 자리 잡았음은 물론, 백화점을 비롯한 각종 상점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다시없을 화려한 시절이다.

강경 근대역사문화거리를 에워싼 일대는 그 시대의 풍경을 아우르는 거대한 디오라마 같다. 특히 구 한일은행 강경 지점에 들어선 강경역사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역 근대 문화유산 자료와 주민이 실제로 사용하던 여러 가지 기증품을 한데 모아 둔 생활사 박물관으로, 그 가치가 남다르다. 1911년 강경에서 영업을 개시한 한일은행 강경 지점은 1913년 지금 위치에 건물을 지었다. 10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강경의 흥망성쇠를 목격해 온 건물은 장식적인 파사드와 거대한 금고, 낡은 벽체만 남은 창고 터를 통해 당시 강경의 경제적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강경역사관 바로 옆에는 호텔과 유흥 시설을 재현한 ‘강경구락부’가 위치하는데, 세트장처럼 겉면만 꾸민 건물이 아닌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는 실제 영업장이므로 먹고 마시며 쉬어 가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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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한일은행 강경 지점 건물을 사용하는 강경역사관은 강경 근대 역사 기행의 시작점이다. 옥녀봉 가는 길에 맞닥뜨리는 특별한 예술 공간, 옥녀봉 예술촌도 놓쳐선 안 될 관람 포인트다. 문의 041-745-3444(강경역사문화연구원)

구 한일은행 강경 지점 건물을 사용하는 강경역사관은 강경 근대 역사 기행의 시작점이다. 옥녀봉 가는 길에 맞닥뜨리는 특별한 예술 공간, 옥녀봉 예술촌도 놓쳐선 안 될 관람 포인트다. 문의 041-745-3444(강경역사문화연구원)

대전과 전북 군산 등 주변 도시가 강경을 앞지른 것은 1914년 호남선 철도 개통 무렵이다. 이미 1899년 군산 개항,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 이후 강경 포구와 강경장의 영향력은 점진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금강 물길을 통해 집결했던 충청도와 전라도의 미곡이 더 이상 강경을 거치지 않고 반출되는 한편, 일제의 수탈은 하루가 다르게 무자비해졌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10일, 옥녀봉에서 강경 첫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다. 그로부터 4월 7일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최대 1000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다. 항일 정신은 1924년 신사 참배 거부 운동으로 이어졌다.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를 이끌던 성도와 강경보통학교 학생들이 참배에 저항했는데, 홍교리 강경성결교회 마당에 세운 신사 참배 거부 선도 기념비가 이 사건을 널리 전한다. “비석에 돋을새김해 넣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세요. 모두 입을 벌리고 있는데, 이는 거부의 ‘거(拒)’ 자를 의미해요.” 거부라는 단어가 지닌 뜨거움과 단단함을 한동안 곱씹어 생각한다.

옥녀봉 가는 길, 오늘의 강경을 맞닥뜨리다

전쟁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젓갈 시장을 제외하곤 강경의 수많은 사람, 물자, 건물이 버티지 못하고 스러졌다. 번듯하던 한약방, 정미소, 양조장, 기름집, 예식장이 차례로 거리를 떠났다.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흘러 강경은 논산의 소읍이 된다. 다만 풍요로운 물자에서 비롯한 너그러운 마음, 스승을 흠모하는 정신, 자연을 완상하며 노래할 줄 아는 멋과 흥은 이 땅에 오래도록 남아 ‘강경 사람’이란 정체성과 자부심을 일궜다.

홍교리와 중앙리를 가르는 옥녀봉로는 1919년 3월 옥녀봉에서 만세 운동을 벌이던 이들이 시가 행진을 하던 곳인데, 최근 이 거리에 옛 모습을 재건한 상점이 하나둘 올라서고 있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려는 움직임이다. ‘광신석유’를 해체 복원한 건물에 입점한 카페 ‘갱갱’도 그중 하나다. 좌석 한편을 점유하는 커다란 기름통, 두 개의 상량문, 목재 바닥 등에서 지난 세월을 엿본다. “기름을 받아 오라는 심부름을 하러 여기 와 봤다는 손님이 계셔서 놀란 기억이 나요. 건물의 역사를 알아차리는 분들을 만날 때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죠.” 청년 창업 지원 프로그램으로 갱갱을 맡게 된 김영찬 대표의 말이다. 갱갱과 비슷한 시기에 입점한 쌀국수 식당 ‘깜뚜누들’, 디저트 카페 ‘멜랑티카페’, 중화요리 식당 ‘홍교리’, 경양식 레스토랑 ‘강경돈까스’가 결성했다는 강경 자영업자 청년 모임의 열정이 이 거리의 환한 앞날을 예비하는 듯하다.

자연을 완상하며 노래할 줄 아는 멋과 흥은 이 땅에 오래도록 남아
‘강경 사람’이란 정체성과 눈부신 자부심을 일궜다.

옥녀봉을 오르는 길, 비좁은 골목 한편에 붙은 이정표를 따라 마을 깊숙이 들어서니 말쑥한 일본식 가옥 한 채가 나타난다. ‘소리하는 옥녀봉’이라고 쓴 커다란 현수막이 나부끼는 이곳은 옥녀봉 예술촌이다. 강경에서 나고 자라 연극배우와 방송작가로 활동해 온 조수연 대표가 조선식산은행 강경 지점 관사를 매입해 지역민 중심의 예술 문화 공동체를 꾸려 나간다. “3년에 걸쳐 건물을 정비한 끝에 현재 모습을 갖췄어요. 강경역사문화연구원에 따르면 95퍼센트가 그대로라 할 정도로 보존 상태가 훌륭하답니다.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할 주민 극단을 결성했어요. 진양조를 창시하고 중고제를 집대성한 강경 출신 소리꾼 김성옥의 이야기를 극화하기로 했지요.” 그의 말마디에 깃든 진심이 봄볕처럼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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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해가 기울어 서쪽 하늘에 걸린다. 옥녀봉 정상, 아름드리 느티나무 옆에 서서 금빛으로 물든 금강을 바라본다. 저지대인 강경 땅을 한눈에 조망하는 해발 44미터의 옥녀봉은 서녘의 황홀한 일몰을 눈에 담는 최적의 장소다. 시시각각으로 붉어지는 노을을 마주하며 생각한다. 저물었다가도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닮은 강경이라고.

+ 강경 근대문화역사거리 × 청년 희망 프로젝트

논산시에서는 ‘청년 희망 프로젝트’를 통해 청년에게 창업 기회를 제공한다. 강경 근대문화역사거리에 위치한 미식 공간 다섯 곳은 모두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운영 중이다. ‘강경 근대 문화 거리 청년들’ SNS 계정에서 이들의 소식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의 @come_i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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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강은주
photographer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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